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비와 바다'는 참 솔직하다. 지루하게 이어가는 8년이란 연애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귀여운 바퀴벌레 한 쌍이다. 이렇게 길게 연애를 하기가 참 어려울 텐데 영화 속 연인들은 알콩달콩 참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이 예쁘기만 하다.
영화 속 연인들의 모습은 여느 연인과 다르지 않다.
남자는 지극히 남존여비의 사상에 물씬 젖어있는 우리 주변의 보통남자.
여자 또한 그 사상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진 우리 주변의 보통여자.
그들의 세상 살기, 또는 결혼을 향한 길조차 여느 연인과 별다르지 않다. 굳이 다르다고 한다면 세상의 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육체적 장애를 스스로 깨닫고 있어서 섣불리 세상과 다가갈 수 없는 벽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정도.
찾아올 연인을 위해 샌드위치를 만드는 재년의 분주한 모습은 그들의 사랑에 누구도 끼어들 틈이 없음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장을 보고, 감자를 깎고, 당근을 다지는 그 모습은 그저 곱고 예쁜 사랑일 뿐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들에게 더 필요로 할까. 단지 지켜봐주는 것 외에 말이다.
사랑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두 사람의 애틋함이 묻어나는 이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내 주변에도 이런 닭살커플이 있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면 보는 사람들은 답답하고 지겨운데 정작 본인들은 느긋하게 삶을 즐기는 듯 보여 새삼 연인들에 대한 내 고정관념에 조금은 금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참 그 많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제각각이라 이런 평범함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측은하게, 또 신기함을 가득 담은 시선을 아낌없이 주는 이들이 있고 우리는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연예인처럼 그 시선을 즐기면서 부담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쿨함이 있어야겠지만 그것이 그렇게 나불나불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대범해지자 생각하다가도 울컥, 올라오는 그런 심보 때문에 말이다. 이 시점에서 부처가 돼야 하느니라. 속으론 심호흡을 하지만 말이 쉽지 원.......
이렇게 쉽지 않은 시선과 관심을 온몸으로 느끼며 데이트를 즐기는 두 사람은 그래서 더욱 눈에 들어온다. 누구도 볼 수 있지만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열심히 데이트하는 연인. 그들의 모습은 마냥 부럽고 멋진 커플.
그런 그들 각자에게도 집으로 돌아가면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은 또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밥 한 끼 먹는데도 온 노력과 힘을 기울여야 하는 우영의 고통이 있다. 늘 도움을 주는 어머니의 부재가 만든 고통이 그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심각한 공포심과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게 한다. 인간은 외로운 동물이라고 우스개처럼 말하지만 장애인에게 혼자 남겨지는 고립은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공포다.
영화에서 우영은 외출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빈 집에 혼자 누워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뇌까린다.
"알긴 아냐?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참아야만 하는 이 고통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이 절박한 고통은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서러움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실수를 참 많이 했다. 자리에서 앉고 일어서는 걸 못하니 화장실도 갈 수가 없는데 화장실은 급해 죽겠고, 사람은 없고, 결국 실수를 하고 만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그냥 땅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 차게 되는 경험이 장애인에겐 한 두 번씩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집에서조차 될 수 있으면 적게 먹고, 물도 목을 축일정도만 마시는 행위로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그런 행동은 외출을 하거나 집에 손님이 방문하게 되면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런 생활습관이 결국 배변과 관련한 만성적인 질병으로 발전해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하나 둘 증상이 심해져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란 웃지 못 할 별명이 붙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건강의 위협뿐만 아니라 안전, 생명에도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는 장애인의 고립은 결국 지난겨울에 혼자 지내던 한 여성장애인이 화재로 질식사를, 장애인동생과 동생을 돌보던 누나가 집에서 화재로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사회가 장애인의 생활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주기도 했지만 이런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사전방지가 가능했음에도 소중한 생명의 불이 꺼져버린 뒤에 사후약방문격의 제도적 개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런 문제의 해결점이 결혼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도 우영은 어머니의 부재로부터 더욱 누군가와 함께 해야겠다는 의식이 확고해지기는 했지만 그것이 곧 어머니의 자리를 메우기 위한 자리로서 재년을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여성에게 있어 결혼은 두려움이다. 새로운 구성원 안으로 혼자 들어가 지금까지 해오던 그 모든 것들은 백지처럼 포맷시키고 새로운 규칙과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운명적인 존재로서 아직까지는 살아야만 하는 우리네 관습들 때문에 말이다. 그의 두려움은 프러포즈를 받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상적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재년에게만은 세상에서 가장 결정하기 힘든 고민이다. 게다가 재년 스스로 말하듯이 "정상이 아닌" 우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어쩔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년은 우영과의 결혼에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식은 세상 그 어떤 웨딩마치보다 성스럽고 아름답다. 턱시도를 입은 우영과 하얀 드레스를 입은 재년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기로 유명한 영국왕실의 신랑신부보다 훨씬 기품 있고 아름답다. 그것은 그들의 결혼이 스스로를 포기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영의 끊임없는 프러포즈에 끝없이 고뇌하고 아파야만 했던 재년이 오랜 고뇌 끝에 선택한 결과물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인 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으로서, 또 장애인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세상'이라는 혹은 '결혼'이라는 '바다'는 그 단어 그대로 망망대해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히 열 몇 살 사춘기의 소년소녀가 꿈꾸고 소망하는 아름다운 두근거림과 설레는 그리움이 아닌 절박한 현실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장애인으로서 결혼이란 것은 결코 녹록치 않은 그 어떤 난관과 벽들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김기림의 시에 나오는 나비처럼 세상의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 돌아온다고 해도 재년과 우영은 이겨낼 것 같은 믿음이 다가온다. 그것은 그들의 고뇌하는 심장이 너무도 건강하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의 삶이 거친 물결이 일지 않는 청무우 밭만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을 땐 고통도 따르고 그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자기희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힘들 때 잠시 날개 접고 앉아 서로를 다독이며 손 꼭 잡고 호흡 가다듬고 해풍에 마른 날개로 청무우 밭을 향해 날 수 있는 격려를 서로에게 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이 땅에 더 많은 우영재년커플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우리 장애인은 때맞춰 기저귀 갈아주고 때맞춰 밥 먹여주고 때맞춰 불 끄고 재워 줘도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욕구다. 우리 몸에서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볕을 쫴야만 생성되는 비타민 D 같은 존재.
그것은 곧 사랑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 맞대고 사는 세상.
우리는 단지 그것을 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