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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소통 Summer! 장애인의 열정


여름→여름↘여↗름↘아아아- 여.름.이.다. 박현희 (장애여성네트워크활동가)


난 여름이 싫다.

훤히 드러나게 장착한 보조기를 사람들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도 싫고 보조기 아래로 흐르는 땀도 싫다. 맨 다리에 치마를 입고 스쿠터에 앉은 채 지하철을 탔을 경우 옆에 서서 허벅지를 내려다보는 아저씨들도 싫다. 혈액순환이 잘 안되는 다리의 혈색도 싫다. 그 다리를 보고 혀를 끌끌차며 에휴~로 시작하는 말을 거는 아줌마들은 더 싫다. 햇볕에 피부가 타서 얼굴이 촌스러워지는 것도 싫다.

생각해보면 여름은 정말 내가 싫어하는 것 투성이다.

그런데 그런 여름을 주제로 글을 쓰겠다고 덥썩 물고 나니 이건 정말 내가 무슨 짓을 한건가 싶다. “섹시한 글이면 좋겠어요”라는 이 말에 꽂혀서는 앞뒤 안재고 수락한 것 같은 느낌. 하지만 할 수 있어! 난 섹시한 글을 청탁받은 장애여성이라고!

여름하면 휴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 난 휴가를 간 적이 있느냐하면 개인단위로는 간 적이 없고 퇴원 후 잠깐 시설에 있을때 해수욕장에 단체로 간 적이 있다. 바퀴가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에서 수동휠체어를 혼자 밀 수 있을리 만무해서 자원봉사자가 케어했다. 하지만 모래사장에서 사람이 탄 휠체어를 민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중에 검은색 고무튜브를 타고 바다에 들어갔는데 파도에 흔들리는 것이 너무 공포스러워서 10분도 못 버티고 해변으로 나왔다. 허리로 중심을 꽉 잡고 있어야하는데 힘이 없으니 내 몸이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자원봉사자가 날 꽉 붙잡고 있었어도. 그 뒤론 여름휴가에 대해 별 생각을 안했다.

집에서 시~원하게 에어컨 틀고 쭈쭈바 빨면서 좋아하는 호러영화나 잔뜩 본다. 사지절단은 기본이고, 내장을 꺼내 목에 감는 좀비영화나 슬래셔영화 등. 어차피 다 현실이 아니니깐 즐기면서 본다. 아니아니지, 거기서 그렇게 단칼에 죽이면 재미가 없지! 고문을 해야지! 하면서.

여름은 노출의 계절. 장애여성이라고 노출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여름에 끈으로 된 슬리브리스 옷을 입으면 마치 상의를 입지 않고 보조기만 한 것 처럼 보인다. 난 뭐 신경쓰지 않아, 라고 생각하고 입고 나왔는데 막상 그걸 누가 지적하니까 간이 오그라들었다. 꼭 윗옷 입지 않은 것 같아, 라고 상대방이 지적하니 “더워서요...”라고 밖에 대답을 못했다. 실제로 많은 장애여성들이 스스로의 혹은 타인의 검열로 원하는 옷을 입지 못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우리에겐 검열의 잣대가 이중, 삼중으로 되는 것일까?

일단 성범죄를 예로 드는데 그럼 비장애여성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하지만 장애여성과 비장애여성이 똑같이 노출척도2의 옷을 입었을 땐(5가 최고노출) 사람들 반응이 다르다.

비장애여성에겐 ‘어머, 섹시하다-’라는 감탄사가, 장애여성에겐 ‘생각 좀 하고 입지’라는 질책이 돌아온다. 왜 그럴까? 그건 사람들이 우릴 여성으로 보기를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장애여성이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여성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온전히 드러내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여성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럼 여성성을 발견했을때 그걸 인정하면 편해지는데 곧 죽어도 그건 싫어한다. 왜냐구? 그럼 본인들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잘났어들, 진짜.

글 쓰다가 생각났는데 장애남성이 슬리브리스 셔츠 입은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다. 러닝셔츠 스타일의 상의였는데 뭐랄까, 검게 그을린 피부와 어우러져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꼭 저렇게 입었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니 뇌병변 장애남성이라 더위를 많이 타서 그에게 있어 가장 기능적인 옷차림이었을 듯 하다.

근육질의 비장애남성이 그렇게 입었었다면 아예 벗고 다니지, 이렇게 생각했을 텐데. 나부터 이렇게 요상한 잣대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들이대면서 비장애인들에게 니들 잘났어, 라고 빈정대는 꼴이 조금은 우습네. 그래도 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성찰했으니까 좀 낫겠지?

갑자기 여름이 좋은 이유가 하나 생각났다.

그건 애인과의 데이트가 뜸해지기 때문이다. 이건 뭐? 일단 장마철엔 내가 힘드니까 데이트가 뜸해진다. 장마가 끝나고 한여름이 오면 애인이 더위를 너무 많이 타서 데이트가 뜸해진다. 한달 반 정도 2,3주에 한번 꼴로 만나는게 뭐가 좋냐구? 여름이면 체력이 급격이 저하되는데 이럴땐 꼭 필요한 일 아니면 에너지를 쓰지 않는게 좋다. 안 그러면 병난다.

만약 애인이 더위도 안타서 계속 만나자고 보챌 때 힘들어요, 라고 대꾸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몇 주나 그런다면 조금 미안하니까. 내가 애인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서 여름이 좋다. 이렇게 쓰고 나니 내가 굉장히 나쁜 연인 같다. 그런데 뭐, 애인은 이 글 볼 확률이 낮으니까. 푸훗.

이제 이 뜨거운 계절을 앞두고 준비해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적어본다. 땀띠분, 썬블럭화장품, 양산(전동에 양산은 정말 필수), 짧은 치마를 입기 위한 속바지, 강렬한 색깔의 패디큐어, 잘 정비된 우비, 조금은 섹시한 느낌이 나는 슬리브리스 셔츠, 챙이 넓은 휴양지모자. 챙이 넓은 휴양지모자는 동생이 제발 쓰지 말라고 창피하다고 하는데, 양산조차 들 기운 없을 땐 좋은 아이템이다. 맘 같아선 여성들이 운전할 때 많이 쓰는 썬캡을 쓰고 싶은데 참는다. 난 아직 삼십대 초반(액면가는 20대)의 여성이니깐.

사실 휴양지모자를 쓰면 바캉스를 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기도 하다. 위에는 집에서 에어컨 틀고 공포영화 보는 것이 최고라하고선 휴양지모자 쓰면 바캉스 가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니!

이렇게 상반된 감정을 가지게 하는 여름. 내가 상반된 감정을 가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여름은 변덕스러운 계절이고 그 변덕스러움에 인간도 곧잘 변덕스러워지기 마련이니깐. 장애인도 변덕스러게 만드는 계절 여름. 푸른 바다와 시원한 산으로 휴가를 떠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가면 몸만 힘들고 즐길 곳 하나 없어라며 집에 있고 싶기도 한 계절. 하지만 어쨌든 장애인에게도 여름의 피난처는 필요하다.

그게 사랑이든, 일이든, 노출이든 자신의 피난처를 찾아서 여름에 지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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