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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포유 : 시네라리아를 찾아서-2


어느 중년 축구키드의 리더쉽 이야기 이범재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


1. 소년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한다리를 앞뒤로 흔들어 반동력을 키운 다음, 바람이 빠져 약간 찌그러진 공을 힘껏 차 올렸다. 공은 대굴거리며 소년이 골대로 지정해 놓은 두 개의 굴뚝 사이로 굴러 들어 갔다.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쪽 하늘에서부터 먹구름이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비가 오면 안되는데...’

2. 옛날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차령산맥과 노령산맥 사이의 이 분지 소읍은 일 년에 한번 8.15를 맞이하여 들썩이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조그만 산간 읍내에서는 일 년에 한번 마을 대항 축구대회가 매년 8월 15일에 개최되고는 한다.

이 때면 타지로 나갔던 젊은이들이 휴가삼아 고향 마을로 돌아오고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운동장은 삼삼오오 연습을 하는 젊은이들로 술렁댄다. 읍내에 있는 마을들은 동별로 팀을 이루고 인근의 마을들은 리 단위로 팀을 이루어서 경합을 한다. 여기에 이 조그마한 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초등학교 졸업생들의 기수별 시합이 덧붙여진다. 초등학교 기수별 시합도 박진감이 넘치지만 역시 백미는 부락대항전이다.

소년이 살고 있는 중동은 동네이름처럼 읍내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상가들, 읍사무소며 파출소며 몇 되지 않는 관청들도 여기에 있다. 중동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점잖은 사람들이고 또 중동이 읍내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초등학교가 중동에 자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부를 잘해서 대처의 일류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중동에서 많이 배출되었기에 자부심이 강하다. 그러나 오늘은 축구를 하는 날이다. 중동은 항상 우승전력이라고 평가받지만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신동은 말처럼 이 조그마한 읍내가 확장하면서 형성된 동네다. 여기에 농협과 그 공판장이 들어서면서 상업의 주도권이 중동의 오랜 가게들로부터 옮겨가고 있다. 그 동네에는 젊은이들이 많고 활기차다. 뭔가 허술한 듯하면서도 신동은 몇 년째 8.15 대항전의 최종승자가 되었다.

이 대항전은 이 읍내 커뮤니티의 중심인 초등학교의 졸업생들 중 그해 대학 입합생이 되는 기수가 주체가 되어 진행한다. 소년의 몇 년 위 졸업생들은 벌써 동네의 유지들과 가게들을 돌며 성금을 모았고 보조경기장인 초등학교의 약간 작은 운동장과 주 경기장인 중학교 운동장에는 대회 운영본부를 상징하는 하얀 천막들이 자리를 잡고 서있다. 동네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젊은이들로 북적대고 양 쪽 운동장에는 막바지 전술을 시험하는 각 팀들의 연습이 한창이다.

‘신동팀의 스피드를 잡아야 하는데..’

3. 소년은 축구가 너무나 좋았다. 1960년대를 휩쓴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두 다리를 잃었지만 소년의 꿈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몇해전인가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을 업고 TV가 있는 친구집에 가서 한국팀과 호주팀이 홈앤드어웨이에서 비겨 결국 홍콩에서 열게 된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 최종전을 보여주었다. 차범근 선수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1:0으로 패하면서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다.(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소년의 머릿속에는 그 시합의 모든 중요한 장면들이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었다. 마지막 한국 골키퍼의 손 끝을 넘어 골이 들어가는 순간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되었다.

 가끔 도회지에 유학하는 형들이 사다준 축구관련 잡지들은 소년의 축구에 대한 탐구심을 채워주었다.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골로 자주 언급되던 펠레의 스웨덴 월드컵 결승전 골 장면을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소년의 머리 속에는 ‘공을 툭 차올려 수비수 한명의 머리 위로 제친 다음 그 공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발리 슛을 쏘는’ 펠레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졌다.(커서 기록화면으로 이 장면을 보았는데 큰 틀은 내 상상과 어긋나지 않았지만 펠레가 너무나 어리고 왜소해서 깜짝 놀랐다.)

 그런 지식들로 소년은 또래의 축구팀에서는 항상 감독의 역할을 했다. 소년의 지휘대로 선수가 구성되었고 팀은 보통 좋은 성적을 올렸다. 소년은 빠른 선수들을 공격수로 배치했고 덩치가 좋거나 기술이 좋은 선수들을 수비에 배치했다. 실제로 게임이 시작되면 소년의 게임플랜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렇게 했다.

 중동팀 전력의 핵심은 안선배다. 그는 초등학교때부터 아주 유명한 선수였다. 시골출신으로는 신장과 체격이 준수했고 비교적 기술도 좋았다. 소문에 그는 초등학교 축구부를 위해서 한해를 꿀어서 중학교에 진학했다고 알려져 있고 대처의 고등학교 축구팀을 거쳐서 대학에서도 축구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나중에 안선배는 실업인 은행팀의 축구선수를 거쳐 대표 2진에까지 뽑혔다.)

 그는 수비의 중심이고 시골선수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강력한 장거리 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번 수비진영으로 내려온 공을 다시 공격진영까지 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시골축구에서 그의 장거리 킥력은 가공할 무기가 되었다. 그는 단숨에 공을 상대편의 골문까지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년의 작은형이 있다. 작은형은 비록 아버지의 반대로 축구선수를 하지 못했지만 초등학교까지는 알아주는 선수였다. 체격이 작지만 빠르고 영리한 작은형은 중동팀 공격의 핵심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시골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서울대에 진학한 큰 형에 비해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작은형이었지만 소년은 작은형이 좋았다. 또 오늘은 항상 후보로 비실거리는 큰형이 아니라 작은형이 큰 소리를 치는 축구를 하는 날이다.

 소년은 머리 속으로 수십번도 더 그려 보았다. 작은형이 스피드를 이용해서 결정적인 골을 성공시켜 신동을 꺽고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장면을...

4. 이제 내 나이가 오십이 되었다. 내 어린 시절로부터 30여 년만에 세상은 너무도 변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축구를 이제는 일 년 내내 볼 수 있다. 국내의 프로리그나 대표팀의 경기만이 아니라 월드컵은 물론이요 유럽의 프로리그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나는 아직도 축구가 좋다. 야구도 복잡하고 세련된 게임이지만 나에게 최고의 스포츠는 축구다. 축구는 잘하기가 아주 어려운 게임이다. 야구가 어쩌면 상당히 디지탈적인 스포츠라면 축구는 본원적으로 아날로그적이다. 야구가 어떤 상황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종의 ‘reset’ 환경의 스포츠라면 축구는 거의 동일한 상황이 없어 정형화되기 어려운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평범한 수준의 게임은 야구가 훨씬 매력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경기를 말한다면 나는 야구보다는 축구가 더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이제 축구는 소위 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에 세계적인 스포츠가 되었다. 내가 알기로 영국의 프리미어 축구는 전세계적으로 소비되고 있는데 단순히 게임을 보는 것에서 일종의 도박의 대상으로까지 확대되었으니 그 시장 규모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영국의 프리미어리그가 세계적인 리그로 성장하면서 대규모의 자금이 몰려 들고 있다. 대부분의 구단들이 외국계 자본에 매각되기도 했다. 아마도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비즈니스이기 때문일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프리미어 축구가 마치 미국의 헐리우드와 같은 문화적 파급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시장의 힘으로 영국의 프리미어리그는 전세계에서 선수들을 사들이고 있다. 우리 박지성 선수가 속해 있는 맨체스터유나이티드 팀의 일 년 매출은 수천억원에 달하고 하나의 거대한 비즈니스가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유명한 팀의 감독들은 단순한 스포츠 감독을 넘어서 거대한 사업체, 조직체의 리더가 되고 있다.

 나는 영국의 프로축구팀 가운데 아스날을 좋아한다. 아스날의 벵거 감독은 이 팀을 약 15년째 운영하면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팀은 영국 프로축구계에서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항상 어린 선수들을 스카웃하고 아주 유명한 소위 빅네임 선수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또 경기에서는 상당히 기술적이고 세련된 패싱게임을 추구한다. 때문에 구단은 재정적으로 건전하고 게임은 나름의 품격을 유지한다. 신흥 부자들이 인수해서 돈을 쏟아 붓는 구단들이 온통 유명선수들을 영입해 벌이는 일종의 갈라쇼와는 다른 아름다움을 준다. 그런데 이 팀은 벌써 몇 년째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성공 사례로 퍼거슨의 맨유를 들 수 있다. 퍼거슨은 20년 넘게 맨유를 책임지고 있는데 이 기간 동안 리그 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이끌었다. 아마도 세계축구에서 이 기간 동안 맨유의 성공과 비견할 수 있는 팀이 있다면 최근 새로운 성공 모델을 구축한 바르셀로나 정도일 것이다. 맨유는 아스날에 비해서는 빅네임을 영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적료 신기록을 새우며 온통 유명선수들을 스카웃해서 바람을 일으키는 팀들하고는 다르다. 맨유는 최정상의 팀 치고는 유명선수가 적고 주전들의 연령도 그리 높지 않다.

 나는 재미삼아 축구성적을 포함하는 두 감독의 리더쉽 스타일을 비교해 보곤 한다.

<이상주의 vs 현실주의>

 아스날 축구는 뭐라고 명명하기가 쉽다. 실제로도 기술축구, 패싱축구 등등으로 명명된다. 벵거는 자신의 축구철학을 실전에서 구현하기를 즐겨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축구철학을 받아들이는 선수를 선호한다. 패싱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체력이나 체격보다는 기술력을 중시한다. 때문에 아스날의 축구는 보기에 좋고 골을 넣는 순간들도 멋이 있다. 반대로 쉽게 실점을 허용하는데 특히 세트피스 상황에서 실점이 많다. 이는 선수들의 체력이나 체격과도 관계가 많다.

 반면에 맨유의 축구는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퍼거슨은 아마추어인 내가 보기에는 딱히 무엇을 고집한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선수들을 보더라도 패싱도 잘 하지만 체격이나 체력에서도 밀리지 않는 선수들이 많다. 투쟁심이 강하고 짧은 패스와 긴패스를 적절히 활용하고 육박전도 그리 마다하지 않는다. 위기가 와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버텨낸다.

<끼워맞추기 vs 맞춰세우기>

 앙리와 함께 했던 아스날의 전성기 이후로 벵거는 팀을 대대적으로 물갈이 했다. 대부분의 노장 선수들은 팀을 떠났고 완전히 새로운 어린 선수들로 팀을 재구성 했다. 이 과정에서 그 동안 팀에 힘과 안정감을 주던 선수들은 다 팀을 떠났다. 중원의 비에이라, 수비의 숄캠벨 갈라스 등이 팀을 떠났다. 이들은 정교함은 조금 떨어지지만 체격과 체력으로 팀에 힘을 불어 넣는 존재들이었다. 이후로 아스날은 더 기술적인 선수들로 채워졌지만 더 작은 선수들로 이루어져 ‘꼬꼬마’ 들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퍼거슨이 현실적이라 해서 변화를 두려워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소위 퍼거슨의 두 번째 황금기 동안을 같이 했던 반니스텔루이, 스콜스, 긱스 등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팀의 변화가 필요했던 시기에 퍼거슨은 과감히 변화를 추구했다. 그것도 당시 타겟형 스트라이커로 전성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되었던 반니스텔루이를 버린 것은 퍼거슨이 만만치 않은 결단형 인물임을 드러낸다. 득점왕을 쉽게 차지하던 선수를 버리고 새로운 공격스타일을 추구한다는 것은 웬만한 결단력으로는 결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적인 반니스텔루이를 버리고 루니와 호나우두로 대표되는 역동적인 공격 패턴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스콜스와 긱스 같은 나이 많은 선수들을 중용하면서 변화와 함께 안정을 동시에 선택하였다.

<변신하여 일체화하기 vs 연대하여 구성하기>

 아스날의 벵거는 자신의 리더쉽으로 팀 전체가 일체화되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보기에 팀 전체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팀의 축구철학이 선수들 개개인에게까지 철저히 관철되어야 한다. 선수들은 스스로를 변화시켜 팀의 전술에 녹아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다른 철학에 물들었던 선수들은 그 과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축구 철학에 맞는 선수거나 아니면 어린 선수들을 선발해서 자신의 이념에 따라 교육하고 훈련해서 하나의 완성된 팀으로 만들어 간다. 그의 팀은 점점 어린 선수들,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로 채워진다.

 퍼거슨 역시 자신이 구축하고자 하는 팀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선수들을 적절히 내 보냈다. 그러나 그는 비교적 다양한 선수들로 그 빈 자리를 보충해 왔다. 기술력이나 스피드가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많이 뛰고 궂은 일을 해내는 박지성 선수, 왕성한 활동력으로 중원에 역동성과 힘을 불어 넣는 대런 플레처, 기술과 스피드도 좋지만 힘도 좋은 발렌시아 같은 선수, 타겟형 스트라이커에 가깝지만 훨씬 기술적이고 예리한 베르바토프 같은 선수들을 스카웃했다. 또한 이들은 이미 적지 않은 나이로 일종의 자기 완성에 돌입한 상태에서 스카웃이 되었다. 때문에 이 팀의 색깔이 무엇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이팀은 다양한 전술을 선보이고 여러 종류의 위기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선수들은 팀의 일체성을 위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각기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팀에 기여한다.

 우리의 인생이나 또 비즈니스가 그렇듯이 축구도 가상의, 이상적인 공간에서 벌이는 싸움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연과 예측불가능성, 심리적 요인들이 작동한다. 기술과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가 항상 체격이 크고 느린 선수를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육체적 접촉과 투쟁이 중요한 축구경기에서는 더욱 그렇다. 2010-2011년 프리미어리그의 중후반 맨유와 선두를 다투던 아스날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앞서던 뉴캐슬과의 어웨이 경기를 상대의 거친 파울에 흥분한 어린 선수의 보복행위로 인한 퇴장으로 잃어버린 이후 우승 경쟁에서 멀어졌다. 원인이야 물론 비열한 상대선수의 파울과 이를 심판하지 못하는 심판의 무능(?)에 있지만 그것이 축구고 또 실제의 세계가 운영되는 현실이다.

 나는 가끔 벵거의 리더쉽을 고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쉽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고는 한다. 고 노무현대통령의 이상주의, 일관성에 대한 고심, 젊은 참모들은 벵거의 그것과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내가 아스날의 축구를 보면서 항상 애잔해 하듯이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상과 비극적 운명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어쩌면 역사는 그런 대통령을 더 오래도록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나는 아스날의 축구가 이상을 추구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현실의 세계에서 그 이상을 실현해 내기를, 승리하기를 기대한다. 이상 그 자체의 완전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비록 일부는 빛이 바래고 제한적일지라도 현실의 세계에서 이상이 실현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치 고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현실의 세계에서 우리의 꿈이 일부라도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5. 시합이 열리는 15, 16일 양일간 먹구름이 잔뜩 끼고 습기로 공기는 끕끕해 졌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소년은 이틀 내내 점심도 잊은 채 이 시합 저 시합을 기웃거렸다. 인근 리 단위 마을들은 우직함과 투박한 힘을 보여 주었지만 결국은 준결승 근처에는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리 단위 팀들의 경기가 더 많은 우연과 실수들로 인해 더 재미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소년의 눈에는 읍내 동 단위 팀들의 세련된 수준에는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동 팀은 예의 팀웍크와 차분한 경기 운영, 그리고 안선배의 활약으로 결승전에 진출했고 역시 상대는 신동팀이었다. 초등학교 기수대항전 결승전이 끝난 후 부락대항전의 결승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모든 선수들과 응원하는 사람들이 메인 경기장인 중학교 운동장에 집결해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미 탈락이 확정된 선수들과 동네사람들이 어울려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고 한 켠에서는 곧 있을 최후의 일전에 대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중앙에 자리잡은 본부석에는 이 읍내의 유지들과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도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소년은 차마 그 천막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늘이 잔뜩 낀 구름과 넘어가는 여름 해로 어두어지고 멀리서 천둥이 치던 전반 내내 양팀의 공방은 계속되었지만 어느 팀도 득점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후반이 시작될 즈음, 이틀을 버티던 하늘이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버티고 버티던 뒤끝이라 그랬는지 비는 순식간에 폭우로 돌변해서 폭포처럼 빗물을 운동장에 뿌리고 멀리서 울던 천둥은 뻔쩍이는 번개를 따라 들이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로 흩어지고 시합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시합에 집중하지 않고 삽시간에 운동장은 흙탕물 천지가 되었다. 그 때 마침 본부석에 설치된 간이 엠프에 번개가 내리치자 마이크도 꺼져 버렸고 천막 안에는 진행주체도 손님들도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중전의 와중에서 젊고 체력이 강한 신동팀이 중동팀의 문전 혼전 상황을 이용해 어그적 거리며 결승골을 넣고 말았다.

 축제는 끝났다. 시합은 졌고 온통 생쥐처럼 젖어버린 목발 짚은 소년은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 선수들이 총총히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비 때문에 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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