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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리포트 : 학생인권조례 제정


인간이 될 수 없는 인간 혜원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인간세상을 다스리려 내려온 환웅에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빌었단다. 의지박약 호랑이는 며칠 못 버티고 동굴을 뛰쳐나갔지만, 좀 독한 구석이 있었던 곰은 햇빛 한줄기 비치지 않는 동굴에서 마늘과 쑥만 씹어 먹으며 100일을 버틴 뒤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곰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더 긴 시간을 버텨도 절대로 인간이 되지 못하는 좀 불쌍한 부류가 있다. 머리카락이 국수처럼 줄줄 나오는 급식을 먹으며, 땀을 식혀줄 바람 한 자락 들지 않는 교실에 놓인 몸 한번 옴짝 달싹 하기 어려운 의자위에서 12년을 버텨도 결국 인간이 되지 못하는 좀 불쌍한 그들. ‘학생’이라 부르고 ‘동물’이라 읽는 사람들.

이제껏 내가 느껴온 학교라는 공간은 ‘사랑’과 ‘사랑의 매’를 구분할 줄 모르는 무지의 공간이었다. 끝없이 경쟁만을 추구하며, 경쟁에서 뒤쳐지고 낙오되는 학생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거부했던 잔인한 공간이었다. 한해 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게 했던 서글픈 공간이었다.

그런 학교의 현실 앞에 인권, 행복, 정의, 자유와 같은 가슴 설레는 단어들은 그 존엄성과 정당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렇게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학생들은, 인간임에도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정 청구인 명부 제출 장면
<그림 1.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정 청구인 명부 제출 장면>

전국 최초의 쑥과 마늘, <경기학생인권조례>

그런 21세기의 곰들도 이제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가 왔다. 그렇게 2009년 10월 전국 최초의 학생인권조례인 <경기학생인권조례>가 제정이 되었다.

처음 ‘학생인권’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형성 될 당시 많은 논란과 반대가 있었던 것을 기억 한다. 하지만 학교는 ‘학생들이 행복하게 살아 숨 쉬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믿음하나로 <경기학생인권조례>는 제정이 되었다. <경기학생인권조례>가 가지는 의미는 참 크다.

<경기학생인권조례>는 청소년 인권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는 역사상 최초의 제도적 성과이며, 이제껏 사회 곳곳에서 ‘학생인권 보장!’을 외치며 사회적 금기를 깨려 노력했던 이들이 이뤄낸 소중한 땀방울의 결실이었다. 또, <경기학생인권조례>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대한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전국 첫 인권조례라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조례 안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하지만 <경기학생인권조례>가 가지는 가장 큰 의의는 따로 있다.

이제껏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 되어왔던 학생인권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보다 깊고 넓게 확장시키며 오랜 시간 말할 수 없고, 보이지 않고, 가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존재가 꽁꽁 숨겨져 있었던 ‘학생인권’의 봉인을 해제했다.

<경기학생인권조례>의 제정 이후, 전국적으로 학생인권 조례 제정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볼 때, 인권조례는 이제껏 사회에서 논의되는 것조차 어려웠던 학생들의 인권에 대한 활발한 논쟁의 촉매가 되었다. 이는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한정적인 청소년들의 인권을 넘어 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청소년들의 인권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낼 볼 수 있는 성숙한 사회의 담론으로 가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21세기의 ‘곰’들을 위한 97,702명의 의미

그렇게 <경기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조례 시대의 도화선이 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곳에서 인권조례의 제정에 대한 필요성에 공감하기 시작했고,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은 사회적 요구가 되기에 이르렀다.

‘79,702명’이라는 숫자는 그런 사회적 요구를 좀 더 명확하게 수치화 한 것이다. 이 숫자는 서울시 거주 유권자의 1%가 약간 넘는 숫자이며, 130만 서울시 유치원, 초중고생들에겐 그들이 발 딛고 선 학교라는 공간 안에 인권을 꽃 피워줄 ‘착한 어른’들의 숫자였다. ‘학생인권’의 꽃을 피우길 원했던 모든 이들에게는,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철저하게 약자일 수밖에 없는 ‘21세기의 곰’이 되어버린 학생들에게 내밀어진 연대의 손길을 나타내는 숫자였다. 그렇게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해 기꺼이 펜을 들었던 서울시민들의 숫자였다.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제정을 위해 서울시 유권자 1%의 서명을 모아야 만이 발의가 가능해지는 ‘주민발의’라는 생소한 방식을 택했고, 그 생소함보다 더 컸던 처절함과 절박함의 연속이었던 가시밭길의 시작이기도 했다.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 청구 기자회견 장면
<그림 2.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 청구 기자회견 장면>

서울시 유권자의 1%인 약 82000명의 서명을 모으기 위해 활동가들은 칼바람 부는 겨울날의 한복판에서 꽃비가 내리던 봄날을 지나, 태풍과 장마전선의 야속한 빗방울이 흩뿌리던 여름날의 진흙탕을 함께 굴렀다. 활동가들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거리로 나갔고, 수많은 서울시민들에게 눈을 맞추고 말을 걸었다. 서명을 모으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고 간절함과 절박함이 크면 클수록 절망감의 크기도 커졌던 잔인한 시간이었다.

서명지를 제출하던 날 그동안 함께 고생했던 활동가들과 펑펑 눈물을 흘렸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처절한 시간을 모두 보내고 나서 결국 97,702명의 서명으로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는 성공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강원도, 대구, 광주, 전북 등 다양한 지역에서도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두발로 뛰고 있다. 정말 학생인권조례가 사회적 요구가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긴 시간을 학교 밖에서 방황하던 ‘학생인권’이 어렵사리 교문을 넘어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오랫동안 학생인권보장을 위해 노력해온 이들에게는 설레고 가슴 뛰는 변화였다.

쑥과 마늘을 먹어야 할 또 다른 곰들

하지만 어딜 가나 이런 설레고 가슴 뛰는 변화의 물결에 함께 하지 못하고 주변을 빙빙 겉도는 사람들이 꼭 있다. 경기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 1주년이 다 되어 가고, 전국 적으로 인권조례 제정의 붐이 일고 있지만 일부 보수 언론과 교사, 학부모 단체에서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작정이라도 한 듯이 연일 거센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이제 막 학교 안에서 꽃 피기 시작한 학생인권을 두고 어떤 이들은 미성숙한 학생들에게 ‘아직’ 주어져서는 안 될 위험한 권리를 정신 나간 어른들-이를테면 진보 교육감 같은-이 법으로 보장하려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인권조례 이후의 교실붕괴와 교권추락을 우려하며 남한 교육을 붕괴시킬 북한의 음모(?)라는 어이가 털리다 못해 이제는 털릴 어이도 없는 발언들을 쏟아낸다.

사실 ‘교실붕괴’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제정되기 전부터 심각한 수준이었고, ‘교권추락’문제도 학생인권조례가 원인이 아니다. 정말 다들 왜 이러시나. 학교도 안다녀 본 사람들처럼. 이들은 이렇게 인권조례를 두고 아직까지 찬반이나 따지고 있다. 이들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인권조례가 있었고, 제대로 된 인권교육을 받았다면 이렇게까지 반대하지는 않았을 텐데 싶어 인권조례의 필요성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태초에 동굴 안에서 쑥과 마늘을 먹어야 했던 건 곰이 아니라 이 미성숙하기 이를 데 없는 어른들임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학생인권조례의 시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그래서 ‘성숙한’ 청소년인 나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학생인권의 정당성이나 인권조례를 제정해야만 하는 이유 따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두 말하면 잔소리고, 입 아프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 더 생산적으로 학생인권조례 시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를 고민하고 싶다.

S고의 경우 학칙 개정 과정에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은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학내시위로 이어졌고, 학교는 자신들이 가르치는 민주주의의 정신도 지키지 못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G고는 상벌점제를 이유로 개교 3달 만에 수십 명의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내쫓았다. 이 사건을 통해 학교는 지금 우리가 21세기에 살고 있는지, 나치에 의한 인종청소가 벌어지던 20세기 초반에 살고 있는지 헛갈리게 만드는 대단한 위엄을 보여줬다.

S고와 G고는 각각 경기도의 부천과 남양주에 위치한 학교다. 아직 인권조례가 없는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인권조례 제정 1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으며, ‘학생인권의 메카’라 불리는 경기도안에서 벌어졌던 일이란 말이다. 이러한 학교들의 모습을 볼 때 아직까지 학생인권조례 정착화의 길은 한참이나 멀어 보인다.

다른 지역의 상황도 아마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렵게 꽃 피운 학생인권, 이제는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인권조례가 학교 현장 곳곳에 뿌리 깊게 스며들 수 있도록 바동거려보자.
학생과 인간이라는 단어사이의 거리를 100M쯤 줄여줄 학생인권조례다. 그렇기에 학생인권조례의 정착화는 학생인권조례 시대 우리에게 던져진 첫 번째 과제다.

학생인권조례, 그럼에도

사실 학생인권조례는 수치스럽다. 학교 안에서는 인간이 될 수 없는 학생들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니까 말이다. 머리길이 맘대로 하자, 머리카락 나오지 않는 급식을 먹자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이 법으로써 강제하지 않으면 지켜지지 않을 만큼 지금 학교 현실이 대박 후지다는 것을 보여주니까 말이다.

신체의 자유와 같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최소한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 안에서 최대한으로 허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버린 학생인권조례가 서글프다.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학생들에게 허용되고 보장되는 권리들 또한 너무나 한정적이다. 마치 학교의 운영과정에 대한 참여는 보장하지만, 투표권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는 보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학생인권조례가 학생들의 인권보장을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학생인권보장의 시작이자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마침내 학생인권조례 없이도 더 많은 학생들에게, 더 많은 권리를 보장하는 좀 더 성숙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 삶이 ‘인권’을 만나 충족되고 행복해졌듯이, 더 많은 학생들이 ‘인권’이 주는 그 찬란한 변화와 마주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권’과의 설레는 첫 만남을 시작할 수 있도록 바둥거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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