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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이라는 이름에 질식하는 “인권”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지난 1년간 현 정권은 소위 4대악과의 전쟁을 벌였다. 4대악이란 ‘불량식품,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이며 여기에 보너스로 주취폭력이 추가됐다. 이것과 대조되는 역사적 사례를 꼽아보자면 영국 복지국가의 초석이 된 비버리지 보고서가 있다. 영국의 정치인 비버리지는 삶의 불안이 파시즘의 온상이 됐다는 점에서 복지국가를 구상하며 5대 거악을 언급했다. 그것이 비버리지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5대 거악이란 ‘결핍, 질병, 불결한 환경, 할 일 없음, 무지’였다. 오늘날 ‘빈곤, 건강, 생태, 노동, 교육에 대한 인권’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비버리지는 소위 좌파가 아닌 우파 정치인이었다.

 현 정권의 4대악과 비버리지의 5대악과의 싸움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즉 개인의 일탈과의 싸움이냐 구조적 악에 대한 싸움이냐이다. 안전을 치안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느냐 인간다운 생활보장의 차원에서 생각하느냐의 차이이다. 그래서 ‘안전담론’ 대 ‘인권담론’과의 싸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안전담론이란 한마디로 ‘자신을 타자로부터 분리하여 가능한 한 타자와의 교섭 그 자체를 회피하려는 태도’이다. 이때 표적이 되는 타자는 사회경제적 배경 등이 자신과 다른 사람이기 십상이다. 즉 노숙인 등 가난한 사람,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자, 탈학교 청소년 등이다. 특정인이나 집단을 곁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때 이유는 주로 ‘고정관념’으로 만들어진다. ‘더럽다, 질병 전파의 위험이 있다, 범죄를 잘 저지른다, 배회한다, 거짓말을 잘한다’ 등이 그것이며 사실증명과 관계없이 그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으로 굳어진다. 공권력과 선정적 언론은 고정관념을 이용하고 강화하면서 그들로부터 소위 선량한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위 선량한 시민을 위해 그들의 자유가 제약되고 박탈되는 것은 그들 탓이지 부정의한 사회구조 탓이 아니라고 본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은 정부들이 안전담론을 즐겨 이용하고 있다. 경제 불안과 사회복지의 후퇴 속에 잠재된 시민의 불만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부가 생활의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강력한 법질서정책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아동에 대한 성폭력범죄를 주로 활용해왔다. 범죄를 저지른 이를 ‘괴물’로 묘사하는 선정적인 범죄 이미지를 통해 타인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치솟는다. 이를 기화로 ‘강력한 응징’을 외치며 형벌 정책을 강화한다. 강성화된 형벌정책은 특정 범죄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에 대해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 적용된다. 구조적 불평등의 개선이나 사회복지에서 무능한 권력은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강력한 힘을 휘두르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이며 인권을 위협하는 것일까?

 첫째, 안전담론은 철저한 이분법으로 사람들 간의 관계를 파괴한다. 특정 사건 속엔 순수한 피해자와 악마 같은 가해자만 있는 게 아니다. 당국의 무책임함과 동료시민들의 방관과 무관심도 함께 있다. 원래부터 선과 악 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삶에서 많고 다양한 잠재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이건 우리 공통의 문제이지 특정 개인의 문제로만 몰 수 없는 문제이다. 왜 구조적으로 누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은가를 물어야 하며, 특정인을 특정 위치에 몰아넣는 조건을 바꾸는 노력이 요구된다. 가령 왜 아동이나 여성이 피해자가 되기 쉬운가라는 공통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때려잡자’는 대응으론 안된다는 것이다.

 인권존중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공통의 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관심에서 생긴다. 이 관심과 관계가 없다면 인권은 나만의 인권,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의 인권으로 축소되고, 나와는 관계없다고 치부되는 ‘그들’의 문제는 사라지게 된다.

 둘째, 안전담론은 소위 ‘정상적’인 사람들의 폭력을 안 보이는 문제로 만든다. 실상 아동성폭력을 비롯한 성폭력은 주로 피해자의 주변인, 소위 ‘정상적’인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데 이건 무시된다. 또 보통의 점잖은 사람에 의한 혐오범죄는 상대적으로 무시된다. 같은 범죄라 하더라도 가해자들이 너무 ‘정상적’인 사람들이면 옹호하려 하고 그럼으로써 진짜 만연된 문제는 비가시화된다. 안전담론은 색출과 강력처벌을 부르짖지만 실상은 진짜 문제를 가리고 놓아준다. 표적은 다른데 따로 있기 때문이다.

 셋째, 안전담론은 진짜 해결책을 회피하려 든다. 시민들에게는 많고 많은 사회문제들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지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런데 이건 너무 힘이 드니까 만만해 보이는 사회적 소수자에게 화살을 돌리고 개인적 혐오를 하는 것이 속편하고 쉬운 해결책이다. 가령 성폭력을 용이하게 하는 성차별사회를 문제 삼는 것은 힘이 들고 때론 자기의 입장에 따라 불편하기도 하다. 그보다는 ‘인면수심’의 ‘괴물’같은 누군가를 욕해버리고 마는 것이 쉬운 것이다.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의 대응이 아닌가?

 넷째, 안전담론은 적극적 인권 추구가 아니라 소극적인 수동성을 강요한다. 안전담론에서는 사고가 안 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다. 사고가 안 나려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사람도 되도록 만나지 말고 섞이지 말고 야외활동도 안하는 게 좋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려면 사람과 교섭하지 말고 CCTV를 잔뜩 달아놓는 게 좋다. 공통의 공간에서 벌어진 문제에 대해 사람과 대화하긴 보단 ‘CCTV부터 봅시다’라고 하는 상황에서 상상할 수 있는 인간관계란 건조하기만 하다. 그렇게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명목으로 모든 것을 통제 가능한 상태로 만든 공간에서 과연 우리는 인간다운 교섭을 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안전담론은 국가권력에 자유를 준다. 국가는 범죄자나 일탈행위자와 싸운다는 명목으로 치안 유지를 최우선의 문제로 취급하고 법의 지배를 초월한 권한을 치안 권력에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수록 국가권력은 자유로워지고 시민의 자유는 줄어드는데, 그것을 시민의 자유를 위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안전담론이다. 이렇게 역전된 자유를 통해 강화되는 것은 감시하고 단속하는 사회이다. 인권이 바라는 사회는 동료성 속에서 연대하는 사회이고 사회문제에 공공적으로 대응하는 사회이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낙인을 찍고 위험시하고 경계하다보면 동료성은 사라져버린다. 안전을 명목으로 시민의 각종 자유가 위축되면 적극적인 연대성은 발휘될 수가 없다.

 치안이라는 의미에서 안전담론이 대두되는 것과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란 의미에서 안전이 후퇴하는 것은 밀접한 현상이다. 우리의 불안과 공포의 원인에는 범죄만이 아니라 생존기반의 파괴도 있다. 실업이나 질병, 가난은 ‘살인으로 간주되지 않는 살인’이다.

 다시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개인의 일탈로 볼 것이냐 사회문제로 볼 것이냐. 사회문제를 인정한다고 해서 개인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사회의 책임을 찾아내고 인정할 때 개인의 책임도 떳떳하게 물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되는 개인은 넘쳐나는데 문제 사회는 비겁하게 숨어버린다. 원인도 해결방식도 개인으로만 귀결된다. 그럴수록 개인은 무력해질 뿐이다.

 인권은 무력함이 아니라 나의 인간성과 잠재성을 활짝 피우기 위한 것이다. 나의 삶은 사회문제란 것들에 연루되어 있고, 나는 그 연루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 속에서 공통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음으로써 나는 적극적으로 삶을 도모하는 인간이 된다. 내가 그럴 수 있는 힘은 타인이 나에게 주는 도움이나 사회보장을 통해 나올 수 있다. 또한 그 힘은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회보장을 강화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오기도 한다.

 어릴 적 동네 담장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깨진 병조각을 잔뜩 박아놓고 가시울타리를 친 담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호박꽃 넝쿨 속에 해바라기가 수줍게 고개 내민 담장이었다. 안전담론의 가시덤불을 두텁게 하는 것, 아니면 지금보다 더 튼튼한 사회보장의 다리를 놓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나와 모두의 인권에 좋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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