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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포유 : 시네라리아를 찾아서,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마치고..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마치고.. 이보라 (하트체임버 오케스트라 연주자)


우리가 카네기홀에 가다니!!

 지금 생각해 보아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아무나 설수 없고, 세워주지도 않는 그곳에서 우리 오케스트라가 서게 되다니.. 우리가 세계정상의 오케스트라여서, 나라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여서가 아니라 우리만이, 우리여서 줄 수 있는 마음의 음악을 전달 할 수 있어서 그 무대에 서게 된게 아닐까.


[그림1 : 카네기 홀. 여기가 무려 카네기 홀이다!]

우리 오케스트라는 2007년 3월에 창단되었다. 시각장애인에게 오케스트라를 한다는 것은 꿈이었다. 비장애인들은 악보를 받으면 그 자리에서 연주를 하고 지휘자를 보며 같이 활을 맞추고, 화음을 낸다. 하지만 우리에겐 멜로디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몇십 마디씩 쉬기도 하고. 교향곡의 경우엔 30~40분이나 걸리는 곡을 통째로 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케스트라 수업 시간에 들어가면 눈이 안 보이는게 이렇게 좌절이 될 수가 없었다. 오케스트라 교수님도 우리가 수업에 들어오는걸 꺼려하셨고, 우리 자신도 그 수업을 포기하였다.

내가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를 알게된건 2007년 9월쯤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보니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너무 없었다. 음악을 너무 좋아하시는 엄마의 영향으로 늘 클래식을 들으며 자랐던 난 음악듣기를 매우 좋아했다. 엄마는 내 눈이 나쁘니, 눈이 가장 필요없는 음악을 전공시키기로 하셨다.(하지만 음악에도 눈은 매우 중요했다. 하다못해 밥을 먹을 때도 입으로 밥은 먹지만 눈으로 집어야 하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잡으면서 다른 길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악기를 잘하진 못했지만, 음악을 좋아했으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이 전공보다는 특수교육이나, 사회복지를 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갈팡질팡 방황하던 시기에 하트오케스트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

오디션을 보고, 하트오케스트라의 첫 연습날 나는 깜짝 놀랐다. 일반학교를 다녀 시각장애인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 음악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시각장애인들과의 만남은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도 완벽하게 외워서 연주하는 것에 놀랐고, 실력에 놀랐고, 열정에 놀랐다. 한곡 한곡을 외우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고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서로서로가 알고 공감할 수 있어서, 함께 한걸음 한걸음 발 맞추어 나갈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렇게 1년에 20여곡의 곡을 외우며, 1년에 15회 정도의 공연을 하던 우리는 2008년 말로 재단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2009년 아무것도 없이 나온 우리는 걱정과 불안 속에서도 이대로 해체할 수 없다며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는 음악감독님을 필두로 하트 시각장애인 체임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연습실을 구하고, 연습실에 방음장치를 하고 여러 가지 집기를 들여놓고, 제안서를 넣으며 연주를 따고, 일정을 정하고, 지방이면 버스를 대절하고, 현수막, 팜플렛, 초대장까지 우리가 하나하나 해야 했다. 감독선생님은 우리 오케스트라로 인해 클라리넷 연습시간보다 행정적인 많은 일들에 치이게 됐다. 그렇게 우리는 2009, 2010년 더 많은 연주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재정적인 지원이 없어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이대로 계속 가기란 불가능하다란 생각에 이르렀다. 오케스트라를 꾸려가기가 너무 힘들어 하루에도 수십번씩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하셨던 감독님은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카네기홀 공연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림3 : 연습중인 단원들]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우리 오케스트라의 존재와 음악의 감동을 전하기 위해 2011년 3월부터 카네기홀 공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카네기홀에 우리의 유투브 동영상과 각종 언론매체에 실린 기사들을 모아 보냈다. 뉴욕필하모닉 부악장인 미쉘김 선생님의 도움도 컸다. 우리는 기존에 해 왔던 곡 중 우리가 잘 할수 있고, 사람들이 좋아 하는 곡을 고르고, 한국인들을 위해 아리랑과 포스터의 작품들을 묶은 미국민요 등을 편곡하여 준비했다.

미국과의 수백통의 전화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일정을 잡고, 채류기간을 정하고, 우리의 로고를 만들고, 일은 하나씨 하나씩 준비되어 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경비 마련이 문제였다. PPT를 만들어 수십곳의 기업체와 만났다. 하지만 단 한곳도 우리를 후원해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다행히 문화관광부에서 5천만원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한 현대차의 5천만원을 후원받을 수 있었다. 소셜 펀드인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도 200만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가 1주일간 미국에 체류하며 드는 모든 경비는 1억 6천만원 정도여서 나머지모자란 금액은 음악감독선생님의 사비가 들어갔다.

그렇게 10월 22일 출국을 앞두고 우리는 관광상용비자인 b1,b2 비자을 받기위해 12일 미국대사관을 찾았다. 요즘 미국은 무비자로도 갈 수 있지만 우리가 악기를 들고 시각장애인이 단체로 가면서 관광왔다고 하는게 입국심사에서 어려울이 있을거 같아 관광상용비자를 받기로 한 것이다. 카네기홀 연주 포스터와 여러 서류을 본 미국 영사는 우리가 받는 관람료 10달러가 문제가 된다며 다시 서류를 준비해 공연비자인 p비자를 받으라며 비자 보류 결정을 내렸다. 우리가 공연비자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연비자를 받으려면 최소한 3개월의 시간과 3천만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했다.


[그림4 : 하트체임버 오케스트라의 공연 장면들]

관람료 10달러도 무료공연으로 하게 되면 티켓만 받고 안 오는 사람이 많아 자리가 차지 않고 팜플렛이나 포스터 제작도 무료공연의 경우엔 할 수 없어 관람료 10달러를 받되 그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기로 하고 정한 결정이었다. 출국일이 일주일여밖에 안남은 시점에서 비자 보류 결정을 받고 나온 우리는 하늘이 노래지고 정말 갈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한숨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미국의 기획사에서도 난리가 났다. 이례적으로 카네기홀 홈페이지에 적힌 관람료를 무료로 바꾸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후 17일 다시 관광상용비자를 넣었다. 미국 기획사측에선 신문 광고를 내도 되냐며 걱정했고, 20일 출국 이틀전에 가까스로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22일 오후 우리는 미국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를 마중나온 기획사 대표 엘리는 숙소와 식사 및 모든 것을 도와주었다. 22일 짐을 풀고 23일 일요일 오후부터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됐다. 연습일정은 월요일 오전 오후 연습, 화요일 오전연습과 오후 병원연주, 수요일 오전, 오후 연습, 목요일 오전에 쉬고 카네기홀에서의 리허설과 연주였다.

점심을 먹고 나면 느꺼보지 못한 몽롱한 상태가 되었지만 연습은 잘 진행되었다. 우리 오케스트라에 지방분들이 몇몇 계셔 매일 연습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오전 오후로 연습하니 여러가지 놓치고 잃어먹었던 부분들을 다시 약속하게 되고 익숙해질 때까지 맞춰볼 수 있어 좋았다. 화요일 오전, 연습을 위해 모여있는데 감독선생님과 몇몇이 오지 않았다. 한 단원의 어머니가 너무 위독하시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그 단원은 오후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갔다. 돌아간 단원을 대신해 현지에서 객원 단원을 구해야 햇다. 가까스로 미국 현지인 브라이언과 함께 화요일 오후 병원연주를 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첫 연주는 설레임보다는 덜림이 더 컸다. 많지 않은 수의 병원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주었고, 몇 배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 연주에서 우리는 카네기 프로그램과 같은 곡들을 연주햇는데 이 연주로 부족한 점과 보완해야 할 부분들을 볼 수 있어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한 명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단원 두 명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한국에서 들였다...우리가 정해놓은 일정대로 연습할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건 기도밖에 없었다. 얼마나 잘 되려고 이런일이 계속 생기는건지.

27일 목요일 드디어 카네기홀 연주 날이다. 뉴욕 날씨는 비가 부슬부슬 와 사람들이 많이 안 오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카네기홀에는 세 개의 공연장이 있는데 우리가 공연할 곳은 중간 사이즈의 홀인 장켄홀 이었다. 아늑하면서 울림이 너무 아름다운 홀이었다.

모든 곡을 다 한번씩 리허설 했다. 새로운 객원 연주자 브라이언에게 여러 가지를 주문하며 무사히 리허설을 끝내고, 대기실에서 감독선생님의 부탁으로 지니가 한국 약국을 세 군데나 돌아 사온 우왕청심원을 먹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카네기 프로그램의 첫 곡인 운명의힘 서곡은 너무 어렵고 까다로와 이 곡을 처음 연주했을때는 심장이 떨리는 느낌까지 받은 곡이었다. 무대에 입장하고 심장은 빨리 뛰었지만 평안한 마음으로 가장 어려운 첫 곡과 1부의 클래식 곡들을 연주했다. 무대에 나가 악기를 튜닝하기 전 잠시 동안 우리 오케스트라가 천상의 소리를 낼 수 있겠구나 란 생각을 했다. 단원 모두가 집중해 약속했던 음의 길이와 템포변화, 셈여림의 바뀜 등을 잘 표현할 수 있었다.

한국인 보다는 미국 관객들이 많이 오셨는데 감독님의 말에 귀 기울이고 호응하고 잘 지켜주어 역시 문화의 선진국이구나 란 행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작할 때 지휘자가 없어 말로 하나, 둘, 셋... 이라고 한다. 그것을 듣고 박자를 잡아 시작하는 것인데 그래서 곡과 곡 사이에 박수를 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박수 소리에 하나, 둘, 셋, 시작하는 소리가 안 들릴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간혹 그래도 박수를 치시는 분이 있는데 미국에선 정말 한 사람도 없어 말을 경청하고 음악을 사랑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2부엔 가벼운 영화음악과 한국과 미국의 포크송을 연주했다.

암전을 하고 연주한 오버더레인보우(무지개넘어)는 안전을 위해 완전 암전은 안 될거라는 말과 달리 한치 앞도 볼수 없는 암전을 해주어 더욱더 시각장애인의 삶의 느낌을 함께 경험하고 눈으로가 아닌 정말 귀로만 듣는, 소리가 두 배는 커지고 마음을 열리는 시간이었다.

아리랑을 할 때는 한국분들이 우시고 미국민요를 할 때는 미국분들이 우시고,,, 음악으로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미국 민요가 끝난 후, 받았던 따뜻하고 큰 기립박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시간으로 화요일 새벽에 돌아가신 할머니 발인이 우리의 카네기 연주와 같은 시각이었다. 할머니께서도 하늘에서 우리의 연주를 들으실 거라는 아빠의 문자에 더욱 마음 찡한 음악회였다.

볼 수는 없지만 함께 호흡하며, 서로에게 귀을 기울이고, 나를 주장하기 보다는 같이 어우러지는 함께해서 몇 십배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하트 시각장애인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길이 멀고 험난해도 천상의 소리를 내는 그날을 기대한다.


[그림6 : 우리의 음악이 천상의 소리를 내는 날을 기원한다.]

지금까지 묵묵히 많은 일들을 해 오시고 계신 감독님, 늘 인간적이고 따뜻한 마음으로 참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신 이상재 음악감독님과 너무 좋은 소리로 오케스트라를 채워주시고 우리의 부족함에도 인내로 함께해주신 김종훈 악장님, 그 외 자기 맡은 곳에서 최선을 다해준 시각장애인 단원과 악보를 봐주고, 소소한 일에 많은 도움을 준 객원단원분들게 깊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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