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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 영화라는 오락에 바라는 공적기여 강윤미(제주DPI 활동가)

 어린 초등학교시절, 한번쯤 학교 문 앞에서 노랑병아리를 만나거나 갓 낳은 강아지를 얻어다 키워보고 싶은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엔 누구나 동물과 함께 하고 싶은 동경 같은 게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엔 강아지를 키우거나 하는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이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2013년 12월, 나는 8살짜리 지체장애인 도우미개와 4년째 동거중이다. 이 아이와 함께 하는 동안 나는 많은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고, 이 사회에 나아가 그들과 일원이 되고자 하는 욕구도 높아졌고 삶의 방향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나의 동거견인 '마음이'이와 같은 제목으로 나의 관심을 끈 영화가 '마음이'란 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다.

 영화에는 특이하게도 광고에나 적용되는 3B((Beauty), 아기(Baby 혹은 children), 동물(Beast))가 등장한다. 광고에서는 어린아이와 여성 그리고 동물이 한 화면에 담기는 광고디자인은 일정비율정도의 소비자는 반드시 그 광고에 주목한다는 기본적인 자료를 토대로 광고제작을 하게 된다. 이러한 약간의 의도적인 시선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는 그 의도에 잘 맞춰진 그림이고 그래서 예쁘고 슬픈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겐 환영받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하는 지극히 편견(?)적인 사견을 살짝 말해본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우리 사회의 절대 빈곤계층, 혹은 취약계층으로 분류되고 주변으로부터 배척되어지기 쉬운 부류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미망인과 아이들 그리고 개. 이 세 부류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쉽게 비난받거나 버려지고 잊혀지거나 혹은 폭력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기 쉬운 계층이다. 남편이 죽은 후,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오겠다는 명분으로 집을 떠난 엄마. 찬이라는 11살 소년과 소년이 학교에 간 동안 혼자 집에 방치되어진 채 있어야만 하는 여동생 소이가 있다. 소이는 오빠가 훔쳐온 강아지와 놀며 돈 벌러 간 엄마와 학교에 간 오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소이는 '마음이'라 이름 지은 강아지와 늘 엄마놀이를 하며 지낸다. 돈 벌러 간 엄마를 기다리는 소이의 소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게 소이와 찬이 남매가 기다리는 엄마는 어른들에게 나쁜 여자다. 자식을 버리고 팔자 고치려고 떠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집을 떠난 후에 유일한 보호자였던 고모내외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떠나면서 찬이 앞에서 노골적으

로 엄마를 비난한다. 이 모습에서 우리의 정서는 여전히 여성이 재혼에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남편의 죽음으로 홀로 남은 여자는 그의 여성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가장 나쁜 팔자 고치려 자식 버리고 도망친 여자'로만 비난받아야 하는가. 달에 옥토끼가 방아를 찧으며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 목격된 지도 반세기 이상이 지난 21세기에도 여전히 칠순 고령의 남녀 중, 재혼에 대한 의사를 쉽사리 관철시킬 수 없는 쪽은 여성 쪽이 더 높게 나타나는 불평등한 윤리적 잣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이다.

 만약 아이가 둘이나 딸리거나 장애 아이를 자녀로 둔 여성의 재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우리 사회 속에서 높지 않다고 한다면 그는 과연 남매를 버리고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자식을 무책임하게 유기하고 떠난 행위가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또한 그렇게 떠난 여성을 비난할 윤리적 자격이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쉽게 또 자유롭게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고 심판할 자유 또한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고모내외가 떠나고 어린 동생 소이와 함께 남겨진 남매는 소년소녀가장으로 남게 된다. 남매는 그 어떤 공적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제는 그래도 흔해진 지자체사회복지공무원도, 무수히 지어지고 있는 각종 복지관의 사회복지사조차도 알지 못하는 이 남매의 모습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부실한 사회복지시스템의 한 단면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제주지역은 2004년 통계청자료에 의하면 전국에서 이혼율이 인천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높다고도 한다. 거기에 덧붙여 통계청자료에서 보면 소년소녀가장의 수는 2012년, 전국에 117명으로 2003년에 비하면 많은 숫자로 감소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방치되고 있고 그 문제들을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들을 국가시스템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 아이들의 안전과 생존에 대한 현실적인 보호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고모내외가 떠나고 남은 남매에게 이제 마음이는 더욱 더 절실한 가족의 일원으로 때로는 소이의 보호자로, 혹은 친구로 어른들로부터 상처받아 얼어붙은 남매의 가슴속에 유일한 존재가 되어간다. 그러나 소이가 얼음이 깨져 빠져 죽는 사고가 생긴 뒤에 찬이는 마음이 때문에 소이가 죽었다는 생각에 마음이에게 화풀이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무관심으로 방치해버린 채 어머니를 찾아 고모가 준 주소 하나만 들고 떠나버린다. 기차역까지 찬이를 쫒아갔던 마음이는 먼발치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달리는 기차 뒤를 따라 찬이의 뒤를 따라 찾아가는 고난의 여정이 시작된다. 기차를 타고 떠나버린 찬이를 쫒아 마음이는 기차선로를 따라 하염없이 걸어간다. 그동안 마음이는 버려진 유기견처럼 쓰레기를 뒤져 허기를 채우고 먹이를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접근하지만 느닷없이 발길질을 당하기도 하고, 빗자루를 들고 휘두르는 식당주인에 쫓겨 물 한 모금 못 먹고 도망을 치기도 한다. 이처럼 버려지거나 떠돌이 개에게 사람들은 야박하다.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빵 한 조각 나누지 않는 영화 속의 마음이는 사실 재미를 위한 설정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유기견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도가 점점 높아지고 동물권에 대한 법제정에도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만큼 '윤리적'접근에 대한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그만큼 식용동물이나 실험동물 이외에도 애완동물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요구되어지고 있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또 이런 사회 현상 속에서 유명 연예인들의 시민단체와 함께 유기동물 보호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들은 평소 예뻐만 하고 늙고 병들었다며 키우던 개나 고양이를 함부로 유기하는 이들에 대한 분위기환기와 공분도 한몫하고 있는 중이기는 하다.

 동물과 어린아이. 그리고 미망인 엄마가 이야기의 큰 줄기를 차지하는 영화 ‘마음이’는 전형적인 가족영화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보이는 의도적인 폭력 장면 등은 어린아이들과 함께 하기에 그리 썩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전동화 속 이야기전개방식처럼 단순한 선악구조의 틀에 맞춰진 줄거리는 신파적 요소로만 관객을 유도해 어린 남매의 안타까운 모습에 그저 눈물만 흘리고 말아야 하는 뒤끝이 개운하지 않은 답답한 느낌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것은 이야기의 구성을 단순히 이 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이 갖는 선악구조를 뛰어넘어 사회전반을 아울러야 하는 공적부조시스템의 모순과 부실에 대한 깊은 통찰과 그것을 밑바탕에 두고 대안을 우리 사회에 제시하고 환기시킬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완성도를 영화관객으로서 바란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너무 큰 욕심일까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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