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단 메뉴 바로가기
  2. 본문 바로가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야기 프리즘
HOME > Webzine 프리즘 > Webzine 프리즘
본문 시작

webzine 프리즘

프리즘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분기마다 발간하는 웹진입니다

지난호바로가기 이동


장애의 벽을 넘는 문화 유영희(수필가/전북여성장애인연대 대표)

 지난 7월 개최되었던 제12회 한국여성장애인대회의 주제는 ‘여성장애인 문화권’이었습니다. 정책토론회에 ‘지역여성장애인의 문화활성화방안’이라는 주제로 토론문을 준비하며 자료조사를 위해, 비장애인 친구들에게 장애인문화권에 대한 생각을 물었습니다. 전혀 짐작을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의외로 강한 부정을 만났습니다.
“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여성장애인의 문화가 전국대회에 정책토론까지 해가며 권리라고 보장을 요구할 필요가 있을까?” 장애인으로서 문화를 권리로 주장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밥을 먹는 자체에도 각 나라나 지역 그리고 가정마다 다른 식(食)문화가 존재함을 생각지 못하고 하는 말들입니다. 문화는 클래식이어야만 하고, 클래식은 고급문화라는 잘못된 생각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탄생한 순간부터 문화는 생성되었고, 삶의 질이 어떠하든, 장애 유무에 관계없이 문화는 삶 속에 존재하는 인권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문화란 뺄 수 없는 필수불가결의 요건인데도 장애인문화라는 단어 앞에서는 유독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문화향유는 소극적 향유와 적극적 향유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소극적 향유란 만들어진 드라마를 보고, 누군가가 쓴 책을 읽고, 다른 이의 연주를 듣는 등 주로 감상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적극적 향유는 내가 직접 대본을 쓰거나 연기를 하고, 내가 글을 써서 책을 내고, 내가 연주를 하는 등 창작 행위를 직접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많은 장애인들은 적극적 문화 창작 향유를 누리기보다는, 소극적 향유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나마도 편의시설의 부족과 경제적인 부담으로 인해 제대로 누리질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적극적 문화 창작 향유는 장애예술인들만이 누리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부정에 놓기도 합니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를 이용하여, 사진을 올리며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전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댓글을 달기도 합니다. 사실은 이 자체가 적극적 문화 창작 행위입니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뿐, 장애 ? 비장애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창작문화의 적극적 행위자입니다.

 저는 30년째 전신 류머티즘과 투병하며 12번의 인공관절대체 시술을 받았습니다. 20대 중반 느닷없이 찾아온 질병과 그 후유장애로 인하여 저는 삶의 모든 의욕을 상실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앞을 향해 나아가는데 저 혼자만 흐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고인 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미래에 대해 어떤 꿈도 꿀 수 없는 암울한 나날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살아야할 이유보다 죽음이 더 타당성 있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미로서, 형제나 자매로서 그리고 자식으로서도 저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잉여인간에 불과 했습니다. 두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어미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옳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긴 시간 이어지는 처절한 갈등과 고뇌의 늪에서 누가 저를 건져 줄 수 있었을까요? 오로지 죽어야만 끝나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글쓰기라는 작은 시도가 새 삶의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 지난 4월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올해의 장애인상을 받는 모습 >

 14년 전, 숨을 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가슴 가득 메운 한을 풀어내기 위해 웹상에서 조심스레 글쓰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질병과 장애로 주눅 든 삶, 그러기에 투정조차 쉽게 할 수 없었던 아픔과 눈물의 이야기였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웃음도 깃들여졌습니다. 혼자 쓰는 글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 모이고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업의 실패로 자살을 생각했다는 독자는 잡문에 불과한 제 글을 보고 다시 살 용기를 얻었다는 댓글을 남겼습니다. 남편의 지독한 폭력에 삶을 포기했던 한 여성은 서울에서 전주까지 저를 만나러 오기도 했습니다. 나 혼자만 외로운 게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로움에 치를 떨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누구나 고통 받고 아파하며 살고 있음도 깨달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위로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도 알았습니다. 장애를 가진 한 여자의 글이 이 역할을 하고 있음에 저는 살아야 할 이유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글쓰기의 과정에는 치유라는 놀라운 묘약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아무런 역할도 못하기에 자녀들에게 변변한 말 한마디 못하던 어미가 글을 통해 자녀들과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어미가 쓴 글을 통해 질병과 장애를 가진 엄마를 이해하고 뿌리 깊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어 갔습니다. 장애인 유영희가 부끄러운 엄마가 아닌 자랑스러운 엄마라고 아들 스스로 고백해 왔습니다.

 오랜 투병으로 세상을 향해 단절을 선언하다시피 한 제게, 글을 통해 삶을 나누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갔습니다. 글쓰기라는 문화의 적극적 창작향유를 시작함으로써 수필작가가 되어 상도 받고, TV 출연을 하고, 책도 내고 여성장애인단체의 대표도 되었습니다. 2013년 올해의 장애인상을 받은 것도 수필작가로서의 삶이 귀퉁이 하나를 차지하였습니다. 한 여성장애인이 시작한 적극적 문화 창작향유는, 자신의 변화는 물론 가정과 속한 사회에까지 변화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장애인에게 문화권은 사치가 아닌 생존입니다. 그런데도 국가는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수인 문화누릴 권리에 대해 아직까지 의무감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문화는 늘 복지개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탁구공처럼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쁘기만 합니다.

 우리 몸은 기관의 어느 부분이 문제가 생겨 그 역할을 못하면, 다른 감각기관이 발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장애라는 벽을 만난 우리 모두에게는 아직 발견치는 못했지만 비장애인보다 더 발달된 감각기관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발달되고 진화한 감각기관을 자극하여 적극적으로 문화창작 행위를 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그러기에 국가는 무든 부서들이 장애인의 문화권을 위해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고단한 삶일수록 문화의 적극적 향유는 필수입니다. 노예제도가 사라지기 전 미국의 흑인들은 노예생활의 고단함을 영가와 재즈로 견디었습니다. 장애인에게 적극적 문화창작향유는 넘지 못할 벽을 허무는 도구입니다. 자존감을 높이며 차별이 난무한 세상에서 자존심을 찾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여건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머뭇거리고 있다면 지금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시도하고 개발하면서 ‘나’를 회복시켜야 할 것입니다. 장애인의 문화! 그것은 세상으로 통하는 소통과 공감의 창(窓)입니다.

프린트하기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