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줄거리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시각장애청년(황유시앙)이 대학에 진학해 생활하면서 유쾌한 룸메이트와 동아리친구들,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 친구 치에와 서로의 상처에 공감하고 우정을 나누고 용기를 주며 함께 성장해가는 드라마이다.
그러나 내가 본 터치 오브 라이트(Touch of the Light)란 영화를 본 소감은 '사람들로 둘러싸인 고립은 과연 온전하게 장애인만의 몫이고 책임인가'라는 의문이다.
서기 2013년 8월 어느 날.
오늘도 한국의 장애인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에 대해 말하며 제도개선을 부르짖고 있다. 그리고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또 다르게 그 인간다운 삶에 1㎜라도 근접하기 위해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철저하게 클래스메이트들로부터 배제된 채 드러나는 주인공(황유시앙)의 고립은 우리의 과거형이기도 하지만 오늘 벌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모습이고, 또 미래에 벌어질 한 예시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 여학생 둘이, 가운데 앉은 황유시앙이 없는 것처럼 마주앉아 대화 중 >
유시앙이 첫 수업시간에 맞이하는 클래스메이트들의 반응은 존재하지만 존재로서 인정하지 않는 마치 거리의 가로등 같은 취급을 한다. 유시앙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앉은 여학생 둘이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은 나라를 막론하고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연습실로 동행하던 클래스메이트가 가버린 뒤에 홀로 버려진 황유시앙 >
이처럼 존재하는 그 자체를 부정당하며 지내던 유시앙은 연습실로 가는 도중에 친구로부터 버림을 받기에 이른다. 정말 지독한 이기심이 아닐 수 없다. 클래스메이트는 통로에 부착된 선형의 유도블럭을 보고 짜증을 내며 왜 혼자 연습실로 가겠다고 하지 않았는가를 유시앙에게 추궁하듯이 말하고는 알아서 오라며 버려두고 가버린 것이다.
"여긴 연습실이야.", "여긴 화장실이다.", "또 여긴 식당이야"라며 유도블럭이 주인공을 향해 말을 해서 알려줄까? 아마도 그런 모양이다. 그러지 않는 다음에야 어찌 알고 원하는 곳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척척 찾아갈 수 있을까?
이처럼 유시앙의 수업을 위해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에서부터 대회출전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클래스메이트들의 짜증 섞인 반응들은 순식간에 유시앙을 '고립'이란 수렁으로 매몰차게 몰아가는 지독한 폭력을 행사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시앙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립'으로의 상황에 부딪히면서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수하고 묵묵히 버티며 지낸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의 묵묵함에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의 우직한 묵묵함을 또 다른 한편으론 통렬하게 공감하기도 했다.
그것은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대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학교생활을 하는 내내 겪은 심적 고통은 클래스메이트에게 항상 도움을 받고 의지해야만 하는 미안함과 좌절감 그리고 알지 못할 미묘한 분노 같은 것들이 동시에 마음속에서 일어나기에 어찌할 방법이 없다. 늦은 나이에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나 역시 '노땅'이라 그런가, '장애인'이라 그런가, 반드시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고, 내가 뭘 물어도 답을 하고나면 자리를 슬금슬금 떠버리고 만다. 그러다 보니 나를 의식하지 않고 옆자리에 앉아 수업을 받게 된 중국학생과 절친하게 지내고, 장애인도우미견과 함께 학교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도우미견에 관심을 보이고 다가오는 학생들과 친하게 지낸 시간들이 더 많았다.
이처럼 장애인에 대한 부담감에 회피 혹은 무시하는 비장애인들의 행동을 직접 피부로 느끼게 되고, 마음으로 실감하게 되면서 '장애가 이 사회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접대성의 우는 애기 달래듯 하는 입에 발린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멘트뿐이란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시간일 뿐이었다.
그러나 움츠러들며 사람들과의 교류를 기피하던 나와는 다르게 유시앙은 그래도 지독하게 외로웠을 그 고독한 심경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다가와주는 몇몇 친구와 함께 하면서 음악적 재능으로 치환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지도교수로부터 지지를 받고, 능력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유시앙에게 함께 하는 동아리친구들과 치에의 존재는 '고립'이란 의도된 폭력으로부터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이며 세상의 빛과 만나는 길이였다.
그 길의 첫 발자국을 놓은 게 아시아청년음악대회다. 클래스메이트로부터의 협연배제와 어린 시절, 대회에 나갔다가 받은 충격으로 출전을 극도로 꺼리던 유시앙이 대회에 나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를 했을까 하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의 '고립'이 누군가에게 최초로 보여 졌을 연주회의 마지막 부분은 처절하기만 하다. 연주가 끝나갈 무렵에 보여 지는 영상은 그가 장애로 해서 겪는 어둠보다 주변으로부터 밀어내어지는 고통에 의한 어둠이 더 아플 수도 있음을 순간이나마 느끼게 한다. 눈으로 보는 이들만 알 수 있는 무대 위의 꺼져버린 조명. 그곳에서 유시앙은 묵묵히 연주한다. 연주가 끝나자 조명이 환하게 켜지는 무대. 담담하게 앉아 있는 유시앙. 당황하고 있는 동아리친구들과 멈칫, 하는 관객과 심사위원들. 그리고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
영화를 보는 내내 울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유시앙이라는 한 젊은이가 그저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일상의 아픔이 나의 일상적 고통과 동질감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는 이렇게 칙칙한 내용이 주테마는 아니다. 오히려 해피엔딩의 성장영화라고 하기에 더 적당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줄거리에 몰입되지 말고 영상에서 표현되고 있는 시각장애를 가진 청년의 모습 하나하나에 눈을 부릅뜨고 보시라 권한다. 그리고 그가 되어 그의 발걸음을 따라 가 보시라. 점자블럭만 있다면 눈을 감고도 원하는 장소는 어디든 갈 수 있는지, 유시앙은 늘 도움을 기다리기만 하는지, 장애인이라 성격이 어둡고 음침하고 괴팍한지, 세상을 향해서 이를 박박 갈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지를 말이다.
유시앙은 분명히 천재지만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어느 한 부분은 장애로 인한 고통을 버텨내며 재능을 단련시키면서 더욱 공고해졌을 뿐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황당한 천재가 아니다. 그는 삶에 치여 힘들어하는 치에와의 만남에서 삶의 방향성을 바꾸도록 하는 용기를 주었고,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통해 음악을 나누며 살아간다. 황유시앙, 그는 대문을 열고 거리에 서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청년이다. 단지 그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일 뿐이지 그의 장애가 특별히 그를 탁월하게 하거나 못나게 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가 그러하기를 원할 뿐이란 사실을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