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흔히 최저임금은 최소한의 노동자 생활보장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고용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이 임금협상에서 더는 밀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제도라고 말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중소영세사업장이 밀집해 있는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임금협상은 꿈도 꾸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최저임금에 급여가 정확히 맞춰져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에 맞춰 주 40시간 일할 경우 받게 되는 월급 101만원(2013년 기준)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공단 노동자들은 필요한 한 달 생활비를 시간 당 최저임금으로 나눠서 나온 시간만큼 노동한다. 한 달 살아내는 데 200만 원이 필요하면 잔업, 주말 특근까지 닥치는 대로 하면서 하루에 12시간 이상 씩 일하게 된다. 이들에게 최저임금이 과연 생활보장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일까? 오히려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 근거가 된다. 회사에서는 최저임금법에 따라서 임금을 ‘정당하게’ 지급하고 있으므로.
#2
많은 이들이 최저임금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게 상식적인 사고다. 그러니까 기업별 임금협상 이런 게 아니라, 정부에서 나서서 정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게 아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208만 명에(2013년 3월 기준) 이른다. 물론 여기에는 최저임금법을 어기는 사업주에게 고용된 노동자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법에서는 분명하게 적용제외 노동자들을 열거하고 있다. 먼저 근로능력이 낮다는 이유로 장애인을 적용제외 대상으로 들고 있다. 또한 경비, 건물 관리인과 같은 감시?단속적 노동자, 수습 노동자, 가사 노동자를 제외 대상으로 열거하고 있다.
최저임금은 누구나 무슨 일을 하든지 이 정도 이상의 임금은 무조건 받아야 생활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아니다. ‘정상적’인 노동형태에 대한 기준으로 최저임금을 설정해놓고, 이에 ‘미달’하는 노동에 대해서 최저임금 미만으로 임금을 지급해도 된다는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결국 경비 일을 하는 노인, 수습노동자가 되는 청년, 가사노동자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여성, 장애인들은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합법적인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일정 시간 동안 노동력 사용에 대한 권리를 자본가에게 판매한다. 즉 노동시간(근무시간) 동안 자유를 박탈당하는 조건으로 임금을 지급받는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하루 24시간 중 일정시간을 판매한 대가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설령 그리 힘들지 않은 일이라도 고용된 시간에 다른 일을 동시에 할 수도 없고 하루에 20시간 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최저임금은 모든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기는커녕 노동에 대한 차별적 평가에 기초해 최저임금 미만으로 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3
해마다 6월이면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자리한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이듬해 노동자가 받을 최저임금을 결정해 발표한다. 사용자위원, 근로자위원, 공익위원 각각 9명씩 총 27명의 위원들이 줄다리기 ‘협상’에 들어가고, 사용자위원과 근로자위원이 팽팽하게 대립하면 공익위원들이 중재안을 제시하는 모양새가 매년 연출되었다. 그렇게 최저임금은 사회적 논의를 거쳐 결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저임금위원회가 매년 파행을 거듭하지만,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이 협상을 하니 어쩔 수 없고, 각기 나름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와서 조율 끝에 시행 가능한 최저임금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저임금위원회가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과정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최저임금을 정말 가장 적게 주어도 되는 임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금세 드러난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에서도 자본가들을 대표해서 나온 사용자위원들은 최저임금을 올리면 경영압박이 심해져 영세자영업자들이 존폐기로에 몰리고 기업들은 고용을 줄이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미 최저임금도 못 받는 노동자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인상논의가 무의미하다는 ‘현실론’까지 곁들여주셨다. 올해 떠들썩했던 자영업자들의 목소리는 프랜차이즈 본사의 불공정 거래가 주원인이었다. 시간 당 4860원을 지불했던 알바 최저임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영세자영업자들은 경영압박에 고용을 최대한 줄이고 있다. 사장까지 하루 종일 일하면서 말이다. 결국 사용자위원들은 최저임금위원회가 나서지만 않으면, 이미 시장에서는 자기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니, 최저임금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최저임금 밑으로도 일할 사람 많다는 거다. 노동계를 대표해서 나왔다는 근로자위원은 어떤가. 최저임금 인상 근거로 내세우는 게 OECD 국가 중 최저임금 순위, 중위임금(비율상 가장 많은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액)의 50%이다. 한국에서 노동하는 사람이 인간답게 살 만한 임금을 이야기하는데, OECD 국가 순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말 습관적으로 내세우는 근거다. 그리고 중위임금의 절반 정도가 최저임금액이 되어야 한다는 근거는 뭘까? 말 그대로 전체 노동자들을 임금액대로 줄 세워보았을 때, 최저임금이니까 중간 임금액의 절반이 되어야 임금격차 비율이 맞다는 논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 같지도 않은 회의를 하다가, 항상 전년도 최저임금 대비 인상율로 결정한다. 작년에는 6.1% 올랐으니 이걸 기준으로 올해 얼마를 올릴 지만 궁리하는 거다. 그래서 결정된 2014년 최저임금은 작년 대비 7.2% 오른 시급 5210원이다.
최저임금이 인권과 만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과 인권은 아무 관계도 없다. 노동자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임금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대체 어떤 노동자가 2014년에 시급 5210원을 받으면 생활할 수 있다고 말했는가? 그냥 그게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최저이자, 최고임금이라고 하니 군말 없이 받을 뿐이다. 현재 고시되는 최저임금에는 권리 주체의 목소리가 없다. 27명의 위원들이 모여서 말도 안되는 근거들을 들이대면서, 주판알을 튕기고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 소득재분배효과를 고려하겠다는 정책놀이를 하고 있다.
노동력을 판매해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는 동안 스스로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노예처럼 판매된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그 대가로 얻는 게 임금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은 노동자들이 행한 구체적인 노동의 대가가 얼마여야 하는지에 국한될 수 없다. 이미 삶의 일정 부분을 뚝 떼어내어 거래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임금은 인간에 대한 등급에 기초하고 있다. 근로자위원들이 주장하듯이 임금액에 따라 줄 세워진 인간등급들이 있고 끝에 최저임금이 있다. 그리고 장애인, 노인, 여성, 청년은 그 밖에 있다. 물론 장애인등급제처럼 사람 그 자체에 대한 등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언제나 ‘당신이 하는 일은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는 말로 사람들을 홀리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이 인권과 만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을 적용받는 노동자 500만 명의 목소리와 행동이 필요하다. 최저임금은 최소한의 임금이 아니라, 내가 일했으면 그게 무슨 일이든 이 정도는 받아야 (생존이 아닌) 생활한다는 사회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역사상 모든 인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14년에 주 40시간 일하면 108만원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최저임금에 대해서, ‘내가 이 정도 일했으면, 친구들과 여유롭게 술 한 잔 기울이고, 아이들 학원비 걱정 안하면서 생활하고 싶다’, ‘너희들이 주 40시간 일하면서 108만 원으로 살아봐라. 살려면 결국 더 일할 수밖에 없다.'와 같은 여러 목소리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이 조직되어 회사를 압박하고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저임금은 마치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적선을 베풀듯이 특별히 더 올려준 임금이 되고, 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는 면죄부 역할밖에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