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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강좌 차 한잔과 함께 하는 불교 이야기 (1)
차 한잔과 함께 하는 불교 이야기 (1)                     일장 고관철(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상임대표)


불교가 참 어렵다고 말합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쉽게 말하기도 하지만 본뜻을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다고 말합니다. 물론 모든 종교가 다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만은 불교는 더욱 더 그러하다고 합니다.
아마 그건 2500년이라는 시간의 깊이 때문이 아닐까요?
길가에 세워진 돌부처를 보고 피곤한 여행자는 해가림 쉼터로 이용하기도 하고, 하루 일을 나가는 농부나 일꾼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수호신령으로 모시기도 하고요, 깊은 산속 암자를 찾아가는 스님에게는 반가운 일주문의 동자상이 되기도 하며, 어떤 사람에겐 오래된 민간 문화의 한 표현으로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2500년 동안, 복을 구하는 신앙으로 혹은 사유의 철학체계로서, 혹은 모든 문제를 한순간에 풀어낼 궁극의 해답으로서, 혹은 인간적 고통과 괴로움의 해방구로서 피안의 세계를 제시하는 수행의 길로서, 그리고 수많은 나라의 문화와 더불어 융화되면서 불교문화라는 인류사의 한 흐름으로 자리잡아 온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불교가 뭐냐? 혹은 불교는 무엇에 대한 가르침인가? 라고 묻는다면 다음 세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장군과 찻잔의 이야기입니다.
옛날 중국에 무수한 전쟁에서 승리한 아주 용맹스럽기로 이름난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평소 애지중지하던 골동품 찻잔을 꺼내어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리저리 만지다가 갑자기 찻잔이 손에서 미끄러졌습니다.
“어이쿠”
얼른 찻잔을 움켜잡은 장군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천만대군을 이끌고 죽음이 난무하는 전쟁터를 들락거리면서도 한번도 떨린 적이 없었는데, 어이하여 이까짓 찻잔 하나에 이토록 놀란단 말인가?”
장군은 미련없이 찻잔을 깨어버렸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한 아리따운 처녀와 두 수행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스님이 절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시내를 건너게 되었는데 시냇가에 한 아리따운 여인이 머뭇거리고 서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시내를 건널 참이었으나 물이 깊고 물살이 센데다 징검다리조차 없었던 모양으로 건너지 못하고 난처한 얼굴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한 스님이 여인을 못 본체하고 혼자서 물을 건너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스님이 그 여인에게 등을 들이대며 말했다.
"업히시지요. 소승이 건네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 스님은 여인을 시내 저쪽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두 스님은 다시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여인을 업지 않았던 스님이 동행하는 스님에게 화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수도하는 몸으로서 여인의 몸에 손을 대다니, 자네는 부끄럽지도 않은가?"
하지만 여인을 업었던 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더욱 화가 나서 동료 스님을 또 나무랐습니다.
"자네는 단순히 그 여인이 시내를 건널 수 있게 도왔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여인을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것이 우리의 신성한 계율이라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라고 그 스님은 계속해서 동료 스님을 질책했습니다.
이에 여인을 업었던 스님은 한 두어 시간쯤 질책을 듣고 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벌써 두어 시간 전에 그 여인을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자네는 아직도 그 여인을 업고 있군 그래!”



마지막 이야기는 ‘전등록’에 나와 있는 고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한국불교의 사상적 원류인 선종의 첫 번째 스승인 달마조사의 다음인 즉 2대종조인 혜가스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혜가스님은 늦은 나이에 달마조사를 찾아뵙고 제자가 되길 간청하면서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한지를 증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팔을 잘라서 달마조사에게 받쳤다고 합니다. 제자가 되고 나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달마조사와 나눈 대화의 한 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하며 선불교의 핵심 주제가 됩니다.


하루는 혜가가 달마스님을 찾아가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괴로운 표정으로 말합니다. “제자가 마음이 불안합니다. 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달마스님이 큰소리로 호통을 치며 말합니다.
“너의 마음을 가져 오너라, 편안하게 해주겠다.”
다시 혜가가 더욱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합니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달마스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너를 안심(安心)시켰다.”


즉,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는 마음이 도대체 어디에 있어서 그리 아프다는 것일까요? 이때에 혜가는 이 말의 의미를 깨우쳐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사라질 것을 영원하다고 하며, 현상을 마치 본질처럼 여기고, 그냥 이전부터 있어 왔던 것인데 마치 지금 새로 생긴 것인 마냥 들뜨고 신기해하고 두려워하는 그런 생각에서 괴로움이 생긴다고 합니다. 즉 인식의 오류로서 뒤집혀 있는 생각이라 하여 ‘전도몽상’이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그 궁극적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결국 이러한 ‘전도몽상’이 생길 수 없겠지요, 그러면 결국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인간 이외의 대상세계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인간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2500년 전에 고타마 시타르타가 자신의 왕위를 버리고 꼭두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성벽을 뛰어넘어 숲속으로 출가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 ‘마음의 괴로움’ 때문이며, 그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것도 결국 이 괴로움을 해결했기 때문이며, 달마조사가 전한 불교의 가르침인 불법도 결국 이 마음의 본 모양에 다름 아니며 아직도 불교가 우리속에 살아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일 것입니다. 괴로울 때 한번 들여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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