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부터 시작된 자스민 혁명이 그 도화선이 되어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시민혁명의 불길로 뒤덮은 ‘아랍의 봄’.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의심 미국 소고기 수입 논란으로 촉발된 촛불정국, 2010년 지방선거,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의 과정과 결과. 앞서 기술된 현상에 대한 분석에는 빠지지 않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바로 스마트기기 사용자 증가와 SNS(사회관계망)의 탄생이 민주주의의 진화 혹은 변화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양 현상을 목도한 사람들의 지배적인 진단과 전망을 ‘드디어 스마트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 이라는 시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듯 기술발전이 민주주의에 가져오는 ‘긍정적 함의’에 대한 분석과 전망은 사실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앨빈 토플러를 위시한 미래학자들과 네그로폰테 등의 디지털 사회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기술발전이 민주주의 사회를 재구축하고 인류가 경험해 왔던 어떤 사회보다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쳐왔다. 컴퓨터, 인터넷, 현재의 각종 스마트 플랫폼들, 즉 기술발전이 개인과 시민에게 권능을 부여할 것이라 예측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원인이 시민들의 정치참여 기반이 빈약하기 때문으로 판단했기에 기술의 발전이 곧 시민참여 확장의 플랫폼이 될 것이라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스마트한 세상’이 도래했다는 낙관론에 대한 날선 비판 역시 만만치 않다. 정보기술의 발전이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가려주는 여과막으로 작용 할 수 있으며, 정치과정의 조작화 혹은 통제와 억압의 수단, 민주주의 운영에서 시민과 대중을 순응적 인간으로 머무르게 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견 등이 그러한 입장이다.
광장 대(對)광장 - Context(맥락)를 읽는 시각낙관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자들과 같이, 필자 역시 최근의 사례들에 대한 낙관적 시각이 Context(맥락)전체를 이해한 분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 지금의 광장과 과거의 광장을 비교하는 시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여기서의 광장은 대규모의 시민들이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모여 정치적 의사표현과 행위를 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중동-북아프리카 17개국의 혁명인 ‘아랍의 봄’과 2008년 촛불 정국 등은 21세기의 광장이다. 20세기의 광장은 국외에선 68혁명과 천안문, 국내에선 4. 19 혁명과 1987년의 6월 항쟁 등이 대표적이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프랑스 혁명 정도가 과거의 광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광장들 간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권위적이고 폐쇄적이며 정치과정이 투명하지 않은 정부(지배세력)의 실정 혹은 장기집권에 대한 분노로 인해 촉발된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기술의 진보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라는 이 공통점이 광장을 만들고 사회변화를 일으킨 동인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즉, ‘기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혹은 ‘기술이 결정적 동인이 되었다’는 관점은 현상의 맥락 전체를 이해한 시각으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랍의 봄의 도화선이 된 자스민 혁명에서 튀지니 인구의 5분의 1정도인 200만 명만이 페이스북 가입자였다.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와 경제위기, 독재정부가 혁명의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혁명이 촉발될 이유가 충분한 시기에 마침 이용 가능한 플랫폼이 있었을 뿐이다. 또한 이집트 민주화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한 ‘4월 6일 청년행동’을 만든 아흐메드 마헤르 이브라힘 엘탄타위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는 하나의 수단이자 도구일 뿐” 이라는 말을 남겼다. 시민들의 직접적이고 조직화된 주체적 활동이 일으키는 거대한 물결을 기술발전이라는 분석틀 안에 가둬놓을 수는 없으며 그러한 시각은 기술에 대한 과대평가이다. 왜냐하면 68혁명, 4. 19혁명, 6월 항쟁 등은 스마트한 플랫폼 없이도 사회변혁을 이끌어 낸 역사적 광장이었기 때문이다. 발로 뛰며, 구전(口傳)하며, 대자보와 유인물을 전파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민주적 성과를 이끌어 내었다. 그러므로 아랍의 봄과 촛불정국, 2010년 지방선거라는 현상 속에서 기술발전이 수행한 역할에 대한 평가는 ‘촉매제’ 정도로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편리해지는 인터넷, 개인화 되어가는 대중물론 기술발전이 가져온 인터넷과 스마트 플랫폼의 비약적 성장은 대중 간 소통을 강화하고 정보의 비대칭성을 감소시킨 측면이 있다. 또한 광장 같은 큰 물결이 되지 않더라도 공론장으로써의 기능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대중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술발전 시대의 대중은 개인화, 원자화 되어 있으며 스마트 플랫폼 속의 대중 역시 이러한 모습을 닮아간다. 여기서 개인화 되어가는 대중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가 무엇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대중의 힘은 공통의 문제를 인식하고 하나의 움직임(정치적 행위)을 보여줄 때 위력을 발휘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대중의 개인화는 민주주의의 위협요소가 될 수 있다. 세계적인 정치 캠페인 조직인 Move On의 상임이사인 Eli Pariser는 페이스북과 구글 등의 SNS, 허브사이트 들이 인터넷에서 대중을 개인화 하는 방식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뉴스 기사나 쇼핑몰 등의 사이트만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보가 페이스북과 트윗에 전송 된다고 밝힌 것이다. 이러한 브라우징 데이터 수집은 개인의 선호를 분석하고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목이지만, 인터넷 상에서의 새로운 발견이나 정치, 사회, 경제,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과막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치적인 의제, 삶의 양식 등 모든 것이 다원화 되어가는 시대에서 스마트 플랫폼이 가속화 시킬지도 모르는 대중의 개인화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 우려되는 요소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목격하기가 점점 힘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점은 여기에만 있지 않다. 인터넷 혁명, 스마트 플랫폼 탄생 이전에 매스미디어 시대가 도래하였을 때, 권력의 대응은 매스미디어를 포섭, 통제하는 것이었다. 스마트 플랫폼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랍의 봄’이 시작되었을 때, 이집트의 무라바크 정권은 인터넷 접속을 차단했고, 튀니지 정부는 활동가들에게 피싱공격을 해 계정의 암호를 빼내고 변경해 SNS사용을 봉쇄하려 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정부의 기술적 통제를 넘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기술은 주체가 아니라 수단으로 봐야 할 것이다.
권력은 위와 같은 직접적인 대응 외에도 우회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명박 정권이 사이버 세계의 활발한 소통과 공론화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빼어든 칼은 국가기관의 고소(미네르바 사건 등)와 인터넷 실명제 추진이었다. 이러한 수단은 지금은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위축효과를 불러왔었다.
디지털 시대 신인류 호모 나랜스, 호모 폴리티쿠스가 될 것인가 호모 사케르가 될 것인가2008년 촛불정국을 마지막으로 대중의 정치적 영향력은 꾸준히 감소해왔다. 그 이후 거대한 대중의 정치적 물결, 즉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정치적 에너지를 목격한 적이 있는가. 필자의 기억에는 그러한 현상이 없다. 활용하기에 따라 더 좋은 정치적 과정과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은 갖추어져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늘도 정치적 성향을 뚜렷하게 보이는 대형커뮤니티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정치사회적 정보의 교환, 전파, 이에 대한 공론장으로. 하지만 이러한 활동들이 정치과정에서의 참여와 영향력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정치지식의 습득과 정치정향을 규정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호모 나랜스는 디지털 공간에서 글 · 사진 · 동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생산하고, 공유하고, 전파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호모 폴리티쿠스는 정치를 통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호모 사케르는 고대 로마에서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 형벌을 받은 죄인들을 가리키던 용어이다. 시민으로서의 법적인 권리를 모두 잃은 자들을 지칭한다(여기서는 정치적 힘을 모두 잃어버린 대중으로 그 뜻을 달리하도록 한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호모 나랜스에 머물고 있다. 기술의 발전, 스마트 플랫폼이 정치과정에 선한 영향을 일정 정도 미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민주주의의 재구성, 진일보를 가져오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세계에서의 실제적, 적극적 정치적 참여가 변화를 가져오는 더 빠르고 확실한 동력이 될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토크빌이 목격한 미국 지역공동체에서 이뤄진 정치적 실험(로터리 클럽, 4-H)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것처럼 말이다. 온라인 청원이나 댓글 달기, 글의 공유 정도로는 현실 정치의 과정을 변화 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스마트한 시대는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양날의 검과 같다. 호모 나랜스를 강력한 호모 폴리티쿠스, 강력한 공적 대중으로 바꿔줄 수 있는 기반을 제공 할 수도 있지만, 그 기술에의 종속은 호모 나랜스를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호모 사케르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결국 기술발전이 가져오게 될 정치적 결과는 그것을 활용하는 인간, 협의의 표현으로는 정치적 행위자에게 달려 있다. 이전의 선거운동을 모두 ‘석기시대의 것’ 으로 규정하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던 미국 민주당 오바마 캠프의 마이크로 타겟팅 전략도 기술기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풀뿌리 지역조직을 결합시켜 시민(유권자)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이끌어 냈기에 강력한 힘을 발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중이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스마트 플랫폼에서의 소극적 참여가 아닌 현실에서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