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양이라는 이름의 족쇄,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하자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1961년부터 가난한 이를 ‘보호’하던 생활보호법이 그 자리를 기초생활보장제도에 내어 준지도 13년이 흘렀다. 인구학적 기준을 통해 근로능력이 없는 빈민만을 보호하던 생활보호법과 달리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최저생계비 미만으로 생활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최저생계비를 ‘보장’한다는 면에서 매우 뜻 깊은 법이었다. 이는 IMF이후 폭발하던 빈곤문제에 대한 사회적 반성이었고,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모두에게 보장하자는 연대의 약속이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가장 쉽게 설명하면 ‘최저생계비 미만의 소득자에게 최저생계비를 보충해주는 것’이다. 1인가구 최저생계비는 2013년 기준 57만원 가량이고 현금으로 지급될 수 있는 최대 액수는 46만원 가량이 된다. 나의 한달 소득이 57만원이 되지 않는 다면 수급권자가 될 수 있고, 46만원이 되지 않는다면 그 차액만큼을 현금으로 지급받을 수 있다고 본다면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제공하기도, 이용하기도 아주 쉬운 제도일 것이다.
아쉽게도 현실에서 이 뜻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부양의무자기준 및 기초법의 각종 악조항으로 인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이 많이 있다. 2013년 3월 말 기준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수는 139만명 가량이다. 우리 사회 빈곤층이 8백만 이상으로 추산되는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작은 규모다. 이런 거대한 사각지대가 만들어지는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부양의무자기준과 낮은 최저생계비 등을 들 수 있다. 비현실적인 최저생계비를 빈곤선으로 정해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의 범위를 축소하고,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제도 밖으로 사람들을 내쫓고 있는 것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중에서도 부양의무자기준은 가장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복지의 1차 책임을 지우고 있는 악조항이다. ‘부양의무자’는 1촌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를 대상으로 한다. 나를 중심으로 부모님과 자식, 그들과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배우자들은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에게 ‘부양의무’를 갖는다. 이들에게 일정정도 이상의 소득과 재산이 있을 시 실제 부양여부와 관계없이 나는 수급에서 탈락되기도 하고 수급비를 삭감당하기도 한다.
그 기준은 어느 정도일까?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가구단위를 기본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1인가구와 1인가구를 기준으로 설명해보자면, 나의 엄마가 수급을 받고 있고 내가 근로능력이 있는 딸이라고 할 때 내가 80만원 가량의 돈을 벌기 시작할 때부터 나의 ‘부양의무’는 시작한다. 이 때부터 나는 ‘부양능력 미약자’, 즉 부양능력이 미약하지만 있는 사람이 되고, 내 소득이 오를 때마다 오른 소득의 30%가 엄마의 수급비에서 깎인다. 90만원을 벌면 3만원, 100만원을 벌면 6만원, 엄마는 수급비를 삭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수급비가 깎이고 깎이다가 나의 소득이 150만원이 되면 엄마는 수급에서 탈락한다. 나의 부양능력이 충분함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만약 엄마가 장애인이거나 65세 이상 노인이라면 탈락까지 조금 더 시간을 준다. 이 때의 기준은 2백10만원. 210만원을 버는 청년이 되는 순간 나는 장애를 가진(혹은 노령의) 엄마를 온전히 부양할 수 있는 ‘부양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능력이 있다는 국가의 판정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때는 없을 것이다.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려는 이에게 어머니를 온전히 부양할 수 있는 능력으로 매기기엔 150만원은 지나치게 낮은 금액이다. 대부분의 부양의무자 가구는 비슷한 상황에 처해져 있다. 남윤인순 의원에 따르면 2012년 1월부터 7월까지 수급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부양의무자가구 평균소득은 약 233만원으로 평균가구소득 345만원을 크게 밑돌았다.
더 큰 문제는 부양능력이 있다고 국가가 판단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대부분은 부양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2005년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수급권 탈락 사유의 약 25%가 부양의무자 기준에 의한 것이었지만 절반 이상이 ‘부양의무자’로부터 사적이전소득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위 사례에서 나온 청년이 150만원의 임금을 받게 된다고 해서 혼자 사는 어머니를 안전하게 부양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가족에게 국가의 책임을 떠넘기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우리 아들이 나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고나면 동사무소 분들이 잘 (처리해)해주시 바랍니다” 2010년 가을, 장애를 가진 아들을 두고 떠나는 한 가난한 아버지의 유서였다. 교정시설에서 출소해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잇던 그는 아들에게 장애가 생긴 이후 치료를 위해 애썼지만 치료는커녕 높은 검사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결국 자신을 포기했다.
“시설에서 나오려고 하니 부양의무자기준에 걸렸습니다. 시설에서 평생 생활하며 보지도 못한 부모님이 시설에서 나오려고 하면 부양의무자가 된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장애인 시설에 보내져 평생 벽만 보고 살아야 했던 장애인의 자유와 자립에 대한 꿈은 그 꿈을 접으라 이야기하는 부모님에 의해 아주 합법적이고 제도적으로 가로 막히기도 한다. 자립생활을 준비하는 한 남성 장애인은 40세가 넘은 지금까지 ‘시설에 돌아가라’는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4년째 수급신청을 거절당하고 있다. ‘나는 아들을 부양할 것이다. 단, 시설에서 생활할 때만 부양할 것이다’ 라는 그의 아버지는 그의 명의로 자동차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가 추위를 피하고자 전기장판을 사용하다 화상을 입었을 때 십원 한 장, 병문안 한번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양의무자’다.
“보통 40살 50살 되면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지 어떤 부모가 자식을 부양합니까. 이제 일도 못하시는 저희 엄마아빠가 집 한 채 있다고 부양능력이 있다고 하면 엄마아빠는 평생 저를 돌봐야 합니까? 집 팔아서 저를 부양해야 합니까?”
부양의무자에게는 은퇴도 없다. 부산의 40대 장애인 부부는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인해 수급비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나이가 40이 넘었고 결혼도 해서 따로 살고 있는 나의 부모님이 진짜 나를 부양해야 하냐고 물었다.
부양의무자기준의 비 현실성도 문제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부양의무자기준 그 자체다. 어떤 이들은 부양의무자기준이 없어지면 부정수급자가 너무 많이 늘어나지 않겠냐고 말 하지만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인해 삶의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사례 사례가 일률적인 기준을 정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행 부양의무자기준은 실제 이들이 부양의무를 다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의무가 있는 부양의무자를 당신이 가졌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수급권을 빼앗습니다(삭감합니다).’ 라고 전달할 뿐이다. 부양받은 사실이 없다고 애원해도 ‘법이 원래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오거나 통화기록과 같은 것들을 요구하며 수급비의 댓가로 수치심을 치르게 한다.
이사를 할 때마다 집 나간 어머니와의 관계단절을 입증하기 위해 경찰서에 가서 ‘가출신고 확인서’를 받아야 했다는 스무살의 수급가정 청년이 있었다. 그의 스물 넷 오빠는 부양의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전화통화도 하지 않았고 얼굴을 보러 가끔 늦은 밤에만 집에 방문했다. 이웃의 눈에 띌까봐 그마저도 새벽녘 뛰어나갔다. 무엇보다 부양의무자기준은 수급권자에게는 끊임없이 나의 삶을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수치심과 모욕을 안겨주고, 부양의무자에게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좌절감과 비관을 안겨준다.
이런 부양의무자기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부양의무자가 없는 홀홀 단신이 되거나 나의 부양의무자는 나를 부양할 수 없음을 인정받는 것, 부양의무자기준이 없어지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가능성도 희박해보이고 끔찍하게 들리지만 많은 이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 실제 가족이 없지 않고서야 수급받기 힘들다는게 많은 수급자들의 목소리다. 문제는 이렇게 사회적 소리가 약한 이들은 가난에서 탈출하기도 참 어렵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참 어려운 방법이다. 이 입장을 위해 참아야 하는 수모도 다양하다. 끝나지도 않는다. 당신은 나의 가족관계를 타인 앞에서 낱낱이 밝히기를 강요당한 적이 있는가? 없다면 당신은 아직 수급신청을 해보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왜 우리 아들이 나를 미워하며 부양을 거부하고 있는지 두 번, 세 번, 네 번 밝혀야 하는 것이 바로 부양의무자 기준이다.
세 번째 방법은 이미 많은 이들의 요구다. 서울 광화문역 지하에는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위한 노숙농성이 1년 넘게 진행되고 있다.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인해 삶이 고달픈 장애인, 빈민들이 함께 농성을 하고 있다.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과 사회단체, 노동단체들이 농성장으로 모이고 있다. 부양의무제 폐지를 지지하는 정치인들도 이 곳을 찾고 있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통해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얼마 전 수급권자 대회에서 수급을 받고 있는 한 한부모 여성가장은 20살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수급비 삭감통보를 받았다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무리 벌어도 벌어도 가난할 아이입니다. 아무리 일을 하고 일을 해도 잘 살기 힘든 아이입니다. 제발 우리아이에게 엄마와 동생들을 부양하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가난한 가족들에게 부양의무를 지라는 나라는 나라도 아닙니다.”
이 나라와 제도는 가난한 사람에게만 참 독하다. 유산상속을 포기하면 빚도 물려받지 않는다던데 부모가, 혹은 자식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양의무자는 가족과 나라에게 빚쟁이가 되어야 한다.
현실에 맞추어 부양의무자기준을 완화해야지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있다. 하지만 지난 13년간 부양의무자기준이 지속적으로 축소되었지만 수급자 숫자가 대폭 늘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적극적인 예산확대와 수급자 수 증대에 대한 계획없이 약간의 수정만 반복한다면 제도는 끝없이 복잡해지고 사각지대는 넓어질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도 가난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한다는 약속이었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로부터 그 약속을 다시 바로 세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