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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고의 날들... 박춘봉 (특수교사)


 조금 전 1급 정교사 자격연수에서 근현대사에 비춰 특수교사가 가져야 할 장애학에 대한 관점들을 배우고 난 뒤에 강의를 함께 들었던 선생님들과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려 담소를 나누고,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내 생애 최고의 날..."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내 생애 최고의 날.’

내 생애 최고의 날은 ‘지금 오늘이 아닐까?’ 란 생각을 해봅니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자신의 역할들을 하나하나 성취해 가며 이 모든 날들이 내 생애 최고의 날들은 아니었던가? 라고... 18년 전부터 함께한 장애를, 나의 일부로써 내가 어떻게 바라보는가? 라는 관점이 더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된 뒤로 나에게 내 생애 최고의 날은 매일 매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인생 앞에 겸손해지고 삶을 보는 태도가 바뀌게 되었다고 할까요?
여기 그러한 많은 날들 가운데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맹학교에 가던 첫 날.
'내가 다시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구나' 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발걸음을 떼어 놓던 생각이 납니다. 저는 93년도 15살 때 시신경 위축이라는 병명으로 양 쪽눈의 초점이 뿌옇게 보이는 장애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일반학교의 수업은 따라가기 힘들었고, 현대의학으로 고쳐낼 수 있는 것 인지를 2~3달에 걸쳐 국내에서 유명하다는 안과와 병원들을 돌아다니다가 중학교 3학년 10월 중순에는 휴학계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앙의 힘을 빌려보려 기도원을 찾아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시금 회상해 보니, 절 보시던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됩니다. 종전에는 양안 시력이 1.5에 1.5였던 아들에게 시각장애인이라고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이 밖에는 본적이 없던 부모님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저는 강남 8학군 내에 같은 학년 친구들이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제 모습을 어찌 볼까 생각하며 창피해하던 철부지 였습니다. 그렇게 94년과 95년을 보내며, 학교와는 거리를 멀리하고 있던 제게 아름아름 알고 계시던 지인들로부터 맹학교에 정규 교육과정이 있으니, 특수학교를 다녀보라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반심반의 하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맹학교를 방문하고 난 뒤엔 학교를 통해 공부를 할 수도 잇을 뿐 더러 졸업 후에는 직업을 가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여 만에 다시든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향하던 날의 기억들 뒤에 이어지는 맹학교의 회상들로는 사회 속에 시각장애인으로의 "재활"의 과정을 배운 것 같습니다. 맹학교를 향하던 첫 날의 제 책가방에는 두꺼운 매직과 줄 없는 노트만 있었지만, 점차 글을 쓰는 점자판 및 점자책과 녹음 테잎들로 바뀌어가며 제가 접하는 세상의 폭도 다시금 조심스럽게 찾아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 학생 자치기구의 회장을 시작한 날.
장애가 없었던 시기의 제 자신은 그저 평범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장애나 장애가 있는 환경속에서 살아가려다 보니, 자연스레 적극적이고도 활발해져가는 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맹학교라는 특수학교의 상황에서는 시각장애 학생이 장애인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에게 맞춰져 함께 하고, 지원해 주며, 교재나 학습기기 또한 시각장애 학생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보이는 것으로 인한 "실수"라는 것은 자연스레 수용되는 곳 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곳은 일반적인 환경과 사회속에 구성원으로 어떻게 적응하여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는 곳 이었습니다. 그 적응의 속도나 폭은 매우 빠르고도 컷 습니다. 시각장애를 입기 전에 가졌던 일반 친구들과의 동질적인 이미지가 있었고, 수 년에 걸쳐서 경험하지 못 했던 본래의 세상들을 체득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인으로 본래의 나이로써 알아야 할 것들은 많은데, 스스로가 뒤 쳐졌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여겨서 바삐 지내며 놀았던 대학생활이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에는 장애학생과 일반학생이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학교에 펼쳐낼 수 있는 학교 내에 자치기구가 있었습니다. 매주 한번씩 총학생회와 총동아리회 및 각 단대 회장들과 함께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하여 장애학생의 입장을 필역 할 수 있고, 교직원 및 전체 학생들을 향한 장애인식 사업 및 장애학생들간에 문화와 생활공간을 확보하고, 학습 보조기기나 공학기구들을 지원 할 수 있는 단체 였습니다. 그러한 학생 자치기구의 회장을 대학 3학년때에 맡게 되어, 더 큰 세상과 경험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 스스로가 만드는 학교내의 기구로써, 자립. 독립성 및 자기 주장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입학하는 모든 장애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더디가도 함께 가는 우리만의 문화공간으로 장애학생들의 문화로부터 일반학생들의 중심에 이르기까지의 함께 하는 문화를 만들려 애썼습니다. 그러한 좋은 경험들과 함께해준 사람들이 결코 제 힘만 으로는 겪을 수 없는 것 들이었습니다. 많이도 부족했던 경험부족의 장애학생이었던 저를 함께 품고 일어날 수 있는 토대위에 그 순간들을 함께 해준 대학인들에게 감사 할 따름입니다.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 소식을 듣던 날
2009년 2월 5일 그 날은 제 생애 어떤 날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최고의 날 이었습니다. 오전에 합격소식을 친구로부터 듣고는 그간 도와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기쁨을 함께 나눌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데에도 종일 걸렸으며, 받은 축하 문자만도 몇십개를 넘었는지 모릅니다. 서른살이 넘어서 부모님의 눈치를 봐가며 준비하던 2년여간의 고생의 끝이기도 하였고,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며, 흐뭇해 하시던 모습이 떠올려 집니다. 다른 이들보다도 더 컷던 그러한 기쁨들은 교육공무원이 되었다는 것 보다, 제게 가로막혀 있는 벽을 스스로 문을 만들어 나아갔다는 아버지의 칭찬에 담겨있듯, 제 스스로 열어나간 길에 성과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상 교사라는 꿈을 품고 스스로 열어갈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 했을 일이었습니다.
저는 특수교육과의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때에 전혀 임용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 대학 동기들 모두가 매진하는 교원임용시험에 점자만이 제공되는 제도로는 제가 시험을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도실명인인 저로써 18살에 배운 점자가 손가락의 촉지각이 무뎌진 상태에서 제한된 시간내에 해독이 불가능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생활에서 단념하고 있던 특수교사의 길을 우연치 않게 찾아온 좋은 기회로 대학 졸업후에는 특수학급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에서 2년 고등학교에서 1년 3년간을 근무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던 중 2006년부터 장애인 교원임용 구분전형이 생겼다는 소식에 본래 제가 공부하는 형태인 컴퓨터 음성지원을 통한 시험제도도 열릴 것 같은 기대에 2007년도 3월부터는 집에서 임용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 외에도 16개 교육청과 교원 임용시험의 주관 교육청을 상대로 임용시험에 컴퓨터에 음성 프로그램을 활용한 지원이 적용되기를 지속적으로 요청 하기도 하엿습니다. 장애인 교사로 임용시험을 준비하며, 제가 살고 있는 지역 도서관에 노트북을 들고가 열람실에서 음성프로그램으로 공부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공부 할 방안을 모색해가며 공부하던 중에 장애인고용공단에서 장애인 임용구분전형에 따른 교원임용시험 준비반이 있다는 소식에 문의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장애인을 뽑고 교육시켜 취업을 알선하는 장애인 고용공단에서 중증시각이기에 어려울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공단을 통한 여러 지원의 제도가 제가 준비하고 공부할 것과 맞았고, 이정도의 편견은 취업 후에도 얼마든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필코 들어갈테니, 받아달라고 공단 지원생 입학 면접에서 떼를 썻던 것도 기억납니다. 그렇게 들어간 공단의 임용지원반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나 임용공부에서도 그럭저럭 무리없이 잘 하였는지, 저 이후에는 중증 시각장애인 임용준비생들도 무리없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임용준비를 하던 첫 해인 2008임용시험에서는 컴퓨터를 통한 음성시험이 적용되지 않아 점자만으로 시험을 치르다가 보기좋게 낙방하였습니다. 잠시 어쩔줄 몰라 하다가,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시행되는 시기에 마처 32명의 임용준비생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국가 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였구, 6월에는 교육청으로부터 음성으로 시험을 치르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도 2008년에 재수를 할때에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시험을 치르던 서른살로 기억됩니다. 우선 학원가에서 나오는 'PDF'파일의 학습자료를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여 매주 타이핑 하였고, 노량진 학원가도 3차 임용시험을 치르기까지 6개월간 매일 통학하며 공부하였습니다. 학원가의 강사들로부터는 교재를 파일로 받아서 임용을 준비하던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때에도 당장에 파일을 주지 않던 임용 학습지를 함께 공부하며 읽어주던 대학때의 친구들이 있었기에 준비가 수월했고, 가능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정말이지 1차 시험때까지 수 개월간 공부를 하면서도 눈으로는 일반 활자체를 한 줄도 읽어보지 않고 음성으로만 공부하던 형태이었기에 2009년 1차 임용시험을 공부하던대로의 음성으로 시험을 치르게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전화통화와 상담을 교육청 및 관계된 이들에게 해왔었고, 애쓰며 고민했는지는 어떻게 달리 더 표현 할 길이 없어 보이지만, 제가 헤쳐나가야 하는 또 하나의 사회속에 장벽을 스스로 딯고 일어섰다는 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험을 2차와 3차에 걸쳐 치르며, 도움을 주거나 함께 공부하던 이들에게 여전히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저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자 애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애로 인한 차이는 존재하는 것이지 인정하구 말구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든 존재하는 개성만큼의 차이를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사람이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과 의지만큼 사회속에 구현되어 갈 때에 살아가는 기쁨이 있고, 살만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 봄니다. 저 또한 현재 6년차의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주변사람들은 못 느끼는 매일매일의 떠날 수 없는 시각장애의 크고 작은 문제와 접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것 이상의 삶의 의지가 저를 지탱해주고, 이겨나가는 과정들 속에 '이것이 인생이야!'라는 즐거움을 주곤 합니다. 그러한 삶의 방향과 의지가 '살아가는 맛'이며, 매일 매일에 최고의 날들을 영위하는 것 이라 여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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