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의 역사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1981년에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제정됨에 따라 1982년 장애등록제도가 시범적으로 실시되었고, 1988년 11월부터는 전국적으로 장애인등록제도가 시행되고, 1989년 ‘장애인복지법’ 전면개정을 통해 일본의 방식과 같은 오늘날의 장애등급제가 만들어졌다. 최초에는 5가지 유형에서 두차례의 개정을 통해 현재는 15가지 장애유형으로 확대되었고, 장애의 정도에 따라 1급부터 6급까지의 장애등급으로 분류되고 있다.
장애인복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으로 등록을 해야하며, 장애인 등록은 의학적 기준에 따라 15가지 장애유형에 1급부터 6급까지의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장애유형과 등급을 나누어 등록을 하고 있는 장애등급제는 한국과 일본에만 고유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부는 제한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중증장애인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장애등급제는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장애인을 신체기능에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중증장애인이 더 많은 서비스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이다.
장애등급제의 본질과 문제점은 2010년에 여실히 드러났다.
2007년부터 시행된 장애인활동보조사업이 장애인활동지원제도로 전환되는 상황과 2010년부터 시행 예정이던 장애인연금제도 등, 장애인복지제도의 확대와 변화에 따라 정부는 복지제도 신청자들에게 장애등급 재판정을 강요하였고, 이 과정에서 장애등급이 하락되어 활동지원제도가 중단되는 등의 심각한 피해자가 속출하였다.
장애인의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가짜장애인’을 색출하겠다며 장애등급심사를 오히려 더욱 확대하겠다며 장애인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고, 결국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는 국민연금공단 장애등급심사센터를 점거하고 농성투쟁을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농성투쟁의 결과,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 는 보건복지부로부터 ‘활동지원제도’ 이용자들에 대하여는 장애등급재판정을 강요하지 않을 것과 장애인계와 함께 장애등급제에 관한 논의테이블을 만드는 것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었다. 그 결과 2011년에 ‘장애인복지서비스개편기획단’을 중심으로 장애등급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연구용역 결과발표를 미루면서 일방적으로 논의를 중단하였고, 어떠한 제도개선 계획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와 <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은 한국의 복지제도를 억누르고 있는 핵심적인 악법인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끝장내기 위한 최후의 결전에 돌입하였다. 작년 8월 21일, 200여명의 중증장애인을 비롯한 수많은 인권활동가들이 광화문역 해치마당 지하에서 무기한 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수년에 걸친 투쟁의 결과, 2012년 대통령선거 시기 장애등급제 문제는 장애인계 최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진보진영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국민명령1호’로 장애등급제 폐지를 약속하였고, 박근혜대통령도 장애인공약 첫 번째로 장애등급제 폐지와 권리보장법 제정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2013년 박근혜정부가 출범하고, 정부에서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발표하였다. 제목만을 놓고 보면 장애등급제 폐지투쟁은 이미 승리를 한 것과 다름없으며, 장애등급제는 벌써 무너져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장애등급제는 개별의 복지제도가 아니라 한국의 장애인복지의 모든 내용을 규정하던 바탕과도 같은 것이어서, 문제는 그다지 단순하지 않다. 요컨대 장애등급제 폐지는 ‘어떻게’가 더욱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2. 장애등급제 무엇이 문제인가?장애등급제의 문제를 명확히 설정하여야 그 해법을 올바로 찾아낼 수 있다.
첫째, 낙인화의 문제이다.
장애인의 몸에 등급을 매겨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이다.
둘째, 장애정의의 문제이다.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을 의료적 기준으로 구분하여 ‘장애’를 의료적인 영역의 문제로만 정의하며 장애의 사회적 관계를 은폐한다. 장애등급제를 ‘손상등급제’라고 한 지적은 정확한 것이다. 아무리 인식의 변화를 말해도 장애등급제가 존재하는 한, 장애인은 손상된 몸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되고 인식될 뿐이다.
셋째, 서비스판정 기준의 문제이다.
한국의 장애인복지는 장애등급기준과 가구소득기준이라는 두 가지 기준에 의한 ‘2열종대 선착순’ 복지체계이다. 장애등급은 복지서비스의 적격성을 판정하는 절대기준으로 쓰이면서, 개인의 환경과 욕구를 무시하고 의료적 기준으로만 일방적 복지행정을 합리화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서비스가 필요해도 등급기준으로 인해 신청자격조차 제한당하는가 하면, 등급이 같으면 서비스 욕구도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획일적 서비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넷째, 복지권력의 문제이다.
의료적 기준의 서비스 판정체계로 인한 폐해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의료적 기준으로 ‘장애’는 기능손상과 같은 부정적 의미만을 갖고 철저히 대상화되고 차별받지만, 서비스의 욕구를 가진 사람은 장애인이 되고자 노력하며, 더욱 중증장애인으로 등록하려고 경쟁하게 된다.
의료적 기준의 객관성을 제고한다며 실시되는 장애등급재심사 같은 행정절차는 장애인을 불안에 떨게하는 공포정치가 되고, 장애인의 권리는 왜곡되고, 복지행정은 권력이 된다.
다섯째, 행정편의주의와 권리제한의 문제이다.br /> 장애등급제의 최대 쟁점은 분명 행정의 편리함이다. 예산에 맞추어 쉽게 장애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잘라낼 수 있는 것이다.br /> 장애인활동지원제도는 그동안 1급으로 신청자격을 제한해오다 올해부터 2급장애인까지 신청자격을 확대하였다. 장애인활동지원제도가 혼자서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제도라면, 혼자서 거동이 불편하고 일상생활에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제공되면 될 일이다. 장애등급은 애초에 불필요한 기준이다. 장애인연금제도는 1,2급 장애인 및 중복 3급 장애인 중 소득하위를 대상으로 제한하고 있다. 장애인연금제도가 빈곤한 장애인에게 사회적 추가비용과 소득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라면 장애등급으로 제한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경증장애인이라고 해서 빈곤이 덜 고통스럽거나 소득활동의 기회가 더 많이 보장된다는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br /> 장애등급제에 익숙한 장애인들은 이제 스스로의 권리가 잘려나가도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3. 장애등급제,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으로 끝장내자!정부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약속했다. 현행 1급부터 6급까지 구분하고 있는 등급제를 2014년에는 1~3급을 중증으로, 4~6급을 경증으로 단순화하고, 2017년에는 장애등급제를 완전히 폐지하겠다고 발표하였고,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대안 마련을 위해 기획단 회의도 진행되고 있다.
▼ 현행 1~3급 구분 적용
장애인자녀교육비 지원, 여성장애인출산비용 지원, 장애아가족양육지원, 고궁,능원,국·공립박물관및미술관,국·공립공원,국·공립공연장,공공체육시설 요금 감면, 철도·도시철도 요금 감면, 항공요금 할인, 연안여객선 여객운임 할인, 전기요금 할인, 도시가스요금 할인, 장애인자동차 검사수수료 할인, 승용자동차에 대한 개별소비세 면제, 장애인용 차량에 대한 취득세(종전 등록세포함) 자동차세 면제
▼ 현행 1~2급 구분 적용용
장애인연금, 장애아동수당, 건강보험지역가입자의 산출보험료 경감, 장기요양 보험료 경감, 장애인활동지원
장애등급 단순화는 절대 폐지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보건복지부 2013년 장애인복지사업안내를 보면 72개의 장애인복지사업이 소개가 되고 있고, 그중 21개 사업이 장애등급에 따른 차등적용이 되고 있다. 이중 대부분이 1급부터 3급 정도를 기준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등급 단순화 방안은 본질을 건드리지 않고 이름만 바꾸자는 기만적인 내용이다. 과도기적 조치라 할 수 있으나, 그대로 굳어질 우려도 적지 않다. 완전한 장애등급제 폐지만이 근본적인 문제해결에 접근할 수 있다.
장애등급제가 한국 장애인복지의 구조로서 작용하였다면, 우리는 근본적 구조의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 장애등급제를 비롯한 구시대적 내용으로 가득한 장애인복지법을 폐지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선언하고 권리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법제정이 필요하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은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장애를 사회적으로 정의하고, 장애등급 기준과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전히 폐지하고, 개인의 환경과 욕구에 따른 개인별지원체계를 만드는 것이 그 핵심적 방향이다. 또한 장애등급제가 그동안 은폐해온 장애인의 정당한 권리들을 명시하고, 그것들이 장애등급 기준과 부양의무자 기준 따위의 임의의 기준에 의해 절대 잘려나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정부는 장애등급제가 폐지되어도 또 다른, 어쩌면 더욱 엄격한 의료적 기준으로 장애인의 권리를 제한하려 할 것이다. 현장에서는 장애등급제가 없어지면 오히려 복지가 축소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등급제 없어지면, 1급부터 6급까지 복지를 똑같이 받나요?”
“6급도 활동보조 받나요?”, “6급도 장애인연금 받나요?”
“지하철, 열차, 전화, 전기, 가스, ---, 모든 할인이 없어지거나 똑같아 지나요?”
장애등급제 폐지 대안은 개인별지원체계의 구축이어야 한다. 1급이건 6급이건 하는 등급은 사라지고, 누구라도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서비스가 제공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의료적 기준만이 아닌 환경과 욕구를 감안한 개인별지원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활동보조가 필요 없는 사람에게 활동보조가 가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활동보조가 필요한 사람에게 등급이나 다른 임의의 기준을 이유로 권리를 제한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연금제도는 장애의 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빈곤의 정도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장애등급을 이유로 권리를 제한하여서는 안 되는 제도이다. 따라서 장애가 경한 사람이 중한 사람에 비해 급여를 적게 받을지는 몰라도 제도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감면할인제도는 뜨거운 감자이다. 정부는 감면할인제도의 유지를 위해 단순화된 수준으로라도 장애등급제 유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감면할인제도에 대해 일시에 큰 변화를 주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활동지원과 장애인연금과 같은 직접적 지원제도가 최근에야 만들어지고, 전통적으로 감면할인과 같은 간접적 지원제도를 중심으로 성장한 한국의 왜곡된 복지구조의 문제도 중대한 충돌지점 중 하나이다.
장애인연금과 같은 직접적 소득보장제도를 올바로 세우는 운동과, 감면할인제도의 적정한 조정이 동시에 추진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직접적 소득보장제도가 장애인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광화문 농성장이 이제 300일을 바라보고 있고, 혹자는 장애등급제 폐지가 이미 승리한 투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애인계의 의지와 투쟁의 힘은 바로 지금 더욱 크게 요구되는 상황이다. 구시대적 복지구조의 핵심이 무너져내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인 것이다.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