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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스토리 : 미국 캔사스대학(KU) 자립생활연구소(RTCIL) 연수기


미국 캔사스대학(KU)
자립생활연구소(RTCIL) 연수기
고관철(前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대표)


좌충우돌 장애인, 캔사스 초원에 둥지를 틀다.

 2012년 7월 24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하여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는데도 날짜는 그대로 24일, 시간은 오히려 6시간 뒤인 12시 정각, 시간의 흐름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인천공항에서부터 요구한 휠체어가 대기하고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번잡한 공항의 각종 통관절차를 장애인 및 직원전용 카운터를 통하여 재빠르게 빠져나오고, 짐을 찾고 로스엔젤리스(LA)공항으로 나왔다. 여기서 장애인해외여행의 중요한 팁 중에 하나, ‘무조건 휠체어를 요구하라’라는 것이다. 그러면 도착지에서 휠체어를 갖고 도우미가 기다리고 있다. 도우미가 알아서 장애인승강기로 이동하고, 전용카운터로 안내하면 거기에는 통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리고 그 신고절차도 도우미가 도와주면서 빠르게 통과할 수 있다. 짐이 많은 사람은 도우미가 한사람 더 붙어서 짐까지 날라다 준다. 단 그 사람들은 회사 소속이라고 볼 수는 없고 은퇴하거나 실직자들이 자원봉사로 한다고 하는데, 팁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한 사람당 5불정도만 주면 영어를 잘 못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통로를 유유히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엘에이 국제공항은 미국의 문화적 충격이 시작된 곳이다. 일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사람보다는 주로 건물과 상점, 물건들을 주로 보았다. 그래서 사진 찍기에 바빴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만나기를 약속한 지인이 늦어지는 바람에 2시간가량을 커다란 짐을 지키며 공항출구로비에서 기다리면서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다. 사람을 보면서 놀라는 것은, 그 얼마 안 되는 공간에서 무수한 사람이 오고가는데 그들의 피부색깔, 옷차림, 쓰는 말투 등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동양 사람이라서 한국인인가 하였는데 어느새 중국말, 일본말, 혹은 태국 말을 쓰고, 스페인어, 러시아어등도 여기저기서 들여온다. 열린 경험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LA자립생활센터에서
[ 사진1 - LA자립생활센터에서 ]

 그리고 지인을 만나서 오렌지카운티에서 1박을 하고 LA 다운타운에 있는 자립생활센터를 찾아갔다. 소장은 필리핀계 중증장애여성, 그리고 한국분이 스텝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이곳에 대한 소개를 자세히 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정말 대단한 여성 리더라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필리핀사람인데 미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오고 정착을 하면서 LA중심부에 자립생활센터를 개소한 것이다. 두 시간의 인터뷰를 끝내고 26일 하루를 더 보내고, 27일 미국 내선 항공기를 이용하여 최종 목적지인 캔사스로 이동하였다.


글렌박사님 댁에서
[ 사진2 - 글렌박사님 댁에서 ]

 캔사스 국제공항에서 마침 페루를 다녀오시던 지도교수 글랜화이트 박사를 만나서 그 분의 집으로 이동했다. 휠체어 장애인인데 직접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서 운전하는 자동차를 구입하여 몰고 다니신다. 집에 도착하니 마치 숙소처럼 나의 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부인과 자녀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다 안면이 있는 분들이고 특히 자녀들은 모두 한국에서 입양하여 지금은 결혼을 시켜 손자까지 본 분들이기에 더욱 더 가족처럼 느껴진다. 참 대단한 분들이다. 드디어 나의 캔사스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캔사스는 미국의 서부시대 같은 느낌이 나는 곳이다. 미국의 지리적으로 정 가운데 위치한 주로서 유럽에서 이주한 식민지정착민들이 서부로 확장해 나가는 길목의 평원인 것이다. 서부의 로키산맥까지 끝없는 대평원이 이어진 곳, 그래서 이곳에 나는 옥수수와 육류로 미국과 전 세계의 식량을 해결하는 곳, 전 미국의 대륙열차가 이어진 곳이 이곳이다. 그리고 서부이주민들과 더불어 흑인노예제도가 서부에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노예제도반대당의 근거지가 있었던 곳으로 여기에서 남북전쟁이 시발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만큼 찬성론자들도 드세었던 곳이었다.
내가 1년 동안 연수할 자립생활연구훈련센터(Research & Training Center on Independent Living 이하 RTCIL)가 있는 캔사스대학(KU)은 로렌스라는 곳으로 대도시인 캔사스시티와는 한 시간 이상 떨어진 대학 도시이다. 이 도시의 중심가는 높은 건물이 없고 거의 2층 건물이 주를 이루는데, 꼭 옥상에서 누군가가 총을 들고 나올 것 같은 그런 옛날 서부시대의 마을이 그대로 옮겨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그와 더불어 인종차별도 상당했던 곳이었다.

 이런 곳에 도착한 영어를 잘 못하는 동양의 장애인은 위축되는 것이 당연하리라. 하지만 이를 따뜻하게 맞아주며 방까지 내주었으니 1년 동안 의탁할 든든한 후원자를 만난 샘인 것이다. 이튿날 글랜박사의 안내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하는 ‘차고세일’에서 침대, 테이블, 전자레인지등 생활용품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미국인들이 다니는 교회를 따라나섰다. 미국식 이름도 지었다. ‘존’이라고, 하지만 잘 불리지는 않는다. 생전 처음 가보는 미국의 시골 옥수수 대평원 한가운데의 미국교회, 정말 글랜박사님의 가족을 제외하면 모두 백인인 미국인들이었다. 인사를 나누며 정말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들.. 참 고마웠다.
그리고 다음날, 드디어 아침부터 교수님이 여기저기 연락하며 허가서를 받아주시고, 대학 내에 학교등록처에 가서 등록까지 마쳤다. 근데, 은행계좌를 만들 때, 이 은행계좌는 학교 학생증과 연동이 되어서 처음 입력한 것을 바꿀 수가 없게 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은행계좌에서 바로 기숙사비나 학비 등을 직접 납부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즉 학생증 겸 현금카드를 겸하게 되있다.

학생증 겸 현금카드
[ 사진3 - 학생증 겸 현금카드 ]

 학생회관에 있는 은행직원에게 여권과 각종 허가증을 보여주고 내 영문이름이 ‘관(Kwan)철(Cheol), 고(Koh)’라고 알려주었더니, 가운데 영문글자를 이니셜만 집어넣었다. 그래서 ‘Kwan C Koh’로 입력하여 은행계좌를 만들어 준 것이다. 영어가 서툴고 미국인을 만나면 울렁증에다 어지럼증까지 더해지는 상태에서 얼른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옆 학생증 발급코너로 가서 학생증을 발급받았다. 학교등록절차를 마쳤는데, 나중에 결국 내 이름이 ‘관 C 고’가 되어있었다. 근데 이곳사람들은 중간이름은 거의 사용을 안 한다. 그래서 그 후 학교에서 공식적인 메일이 올 때마다 보는 것이, ‘안녕 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 이름은 ‘관’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곳에서는 동양이름으로는 아주 평범한 이름인가보다. 오자마자 40년 동안 간직했던 내 이름을 일순간에 반 토막 내버리는 현실이 냉혹하게만 느껴졌다.

중고로 구입한 물품들
[ 사진4 - 중고로 구입한 물품들 ]

 이렇든 저렇든 신분을 만들고 기숙사를 입주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 교수님이랑 다니면서 사 모은, 중고 가전제품으로 내부 세팅을 마쳤다. 침실 두 개와 장애인이 사워하기 편하도록 의자가 설치된 샤워 실이 딸린 화장실, 그러다보니 욕조가 없다. 거실과 주방. 주방에는 커다란 냉장고와 싱크대, 커다란 붙박이 4헤드 오븐, 오토워셔디쉬(전자동설것이기계)가 있다. 그리고 냉난방이 자동으로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28개의 아파트가운데 이렇게 된 곳이 한 두 군데 밖에 없단다. 다른 아파트들에는 다들 중고에어컨을 창문으로 자가 설치하고 겨울에는 전기난로를 켠다고 한다.

 기숙사는 대학원이상 거주신청이 가능한데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구조는 1인용에서 2인용 그리고 다인용까지 있다고 한다. 오래전에 군인이 주둔하던 막사를 개조해서 기숙사로 이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그래서인지 다른 곳들은 아주 낡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영문 장애 확인증을 병원에서 발급받아 발송하였기 때문인지, 미리 장소가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곳은 다인용이지만 장애를 고려한 공간으로 배치가 된 것이다. 바로 옆방은 이라크에서 온 학자가족이 쓰는데 5인 가족이 쓰고 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 살아본 집중에서 가장 집다운 집, 커다란 집에서 사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못 누려본 호사를 미국에서 누리고 있다. 이것을 행복이라고 해야 하나? 집이 크다보니 외로움도 두 배로 는다.
교수님과 첫 미팅을 가졌다. 매주 월요일 주례회의를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 꼭 참석하란다.

연구실
[ 사진5 - 연구실 ]

 나와 같은 시기에 ‘ADA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서 중국학생이 대학원 심리학과 박사과정으로 들어왔다. 척수마비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여학생이다. 나보다 훨씬 영어도 능숙하게 잘한다. 회의에서 글렌교수가 나는 국제방문학자의 자격이기 때문에 학생하고 신분이 다르다고 한다. 학생이 아니라 연구원이기 때문에 연구실을 하나 배정받았다. 창밖이 훤히 내어다 보이는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내 상식으로 이정도면 최상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연구소의 다른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제 슬슬 적응해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유학생들과 거주민들의 도움으로 핸드폰을 개통했다. 이제 어디서나 한국과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교수님과도 소통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개통하면서 나름 외국에 나오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나의 첫 스마트폰이기도 했기에 지금 막 나오기 시작한 ‘갤럭시3’로 매월 거금의 약정을 2년 동안 하는 조건으로 개통하였다. 하지만 이럴 수가 2개월도 안되어 똥값이 될 줄이야.. 어쩔 수 있으랴 이것도 운명인걸..

 그리고 벼르던 식료품 구입을 위해서, 버스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같이 연구소에 있게 된 중국여학생(이하 엘리스)이랑 월마트까지 버스타고 가서 물건을 사오기로 하였다. 정말 큰마음을 낸 것이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인터넷과 지도로 미리 조사를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방학기간에는 노선이 바뀐다는 것이다. 학기 중에는 학교의 주요도로를 뱅뱅 돌면서 로렌스시내와 각 지역을 연결하는 시내버스가 방학에는 학생들이 없다고 안 온단다. 이런.. 딱 한곳을 지나는데 그곳이 상당히 먼 곳에 있다. 그리고 그곳의 정거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휠체어와 목발의 탐험이 시작된 것이다. 슬슬 저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일종의 스릴감, 도전정신 같은 건가보다.

 30~40분을 헤맨 끝에 버스를 탔다. 저상버스다. 아니 모든 버스가 저상버스다. 저상버스다 못해 리프트버스가 또 따로 다닌다. 둘 다 로렌스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인데 KU학생은 학생증만 제시하면 공짜란다. 저상버스에다 공짜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동행하는 중국여학생이 좀 똘똘하다. 여러 번 확인하고 물어서 잘 찾아간다. 하지만 학교를 벗어나니 불안한 모양이다. 용기를 북돋우며 월마트 입성, 그리고 또 놀란 것은 월마트에 장애인이 장 볼 수 있는 전동스쿠터카트가 비치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내가 갈 줄 알고 마련한 것처럼 충천이 되어 있다. 한국에서 내가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이 마트이다. 왜냐면 카트를 밀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 이것이 생각의 차이인가? 욕구의 차이인가? 부러움과 경탄을 할 사이도 없이 하나를 꿰차고 커다란 월마트를 헤집고 다녔다. 필요한 식료품들을 구입하고 다시 엘리스를 만났다. 점심을 서브웨이라는 핫도그가게에서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커다란 두 끼니용 핫도그를 하나씩 들면서, 두 장애인의 임무수행을 자축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그런데, 당시 희한했던 것은, 우리가 버스를 탔을 때, 그 안에 있던 20여명의 사람들이 다 중국학생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올 때도 같이 갔던 중국학생들을 만나서 버스를 타고 왔다. 학교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아시안 들이 중국인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간혹 가다 한국어가 들리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대학에 어학원과 교환학생까지 통틀어 중국학생이 항시 천여 명 가까이 다닌다고 한다.

 한 학생이 한 학기 학비가 천만 원 정도가 되니, 학교재정에 막대한 부분이 중국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이 차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월마트 같은 대형마트가 로렌스라는 군단위의 지역에 두 곳이나 있다는 것도, 결국 중국학생들의 소피로 인하여 지역경제가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학교의 입장에서 장학금을 외국에 준다면 중국학생에게 줄 확률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어선생 티토
[ 사진6 - 영어선생 티토 ]

 그렇지만 단점도 있는 것 같다. 중국학생들이 많다보니 자신들끼리 모이는 시간이 많고 어디 놀러가서도 한두 명의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있으면 나머지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영어가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어가 되지 않는 연수생을 다시 외국인 학부생로 받아야 하는 사정이 학교문제로 크게 불거진 사례도 있다고 한다. 나는 아는 사람이 없다. 죽으나 사나 영어를 해야 한다. 그래서 티토라는 학부생을 개인교사로 소개받았다. 베트남계 미국인 2세이다. 당연히 영어가 모국어다. 그리고 학부전공은 한국어다. 한국노래가 좋아서 한국어를 지원했단다. 이번 겨울에 연세대학으로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자기나라보다 한국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친구다. 이 친구와 더불어 매주 3일 2시간 이상의 영어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친구가 활동보조도 해준다. 쇼핑을 할 때나, 우체국, 자동차운전면허증을 따러갈 때도 이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쇼핑할 때는 정말 이 친구의 도움 없이는 거의 불가능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버스쇼핑은 그 뒤, 혼자서 한 번 더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나서 관뒀다. 물건을 드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숙사에서 연구소까지 이동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더운 여름날, 아침 일찍 선선할 때, 걸어서 이동해보았다. 목발집고 30분 만에 도착했는데 땀이 비 오듯 한다. 다이어트가 목적이라면 이것도 괜찮지만, 어께에 상당한 무리를 준다. 그래서 매번 교수님이 출근길에 태워오고 태워다 주신다. 그러다가 힘드셨는지, 학교 내의 이동지원센터인 ‘제이리프트’라는 곳의 연락처를 알려주셨다. 근데 영어도 잘 안될 뿐만 아니라 시간도 안 맞춘다. 몇 번 약속시간에 도착을 안 한다. 그리고 5분을 기다리다 가버리기도 한다. 한국 같았으면 내 모국어실력으로 설득하고 협박하면서 30분을 싸웠을 것이다. 아~ 절망감이여..

보물 목록 1호-전동스쿠터
[ 사진7 - 보물 목록 1호-전동스쿠터 ]

 안되겠다 싶어서 교수님에게 이동의 문제를 말씀 드렸더니 여기저기 전화를 해본다. 드디어, 지역사회에서 접근을 지원하는 센터들과 연결이 되었다. 어느 날, 인근 도시에서 한쪽 눈에 해적안대 같은 검은색 사선안대를 끼고 온 사람이 봉고차에서 전동스쿠터를 꺼낸다. 내 꺼란다. 마음껏 이용하다가 갈 때, 반납하면 된다고 한다. 아, 서광이다.
 드디어 내 보물 목록 1호가 생긴 것이다. 전동 스쿠터가 공짜로 생긴 것이다. 이용료가 무료에다가 기숙사에서 전기세, 수도세 등을 별도로 안 받기 때문에 정말 완전 무료인 것이다. 관리만 잘하면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돈들 일이 전혀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운전면허증을 땄고 차를 샀으며, 보물목록의 순서가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이 내리기 전까지는 연구소와 기숙사를 오가는 가장 소중한 도구가 바로 나의 전동스쿠터인 것이다.
 이제 1개월 안에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미국 중부, 옥수수와 밀의 고장, 허허벌판에 석유시추기가 가동되는 곳, 끝없는 대평원의 한가운데 캔사스 로렌스에서의 나의 미국 적응기가 성공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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