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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분기마다 발간하는 웹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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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Universal : 장애 직장인의 인생역정, 장애인이 프로그래머로 산다는 것


장사꾼에서 프로그래머까지 권동문 (장애인 프로그래머)


입시에 실패하고 장사꾼이 되다.

나의 사회생활은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대입시험에 실패한 아들이 혹여 좌절할 것을 걱정하셨었는지, "대학을 나와도 직장에 취업하기 힘들수 있으니 장사를 해보는게 어떠냐"고 의견을 주셨습니다. 실내인테리어 전문점을 하셨던 부모님께서는 마침 같은 건물에 빈매장이 하나 나온 것을 아시고 건물주에게 나의 사정을 얘기한 모양입니다. 지금 기억으로도 상당히 저렴하게 임대를 받아 여고 앞이라는 위치를 살려 문구점으로 정하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한 장애인이 혼자 가게를 운영한다는게 생각처럼 쉽진 않았지만 식구들의 도움도 있었고 주변에 고등학교 말고도 초등학교, 중학교도 있어서 그 지역에선 꽤나 장사가 잘되는 가게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약 5년 가까이 가게를 잘 운영하던 가운데 맘속에선 또 다른 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대입에 실패하기 했지만 매일 대하는 학생들 중 단골학생이 있었고 그 단골학생이 커가는 모습(외형적, 내면적인 성장)을 보면서 고등학교 졸업후 정체되고 있는 내 자신의 자아와 해보고 싶었던 일에 대한 열망이 커져가고 있던 차에 숭실전산원이란 곳에서 매년 2번에 걸쳐 전산전문가 양성 교육생 모집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구와 함께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몰래 입학시험을 봤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우수장학생 중 한명이 되었고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입학을 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첫 직장의 끝없는 야근, 그리고 첫 퇴사.

졸업시즌에 돌입하자, 취업이 당면 과제가 되었습니다. 취업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던 중 전자출판 소프트웨어(DTP) 전문 기업에 면접을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장사할 당시 가게에 놀러오시던 고객중 한분이 IT기업에서 부장님으로 계셔서 그 기업에 대해 여쭤보니 배울 것이 많은 기업이니 꼭 들어가면 좋겠다는 조언을 하셨습니다. 입사면접에서 성심성의껏 답변했고 그런 성실한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나는 생에 첫 입사를 하게 됩니다.

내가 참여한 첫 프로젝트는 Win3.1 기반으로 작성된 전자출판용 프로그램을 windows 95용(이당시 새로 출시될 예정이였음)으로 새롭게 개발하는 작업이였습니다. 기존 버젼에 비해 기능을 확대하면서 새로운 OS에 맞춰서 개발하다보니 개발 자료도 많이 없고 이러한 거대한 프로젝트는 다들 처음 경험하는 거라 개발실 실장님 조차도 학습이 필요한 상황이여서 개발업무를 잘 진행하기 위해선 프로그램 개발과 신기술 학습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방법은 팀원들이 1주일씩 돌아가면 세미나 주제를 정하고 학습하고 그 학습한 내용을 발표를 통해 다른 팀원들에게 그동안 쌓은 지식을 전달하는 식으로 개발실이 운영되었습니다.

우리 팀은 프로젝트를 빠른 시일 내에 완성할 목적에 늦은 퇴근과 주말까지도 희생해가며 노력했지만 제품은 1년후에나 출시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설계시 잡았던 계획은 실 작업이 진행되면서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으로 인해 처음 잡은 기간보다 몇 배가 걸려버렸던 것이지요

프로젝트가 길어지면서 힘든 부분이 하나둘씩 나오더군요 이동에 대한 제한 등으로 인한 출퇴근이 힘든 부분과 끝없는 철야작업에 따른 체력적 부담이 가중되었지만 첫직장이고 누구나 격어야 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참아 내려 했습니다. 물론 사장님을 비롯한 직원들은 더 독려하고 그것을 극복할 것이라고 응원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것 조차도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팀원이 4명이었는데, 그중 남자는 나 혼자이다 보니 업무실책에 대한 문책이 유독 심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퇴사를 결심하게 됩니다.

사직서에는 "일보단 사람이 너무 힘들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처음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다.

첫 직장에서 퇴사 후 지인의 소개로 폰트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IT업체에 입사하게 됩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이때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우정국 표준문서 프로젝트와 한전 표준문서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회사에선 자금 투자는 소홀히 하고 자체 인력으로만 해결하려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표준화 작업을 무산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표준화 사업 무산을 계기로 이 회사의 관계자께서 창업을 하셨고, 나도 그분을 따라 그 회사로 옮기게 됩니다. 회사를 옮긴 후 첫 업무는 현대계열사에서 분사한 그룹웨어 전문업체에 파견되어 그 회사 제품인 한국어 버전 그룹웨어 시스템을 중국어 버전으로 바꾸고 중국에 납품하는 업체에 파견되었습니다.

이 시기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생애 첫 스카웃 제의도 받게 되었습니다. 업체에선 신입사원 1명을 지원해 주고는 제품군 전체를 중국어로 변환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미 여러 업체에 구축된, 구축되고 있던 제품이다 보니 파트별 담당자들은 항상 시간에 쫓겨 야근이 일상화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새로 창업한 회사에서 파견 간 직원이었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잘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가장 늦게 퇴근을 하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해당업체 직원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제품의 문제점까지 고쳐서 중국에 직접 가서 납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점이 업체의 경영진에 어필되었는지, 꽤 좋은 연봉과 스톡옵션 제안을 받고 스카웃제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 회사의 관계 때문에 고사를 몇 번 했습니다만, 열정적인 업체 사장님의 권유에 스카웃 제의를 받고 다시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계약직 프리랜서의 삶, 그리고 장애인으로서의 어려움.

그룹웨어전문기업을 퇴사하면서 프리랜서로 전향을 하게 되었습니다. C언어 개발자로 10년 이상을 지내온 경력을 믿고 프리랜서 시장에서 제대로 대접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IT관련 인력시장에서는 java라든지 홈페이지 제작(?)에 관련한 인력에 대한 수요가 컸었고, 어떤 경우엔 면접에서 장애인이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계약직 직원형태로 일을 시작했지만, 투입된 프로젝트가 끝나자 바로 계약이 해지되면서 실업자 아닌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할 수 있엇으나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결국 그와 같은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후 농협 중앙회 전산실에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장애인으로서 몇 가지 문제를 겪게 되면서, 프리랜서 생활을 접게 되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장애인들에게 주차는 항상 큰 문제로 대두됩니다. 그렇다보니 주차 관리하는 분들과 대체로 좋은 관계나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인사도 잘하고 그런 편이죠. 그런데 농협중앙회 전산센타의 주차 관리자들은 장애인 주차장에 주차를 해도 은행 주차장이니 전산센터와 먼 안쪽 주차장에 주차를 하라고 했습니다.

비장애인들과 같은 주차장에 주차하면 되지만 우리나라 주차라인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좁습니다. 목발을 쓰는 사람으로써는 몸을 먼저 빼고 목발을 빼내다보면 공간이 좀 더 필요한데요. 그들은 그런 배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듯 했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날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라 출근하면서 비도 오고 하니 장애인 주차장에 주차를 하게 해달라고 도움요청을 했습니다. 헌혈 버스가 들어와서 자리를 비워줘야 하니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 문제로 옥신각신 하기는 했지만, 결국 먼 곳에 주차를 하고, 한참을 비를 맞으며 건물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주차 관리자들의 배려심 부족이 아니더라도 농협 중앙회 전산센타는 저같은 장애인에겐 일하기도 힘든 곳입니다. 6층 건물에 전기를 절약한다고 엘리베이터는 2,5,6층만 운행합니다. 최고의 금융기업을 꿈꾼다는 농협에서 장애인 근무자에 대한 처우가 이렇게 밖에 안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 일을 제가 운영하던 블로그에 포스팅 했었고, 이 내용이 몇군데 관련 단체등에 알려지면서... 파견업체와의 트러블이 계속 발생을 하게 됩니다.

결국 이 곳에서의 일을 계기로, 프리랜서의 생활도, 프로그래머라는 직업도 잠시 버리게 되었습니다.

배운 짓이 도둑질! 하지만 장애는 언제나 나와 함께 했다.

농협 중앙회에서의 일을 끝내고 2년여동안 잠시 제조업에서 외도를 했습니다. 2010년 스마트폰의 열풍이 우리 사회를 강타하면서 다시 한번 모바일을 목표로 프로그래머의 길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년여간 현직을 떠나있었고, 이력서에 기재된 “장애인”이라는 주홍글씨는 나에게 쉽게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기제가 된 듯 했습니다.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꾸준히 스마트폰 어플 개발을 학습하면서 스마트폰과 동시에 부각되었던 SNS서비스를 활용하면서 트위터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과 정보 수집에 나섰습니다. 트위터는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에게 평소 만나기 힘들었던 유명인이나 세상의 실질적인 흐름, IT의 현 이슈등을 쉽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트위터를 통해 이런 글이 보였습니다.

"저는 휠체어 타는 장애인입니다. 지하철역 입구가 여러 곳이다 보니 어느 곳에 휠체어용 리프트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지하철을 이용하기 힘듭니다. 이런 것들을 알려주는 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이건 내가 할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기술을 누군가를 위해 써보자! 라는 생각과 나도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해 내가 갖고 있는 재능을 통해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줬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지하철 이용정보를 모으는 것으로 시작 했습니다. 막상 찾아보니 그런 정보는 정말 국한되어 있고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주지 않는 한 존재하는 정보가 아니더군요. 그러다 지하철공사에 근무하시는 이수용이란 분이 만든 "www.intersubway.co.kr"을 발견했습니다. 정말 보석 같은 정보들로 가득 차 있는 홈페이지였습니다.

이수용씨의 동의를 얻어 그날부터 개발 작업에 착수하였고 10일후 나의 첫 앱인 "지하철 장애인 도우미"가 애플 앱스토어에 승인 심사를 올렸고 3주후 애플 승인이 나서 앱스토어에서 첫 다운로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만든 앱은 생각보다 큰 반응이 없었습니다.

왜?라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동료장애인들을 만나면서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장애인들은 아이폰 등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 자체가 적었던 겁니다.

“장애인”이라는 텍스트가 가지는 의미는 별개로 사용자의 절대적 부족 속에서 앱에 유니버셜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장애유무와 무관하게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앱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앱의 이름도 “지하철 헬퍼”로 바꾸었습니다.

“지하철 헬퍼”는 “지하철 장애인 도우미”에 비해 큰 반응을 얻었습니다. 하루 다운로드 회수 2,000건을 넘어서기도 했으니까요.

새로운 기회에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프로그래머로서의 삶.

“지하철 장애인 도우미”에서 “지하철 헬퍼”로 이어지는 경험은 또 다른 의미에서 프로그래머로서의 나의 삶에 많은 것을 얻게 해 준 경험이 되었습니다.

장애인이 프로그래머로 산다는 것.

이 글을 처음 청탁 받을 때, 편집자는 나에게 장애인이 IT업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현실 속에서 더 많은 장애인들이 IT업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희망섞인 메시지를 담아달라고 했습니다.

“당사자가 만들어야 가장 당사자 친화적인 것이 된다.”는 식의 식어빠진 이야기나 할까 했으나 흔하지 않은 IT업계의 장애인으로서 내가 걸어온 길을 정리해 보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접근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스스로 제작했던 “지하철 헬퍼”를 통해서 보 듯,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앱과 관련 기술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메리트가 될 것이라 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너무 “장애”라는 굴레에 매몰된 기술 개발은 장애인들이 IT업계에서 성장하고 성장하는데 또 하나의 걸림돌이 아닌가 하는 것이 개인적 생각입니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기술을 장애인이 만들 수 있으니 장애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장애인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만들 수 있으니 장애인들의 진입과 도전이 필요하다.”는 식의 접근법이 우선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프로그래머는 기본적으로 엔지니어입니다. 즉, 사무직 노동자가 아니라 개발자 혹은 육체 노동자에 가깝다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처음 프로그래머로서 일을 시작할 때는 세상이 야박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어려움을 겪을 때는 IT업계도 장애인이 일할만한 영역은 아니구나 라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IT 세계에서 어느 정도 나이테를 늘려온 지금에서는 몇가지 사안들은 사회초년생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장애인이라는 이유에 맞춰 체화 시켜온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지금도 장애인 프로그래머, 개발자입니다.

장애인에게 유용한, 동시에 비장애인들에게도 유용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더 많은 장애인들이 IT의 생태계 안에 도전한다면, IT 업계의 장애인 친화도도 증가하지 않을까요.

만일 장애인들이 IT업계에 필요하다면, 그것은 장애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배려에 익숙하고, 타인에게도 같은 배려를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도전하세요.

IT업계에 제가 서 있는 과정 과정, 더 많은 장애인들을 만나고,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힘을 쏟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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