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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장애인 우리 역사에도 이름난 장애인 예술가가 많았다
우리 역사에도 이름난 장애인 예술가가 많았다            정창권(고려대학교 국문과 초빙교수)


우리는 대개 서양의 이솝이나 세르반테스, 베토벤, 헬렌 켈러 등은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우리 역사 속의 장애인 예술가는 제대로 모르고 있다. 한데 과거 우리나라에도 문학가나 화가, 음악가 등 이름난 장애인 예술가가 대단히 많았다. 먼저 문학가로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정진이나 조성기, 장혼 등 매우 많았지만, 여기에선 대표적으로 시인 부부인 김성침과 홍씨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김성침(金聖?)은 호가 학산(鶴山)으로, 조선후기 이름난 시인이었다. 5살 때 두창(천연두)을 앓다가 두 눈을 못 보게 되었지만, 천성이 매우 슬기롭고 영리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서전(書典)을 가르쳐 문리가 트인 후에는 날마다 남의 글읽는 소리를 듣고 따라 읽었는데, 한번 들으면 단번에 외우곤 해서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는 글 짓는 것이 남의 표본이 될 만하고, 시 또한 청절하였다. 저서로 《잠와집(潛窩集)》 2권을 남겼다고 하는데, 현전 여부는 미상이다.
그의 부인 홍씨는 나이가 한 살 위였는데, 그녀도 역시 5살 때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하지만 뛰어난 효행과 훌륭한 행실이 있었다고 한다. 《소학》과《내훈》 및 다른 서책들을 배웠는데, 한번 배운 것은 결코 잊지 않았고, 시도 역시 잘 지었으며, 시풍도 매우 청절하였다. 김성침과 혼인한 뒤 50여년 동안 함께 살면서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데에 모두 법도가 있어, 당시 사람들의 훌륭한 사표가 되었다.


조선시대 장애인 화가로는 대표적으로 최북을 들 수 있다. 최북(崔北: 1712~1786?)은 그림을 잘 그렸는데, 한쪽 눈을 실명한 시각장애인이라서 늘 안경을 쓴 채 화첩에 얼굴을 대고 그렸다. 최북은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여기저기에 많은 일화를 남겼다. 한번은 금강산 구룡연에 갔다가 너무 즐거워 술을 마시고 몹시 취했다. 그리고는 통곡을 하다가 웃고, 웃다가 통곡을 하였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부르짖고서 몸을 날려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천하의 명인(名人)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名山)에서 죽어야 하리라!" 다행히 곁에서 구해준 사람이 있어 바닥까진 떨어지진 않았고, 들것에 실려 산 아래의 큰바위로 옮겨졌다. 그러자 최북이 숨을 헐떡이며 갑자기 일어나더니 큰소리를 질러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새들조차 짹짹거리며 모두 날아가버렸다. 최북은 보통 하루에 술을 대여섯 되나 마셨다. 시장바닥의 술집 아이들이 술병을 날라다주면, 최북은 그 자리에서 들이마시곤 하였다. 집안에 있는 책이나 종이, 돈까지 모두 술값으로 주어버리니 살림은 더욱 가난해졌다.
결국 최북은 평양과 동래로 떠돌아다니며 그림을 팔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비단을 가지고 문지방이 닿도록 줄을 이어 섰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산은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상히 여기고 따지자, 최북은 붓을 던지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에이 참, 종이 바깥은 모두 물이란 말야!" 최북은 그림이 자기 마음에 맞게 잘 그려졌는데도 돈을 적게 주면, 그 자리에서 성을 내고 욕하며 그림을 찢어버렸다. 반대로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는데도 그림값을 너무 많이 주면, 껄껄껄 웃으면서 돈을 집어던지고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그 사람을 가르키면서 비웃었다. "허허허, 저 따위 놈들은 그림값도 몰라!" 최북은 인물과 산수, 화조(花鳥), 초충(草蟲)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으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대부분 산수화이다. 특히 최북은 항상 '조선 사람은 마땅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라고 역설하였다.


끝으로 조선시대엔 '관현맹인' 제도를 두어 국가에서 정책으로 시각장애인 음악가를 양성하였다. 그래서 시각장애인 음악가가 대단히 많았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이름난 사람들도 상당수 출현하였다. 세종대 이반, 성종대의 김복산과 정범이 바로 그들인데, 이반은 현금을 잘 타서 세종에게 알려져 궁중에 출입하였고, 김복산과 정범은 가야금을 잘 탄다고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특히 김복산은 가야금 솜씨가 당대 일인자라고 알려졌는데, 그에 따라 성종 3년에는 포상으로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조선시대 유명한 장애인 음악가로는 백옥과 김운란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는 김운란에 대해서만 간략히 살펴보자.
김운란(金雲鸞)은 조선중기 성균관의 진사였는데, 불행하게도 진사에 합격한 뒤 눈병을 앓다가 두 눈을 모두 실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선비로서 음양 복서를 배워 점치는 일을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이에 아쟁을 배워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그 수법이 가히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어느날 밤 그는 시각장애로 인해 하늘의 해도 볼 수 없고, 다시 대과(大科)를 치를 수도 없으며, 또 음직(蔭職)을 구할 수도 없고, 일반인의 대열에 끼어 선비들과 교유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통해하면서, 그 무한한 슬픔을 아쟁에 부쳤다. 집안 가까운 남쪽 산록에 오래된 사당이 있어 그 담벼락에 의지하여 서너 곡조를 연주했는데, 그 소리가 몹시 웅장하면서도 애달팠다. 그러자 갑자기 사당 안의 귀신들이 일제히 무리지어 대성통곡을 하는데, 그 처량하게 우는 소리가 마치 물이 끓는 듯 요란하였다. 김운란은 크게 놀라 아쟁을 들고 도망쳤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성조가 조화롭고 기묘하여 귀신마저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전통시대에도 문학이나 그림, 음악 등의 분야에서 뚜렷이 두각을 나타낸 장애인 예술가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서양의 장애인 예술가 뿐 아니라, 이 분들에 대해서도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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