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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삼호의장애학 미국장애운동사 : 제4장 장애권 법률의 효시


제4장 장애권 법률의 효시: 재활법 504호 번역 : 윤삼호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소장)


제4장 장애권 법률의 효시 : 재활법 504조

 닉슨 대통령은 1972년 10월 26일, 1973년 3월 27일 두 번이나 재활법 제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비용 때문이었다. 그러자 미국 전역에서 장애운동가들이 닉슨의 거부권에 저항했다. 1972년 10월, 뉴욕시에서는 주디스 휴먼을 비롯한 여덟 사람이 매디슨 가에서 차도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1973년 5월에는 장애운동가들이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여 그 곳에서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시위가 끝난 뒤에 참가자들은 링컨기념관에서 빗속에서 철야 농성을 하였다. 결국, 하원과 대통령이 타협하였고 닉슨은 1973년 9월 26일 재활법에 서명했다. 이렇게 제정된 1973년 재활법은 초안보다 후퇴한 건 분명하지만, 이 법률이 통과될 당시에는 장애운동가와 의원들은 물론이고 대통령조차도 자신들이 어떤 법률을 만들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장애운동가들은 1973년 재활법을 강력하게 지지했지만 장애권을 획기적으로 확장시키는 501조~504조를 추가시키는 데는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501조와 503조는 장애를 이유로 한 고용차별을 금지하고, 자격을 갖춘 장애인 채용을 위한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 프로그램들을 의무화한 조항이다. 501조는 연방기관에 적용되고 503조는 연방정부와 계약을 맺은 기관에 적용된다. 502조에 따라 1968년에 제정된 건축장벽법 시행기관인 건축및교통장벽고충처리위원회 - 현재의 접근성위원회 - 를 설립하였다. 적용 범위가 가장 넓은 504조는 연방 예산을 지원받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장애인들에게 시민권을 보장하였다.

제임스 체리의 504조 소송

 제임스 제리는 재활법 504조에 시행령이 없다며 이 법률을 고소했다. 그는 시행령이 없으면 “장애권은 여전히 암흑시대에 있을 것이며, 미국 장애인차별금지법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68년 백인 중증 장애인 체리는 하워드대학교 로스쿨에서 시민권 문제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인종을 이유로 한 사회적 배제와 장애를 이유로 한 물리적 배제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하워드대학교 학생, 교수, 일반 직원들은 흑인의 시민권 문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체리가 겪고 있는 접근성 문제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체리는 수업을 듣는 건물 근처에 주차장을 마련해 주고 승강기 열쇠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로스쿨 직원들은 이를 거절했다.
1972년 제92회 연방 의회가 1964년 시민권법에 장애 관련 조항을 추가하는데 실패하자, 체리는 크게 낙담했다. 그가 겪는 차별을 법적으로 구제받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의원들과 보좌관들은 장애인 시민권 보호를 위한 법률을 다른 연방 법률에 추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리처드 스카치가 쓴《선의에서 시민권으로》를 보면, 상원 노동및복지위원회 소속 보좌관들이 1973년 재활법 최종 법안을 다듬을 때 법안 맨 끝에 1964년 시민권법 제6장의 문구를 “채택하고 삽입하였다.” 법안이 통과되면서 이 조항은 장애인을 위한 최초의 연방시민권 조항인 504조가 되었다.
1973년 재활법이 통과된 직후, 체리는 보건교육복지부에 편지를 보내 504조 시행령을 제정하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장애인 단체와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했고 법률 자문도 구했다. 또 1974년부터 1976년까지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이때도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느라 바빴다. 그는 “전화통에만 매달려 있으니까, 간호사들이 음란 전화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며 웃었다.
마침내 법률회사 아놀드&포터가 체리에게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 산하 공익법률연구소의 빅터 크라머를 소개해 주었다. 그동안 체리가 고생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크라머는 이렇게 조언했다. “이제 아무한테도 전화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다 모아 가능한 한 빨리 나한테 보내주세요.” 그리고 나서 정식으로 법적 조치를 취했다.
504조 시행령을 제정하라는 주장한 지 거의 2년이나 지난 1976년 2월 13일, 체리는 보건교육복지부 장관 데이비드 매슈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크라머는 변론을 통해 504조는 그 자체로 효과를 발생시키는 조항이 아니기에 시행령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보건교육복지부는 504조 시행령 제정을 위한 법적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체리가 패소하면 향후 더 많은 장애 관련 입법이 난관에 봉착할까 걱정이 되어, 크라머는 원고인 체리에게 소송을 취하할 용의가 있는지 물어 보았다. 체리의 변호사들은 피고 측에 호의적인 것으로 알려진 판사에게 모험을 걸어보기로 최종 결정했지만, 체리의 말처럼 “그것은 슬램 덩크가 아니었다.”
마침내 1976년 7월 19일, 컬럼비아 연방 지방법원의 존 스미드 판사는 보건교육복지부가 504조 시행령을 “최대한 신중하고 신속하게” 제정해서 공표하라고 판결했다. 스미스 판사는 특별히 시한을 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럼에도 매슈스 장관은 노동및공공복지위원회에 이 사안을 보내 재심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같은 날 스미스 판사는 매슈스 장관에게 시행령을 제정하라는 가처분명령을 발표했다. 1977년 1월 19일 연방 항소법원은 가처분명령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그 다음날,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고 조지프 칼리파노가 보건교육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제 새 행정부가 504조 시행을 떠맡게 된 것이다.
504조 사행령 소송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장애 관련 법률의 역사는 “쟁점들마다 협소하게 정의된 지루하게 반복되는 사건들, 천 조각들을 이어 만든 이불 같은 판결들”이 이어졌을 것이라고 체리는 생각한다. 정확한 시행령이 없었더라면, 간결하지만 엉성한 법률 용어 그 자체에 기초하여 504조 관련 소송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 소송이 승리하자 전국에서 장애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체리는 이 운동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시위대들이 이 소송을 담당했던 변호사들과 협의했더라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시위는 504조 시행령 제정을 오히려 지체시켰을 수도 있다.”
체리는 조직된 시위가 도움이 될지 의심스러웠다. 시위를 보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시행 비용을 걱정한 나머지 504조에 반발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체리의 말을 들어보자. “한 개인의 영향력은 통제되지 않는 조직의 힘보다 더 크다. 그리고 통제를 받는 조직이라 할지라도 보통은 한 두 사람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504조 - 정치적 조직화의 계기

 체리가 504조 소송에서 승소한 뒤에 보건교육복지부 장관 조지프 칼라파노의 시행령 서명 촉구 투쟁은 미국 장애권운동의 결정판이었다. 이 투쟁은 워싱턴D.C. 뿐만 아니라 보건교육복지부 지역사무소가 있는 10개 도시에서 전개되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장애권운동은 지역적, 분산적 운동이었다. 그런데 504조 시행령을 쟁취하기 위한 연대투쟁을 통해 장애권운동은 전국적, 집중적 운동으로 변모하였다.
대통령 후보 카터가 장애인들의 표를 얻으려고 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무시되었던 인구 집단이 가진 한 표의 힘을 깨달았다는 의미다. 1976년 9월 6일, 카터는 조지아주 웜스프링스에서 유세를 하였다. 그곳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자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도시였고, 카터는 그 상징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504조는 연방정부의 재정을 지원받는 기관들이 장애시민들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법 정신을 완전히 구현하는 행정부가 그 법률을 지원하기 전까지는 큰 의미가 없을 겁니다. 장애시민들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행정부라면 3년 동안이나 504조의 시행을 결코 미루지 않을 겁니다.


 카터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대립적인 두 유권자 집단 - 장애인 공동체와 지방정부뿐만 아니라 병원, 대학(교) 같은 수많은 기관들 - 의 상반된 이해를 조정해야 했다. 504조 시행령이 제정되면 곧바로 자신들이 받는 연방 예산에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에, 이 기관들은 시행령을 약화시키기 위해 로비를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장애권운동은 워싱턴D.C.에 본부를 둔 전국 규모의 미국장애시민연대를 결성하여 대통령의 장애인 공약 이행을 주장했다.

미국장애시민연대의 504조

 여러 유형의 장애인들 - 프레드 페이, 주디스 휴먼, 랄프 호치키스, 샤론 미스틀러, 로저 피터슨, 앨 피멘텔, 유니스 피오리토 등 - 이 힘을 합쳐 1975년 4월 30일에 설립한 미국장애시민연대는 재활청장으로부터 전 장애유형 모형에 입각하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보조금을 지원받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여러 장애집단들의 연대를 촉진하기 위해 미국장애시민연대는 504조 시행령 제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피오리토는 에이브러햄 빔 뉴욕시장 직속 장애인국 초대 국장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미국장애시민연대의 초대 대표를 겸직했다.
미국장애시민연대의 막후 추진동력이었던 피오리토는, 자신이 전국을 돌며 전국 규모의 장애인 연대체를 조직하는 일을 빔 시장이 지원한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시각장애인이어서 시장의 장애 감수성에 다소 영향을 준 것 같다. 하지만 빔 시장은 내가 뉴욕시 자원을 미국장애시민연대를 결성하는데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내가 하는 일은 뉴욕시 장애인들만을 위한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뉴욕시 업무와 관련된 자원을 미국장애시민연대 활동에도 사용했다. 피오리토는 뉴욕시장 직속 장애인위원회 직원으로 일하면서 조직화 능력을 연마했다. 위원 중 한 사람인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지원에 힘입어, 1971년 그녀는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뉴욕시청에 장애인 담당부서를 설치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또 시장의 지시에 따라 이런 부서를 설립하는 게 가능한지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장애운동가 20명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이와 별도로 그녀는 200명이 넘는 장애운동가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회의에 참석했다. 군중과 기자들에 둘러싸여 회의장에 도착한 시장은 그 자리에서 부서 신설을 공표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장애시민연대의 일관된 원칙은 대표, 사무총장, 운영위원을 유형이 다른 장애인들이 맡는다는 것이었다. 피오리토는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으로 사는 것도 문제없다, 이것은 모든 유형의 장애인들이 공감하는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똑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가난한 장애인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다. 장애인들은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정치적으로 자기-존중감과 자기애를 가져야 한다.”
미국장애시민연대의 소재지가 워싱턴D.C.에 있어서 이점이 많았다. 가령, 대외협력 활동가들이 의원, 보좌관, 정부 관료들과 협의를 할 기회가 많았고, 보건교육복지부 장관 칼라파노의 보좌관 피터 리바시 등 카터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워싱턴의 정ㆍ관계 인사들이 장애인 공동체의 결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1977년 4월 28일 칼라파노가 504조 시행령에 서명하기로 최종 결정했을 당시 리바시는 아침 6시45분에 피오리토에게 전화를 걸어 칼라파노의 보도자료에 찬성하는지 문의했다.
대통령 후보 카터가 선거유세 도중 장애인 공동체의 염원을 지원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미국장애시민연대 간부들은 전임 공화당 행정부보다 새로 들어선 민주당 행정부에 거는 기대가 더 컸다. 504조 시행령을 신속하게 제정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미국장애시민연대 회원 십 여 명은 카터 대통령이 취임한 지 이틀 뒤에 칼라포노와 그의 참모들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약 두 달 뒤인 1977년 3월 18일, 미국장애시민연대 사무총장 프랭크 보우는 정부가 미적거려서 실망스럽다고 카터와 칼라파노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504조 시행령이 1977년 4월 4일까지 제정되지 않을 경우 미국장애시민연대는 행동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는 경고도 들어 있었다.

504조 투쟁

 장애인 공동체 지도자들과 칼라파노의 최종 담판이 실패로 돌아갔다. 칼라파노는 504조 시행령을 검토할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장애인 지도자들은 칼라파노가 시간을 끌며 시행령 원안을 약화시키거나 기피하려는 건 아닌지 우려했다. 그래서 1977년 4월 5일, 장애운동가들은 워싱턴D.C.뿐만 아니라 보건교육복지부 지방사무소가 있는 지역 10곳에서 동시다발로 농성에 돌입했다. 워싱턴D.C. 점거농성과, 특히 샌프란시스코 점거농성의 극적인 순간들은 꼼꼼하게 기록되었다. - 가령, 조지프 샤피로의《동정은 싫다 No Pity》. 칼라파노가 음식과 전화를 차단했지만 워싱턴D.C 시위대 40명은 28시간 동안 농성을 풀지 않았다. 피오리토는 “하나둘씩 빠져나가서 결국 아무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작은 무리로 남아 있는 것보다” 칼라파노가 점거농성에 무감각하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극적인 시점에 집단으로 퇴장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모든 농성이 나름의 가치가 있었겠지만, 장애인 공동체의 불굴의 의지가 확실히 보여준 곳은 샌프란시스코였다.
샌프란시스코 점거농성 일수가 늘어나면서, 전국의 장애운동가들은 날로 더해가는 놀라움과 자부심 속에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들은 날마다 “아직도 그곳에 있다!”며 탄성을 질렀다. 여러 장애 유형을 대표하는 120명이 넘는 농성 참가자들 가운데 거의 절반이 25일 동안 버텼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긴 연방 건물 점거농성이었다. 감내해야할 고통이 컸다. 특히 중증 장애인 농성자들은 필수 보장구와 활동보조인이 없이도 견뎌낼 용기가 있었지만, 그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시위대는 잘 조직되어 있었고 지지층도 넓었다. 시위대 가운데 상당수가 버클리자립생활센터의 유급 활동가이거나 이용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미 공동체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일터에서 쫓겨날 염려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도시의 시위 참여자들은 여러 직장에 분산되어 취업해 있었던 까닭에 장기간 결근하기가 어려웠다.
농성이 길어지면서 맥도널드, 캘리포니아주 보건서비스부, 델런시 하우스 등 여러 곳에서 음식, 매트리스, 샤워 장비 따위를 보내주었다. 연방 하원의원 필립 버튼, 샌프란시스코 시장 조지 모스콘, 캘리포니아주 재활국장 에드 로버츠 같은 정관계 인사들도 격려와 지지를 보냈다. 샌프란시스코 점거농성의 주역이자 나중에 연방 교육부 차관보가 된 주디스 휴먼은 1978년 사건을 이렇게 분석했다.

캘리포니아주 504조 투쟁은 여러 이유에서 성공적이었다. 장애인 공동체가 단결하였고, 504조는 우리 장애인들의 시민권 조항이라는 점을 장애인 공동체가 절대적이고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우리가 시민권 조항을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보하기는커녕 사실상 퇴행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우리 지역에는 장애인 당사자들이 통제하는 프로그램들이 있고, 지역이 변화(가령, 연석 경사로, 전동휠체어, 접근 가능한 베이 에어리어 대중교통 등)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역사회에서 더욱 가시적인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외부로 눈을 돌려 다른 단체들 속으로 들어갔다. 뇌성마비연합부활절실 같은 단체들과 접촉했더니, 놀랍게도 그들도 우리한테 다가와서 우린 함께 일하게 되었다. 우리는 기독교회와 유대교회, 그리고 노조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지원을 받았다. 블랙팬더는 점거농성 4주 동안 음식물을 제공해 주었다. 세이프웨이도 음식물을 공급해 주었다. 이는 아주 드문 사건이었다. 정말이지 그랬다. 함께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사람들이 4주 동안 건물의 한 층에서 함께 부대꼈다.


 버클리자립생활센터의 장애 정치(disability politics)와 조직방식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탓에, 뉴욕시 장애인 공동체는 맨해튼에 있는 보건교육복지부 뉴욕시 사무소 건물 점거농성에 직접 참가한 여덟 사람을 대표로 뽑았다. 장애운동가 약50명이 건물 바깥에서 비를 맞아가며 지원 농성을 했지만, 뉴욕시 장애인단체들은 점거농성에 참가한 사람들만 지도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주와 워싱턴D.C. 이외 지역에서는 장애인 유형간 연대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뉴욕시의 장애인 대표단은 이동성 손상자들(mobility impaired)뿐이었다. 보건교육복지부 뉴욕시 사무소장은 전술을 재고해 달라며 애써 시위대를 설득하려 했지만, 이 불청객들에게 흔쾌히 사무실 한 칸을 내어주고 마음껏 왕래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음식 등 생필품 반입도 허용하였다.
시위대는 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 방송사와 접촉을 할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어느 농성자는 NBC 기자 펠리페 루시아노가 기자가 되기 전에 그의 개인 교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인연을 기회삼아 루시아노가 점거농성 사건을 보도하도록 설득하였다. 루시아노는 영 로드(Young Lords) -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진보적인 라틴계 청년 단체 - 간부였던 까닭에 시민권 이슈에 민감했고, 실제로 그 사건을 보도했다. 다른 기자들은 주로 농성자들의 장애에 관심을 가졌지만, 루시아노는 농성자들의 분위기와 그들의 주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농성자들 각자가 직장과 가정에서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점거농성 지도부는 투표를 통해 33시간 뒤에 전원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보건교육복지부 직원들은 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위대를 오판했다. 뉴욕시 사무소는 간호사 한 명을 배치하여 농성자들과 함께 밤을 새도록 했다. 샌프란시스코 사무소는 농서 첫날에 관료들이 농성자들에게 쿠키와 음료수를 갖다 주었다. 장애인들을 돌봄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농성자들은 장애를 가졌지만 모두 성인들이었는데, 보건교육복지부 직원들은 이들을 사리판단 능력이 없는 “의료모형”에 속한 사람들인 양 또는 달래야 할 응석받이 어린 아이들인 양 간주했다. 칼라파노와 직원들은 샌프란시스코 점거농성이 25일 동안이나 계속되는 것을 보고 농성자들의 열정, 끈기, 저력에 깜짝 놀랐다. 이런 일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1977년 4월 28일, 칼라파노는 504조 시행령 원안뿐만 아니라 장애어린이교육법 시행령에도 서명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위대는 서명된 504조 시행령을 꼼꼼히 살펴보고 원안에서 후퇴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1977년 4월 30일에야 농성을 풀었다.
504조 시행령 투쟁에 성공하면서 장애인 공동체는 자신의 힘을 발견하였다. 장애운동가들은 1960년대 시민권운동으로부터 소극적 저항(passive resistance) 전략을 빌려왔는데, 이는 물리적 폭력보다는 생색내기와 적대감에 맞서 싸워야 하는 장애운동에 도움이 되었다. 1930년대 신체장애인연맹 투쟁과 비교하면, 504조 투쟁은 정치적으로 고양되어 있던 당시의 사회적 의식을 흡수하였고, 그 결과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신체장애인연맹이 주도한 초기 투쟁 때와 달리 미국장애시민연대가 연출한 전국 규모의 504조 투쟁은 더 많은 투쟁을 촉발시키는 시발점이었을 뿐이다.
1978년 호프스트라대학교 프랭크 보우 교수 - 당시는 미국장애시민연대 사무총장이었다 - 는 이렇게 되물었다. “왜 그런 일〔504조 시행령의 제정〕일어났을까요?”

나는 오랫동안 이런 질문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런 일이 일어난 데는 많은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1977년 이후 흑인 시민권 운동에 관한 책을 틈틈이 읽었는데, 마침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참모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혁명이 불의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가 않다. 혁명은 희망에서 시작된다.” 여러분이 그 때 일을 생각한다면, 즉 1977년 봄을 되돌아보면, 장애인들이 그 해 봄에 그랬듯이 똘똘 뭉쳐 시위를 한 까닭은 그들이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장애인들이 저항할만한 충분한 희망을 가졌던 때가 바로 1977년이었다는 것은 미합중국에서는 실로 비극적인 일이다. 장애인들이 희망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이 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이나 걸렸다는 말이다. 이것이 그 때 일어난 일의 실체다. 1973년에 재활법 수정안이 통과되었고, 그 안에 포함된 504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미국 장애인 시민권의 이정표가 되었다. ... 4년 동안 우리는 그 법률이 시행되고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 물밑에서 투쟁했다. 그리고 1977년 초 우리는 그 법률이 적어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품을만한 몇 가지 이유를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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