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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삼호의장애학 미국장애운동사 : 제3장 탈시설과 자립생활


제3장 탈시설과 자립생활 번역 : 윤삼호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소장)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의 탈시설화의 흐름 덕분에 중증 신체장애인들은 주류 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는데, 이 새로운 장애인 집단은 점차 고조되는 장애권운동에 뛰어들었다. 신체손상이 심한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욕구에 전혀 맞지 않은 물리적 환경에 대처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그래서 많은 장애인들이 차별과 편견에 맞서 행동에 나선 것이다.

탈시설화

 초창기 탈시설화 실험은 장기 입원 시설인 뉴욕시골드워터메모리얼병원에서 진행되었다. 이곳 환자들은 죽을 때까지 입원해 있어야 할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병원 간부들은 주로 운동신경 손상자들인 입원 환자들이 주류 사회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1958년에 21살 된 전신마비인 휠체어 사용자인 앤 에머맨은 시설 거주 장애인들을 위한 독립생활 시범 대상자에 선정되었다. 에머맨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갈 기회를 달라고 하자, 어느 사회복지사는 “그런 생각은 환상이야. 환상에 사로잡히면 정신병에 걸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에머맨은 대학을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사회복지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녀는 벨뷰병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다가 1990년에 뉴욕시장 직속 장애인담당관이 되었다.
매릴린 살비올라 역시 전신마비 훨체어 사용자였는데, 그녀는 10대 후반 나이에 골드워터에서 청년 전용 병동을 조직했다.

[전에는] 청년이 임종을 앞둔 80대 노인 바로 옆 침대에 있었다. “이곳은 이 세상이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내다버리는 곳이었다”고 살비올라가 말했다. 그녀를 비롯한 청년들이 1960년대 사회운동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만의 병동을 요구했다. “우리는 그런 병동을 쟁취하기 위해 처절하게 투쟁했다”고 허미너 잭슨이 말했다. 그 역시 전신마비인이었으며, 나중에 골드워터를 나와 장애권운동 활동가가 되었다.


 청년 병동은 장기 입원 시설이라기보다 대학교 기숙사에 더 가까웠다. 벽은 밝은 색으로 칠했고, “스테레오를 갖춘 휴게실, 거주자들이 직접 요리를 하거나 브로드웨이 쇼를 구경가기 위해 모의를 할 수 있는 주방”이 딸려 있었다. 병동 직원들은 젊은 거주들과 동고동락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로 선별되었기에 굳이 제복을 입지 않았고, 선출된 거주자위원들은 병동의 권익을 대변했다. 인공호흡장치를 달고 있는 거주자들이 많았음에도 병동의 분위기는 1960년대 남녀공학학교 같았다. “연애”는 물론 “록 음악, 심야 토론, 음주와 흡연을 즐렸다.” 그 병동 간호사였던 데리 듀리에는 “죽으러 들어온 자들이 갑자기 생명을 되찾았다”고 했다.

 사비올라는 1965년에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설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전히 골드워터에서 거주했지만 낮에는 시설 밖으로 나와 학교를 다녔다. 이런 일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뉴욕주 장애인고용및교육서비스청은 노동 능력이 없다는 구실을 대면서 사비올라의 대학 학자금 지원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제비츠 상원의원한테 도움을 요청하니까 그는 나를 위해 중재에 나섰다. 그러자 고용및교육서비스청이 임시적 조치라며 한 학기 등록금을 주었다. 그 뒤 나는 롱아일랜드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뉴욕대학교에서 재활상담 석사학위를 받고나서 어떻게 독립생활을 할까 궁리했다. 일단 1973년에 아파트를 빌렸다. 그랬더니 메디케이드가 24시간 활동보조인, 자동차와 운전사를 지원해 줘 골드워터에서 재활상담사로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디케이드의 지원을 계속 받기 위해 최저생활 수준으로 살아야 했다.


 사비올라는 1983년에 뉴욕주 최초의 독립생활센터인 뉴욕주 장애인독립센터 소장이 되었다.
1973년 재활법이 개정되면서 독립생활을 하는 장애인들한테도 혜택을 주는 새로운 연방 정책이 반영되었다. 탈시설화 정책이 진전되면서 재활서비스라는 포괄적인 개념은 고용보다 자기주도성(self-direction)에 초점을 맞추었다. 수많은 중증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거주하다가 이제 지역사회에서 생활하지만, 이들은 보조인 지원이 끊기면 다시 시설로 들어가야 한다는 공포 속에서 살았다.

 197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에 살던 린 톰슨은 근이양증으로 옴짝달싹도 못했지만 메디케이드 규정에 따르면 장애인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서 앤서링 서비스(answering service)를 운영하여 한 달에 250달러 이상 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소득 보조비, 건강보험, 활동보조인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시설로 내몰릴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톰슨은 천신만고 끝에 얻은 독립생활을 빼앗길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는 1978년 2월에 자살하고 말았다. 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이 되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한 여성이 케케묵은 규정들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같은 해 9월 CBS의 시사고발 프로그램 <60분>은 미국 전역의 관심사가 된 이 비극적인 사건을 방영했다. 그 무렵 캘리포니아주에는 활동보조 서비스가 있었는데, 톰슨은 미처 이 사실을 몰랐다. 그런 서비스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톰슨이 자살한 그 다음 달에 캘리포니아주는 중증 장애인이 직업을 구하면 모든 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에 앞서 1976년에 뉴욕시는 활동보조 서비스 이용자들이 자신의 활동보조인을 채용하고, 훈련시키고, 감독하고, 해고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인 독립계약자홈케어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활동보조인에게 원천 과세를 하지 않는 대신 최저 임금만 지급하고 후생복지도 전혀 제공하기 않았기 때문에 연방 규정뿐만 아니라 여러 주정부 규정들에도 위배되었다. 더욱이 비-자기주도적이고 쇠약한 노령층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자 뉴욕시는 1979년에 “서비스제공기관”을 만들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자기주도적인 이용자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자율권을 박탈해버렸다. 이 제도가 시행되자 이용자들은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정부 규정에 부합하는 독창적인 활동보조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힘을 모았다.

 이렇게 하여 1980년에 컨셉 오브 인디펜던트(Concepts of Independence)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나왔다. 이 프로그램은 처음에는 뉴욕시 카운티 5곳에서 이용자 4명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다가 나중에는 카운티 12곳에서 천명이 넘는 이용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했다. 만일 이 서비스 이용자들이 컨셉 오브 인디펜던트가 아니라 전통적인 홈케어 시스템을 이용했더라면 뉴욕주는 2000년 기준으로 2,800만 달러를 추가로 부담했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활동보조 서비스 이용자들에게 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 독립 개념 운영진 대부분은 오랫동안 이 프로그램을 이용한 장애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컨셉 오브 인디펜던트 프로그램은 중증 장애인들도 요양원보다 지역사회에서 더 경제적이고 더 생산적으로 독립생활과 자기주도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초창기 대학 접근성 개선 활동

 1948년, 일리노이대학교는 장애인들을 위한 특별한 대학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하반신이 마비된 군인들은 다른 학생들과 동등하게 대학 생활에 참여하기 위해 무장애 대학 환경 같은 전에 없던 편의시설들을 요구했다. 일리노이대학교 재활교육서비스학부 학과장 팀 너전트의 선견지명 덕분에 이 대학은 장애학생들을 위한 이런저런 서비스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캠퍼스 안에서만 운행하는 특별교통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너전트는 스포츠 프로그램도 개발하였는데, 이 프로그램은 여러 유형의 장애 학생들이 운동 경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교과과목으로 진화하였다.

 장애 정도가 다양한 학생들이 입학하면서 일리노이대학교에 독립생활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중증 장애 학생들은 대학 기숙사 가이 벡위드 생활관 운영에도 참여하였다. 일리노이대학교는 1970년대까지 훨체어가 접근가능한 캠퍼스와 장애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프로그램들을 갖춘 주요 대학들 가운데 하나였다.
제대 군인들의 장애는 모두 전쟁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일반 시민들의 장애 원인은 소아마비나 뇌성마비부터 사고까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건축물의 접근성 개선이 절실했기 때문에 이들은 법적, 정치적 전술을 검토하는 한편 교통수단과 건축물 등에 관한 편견을 바꾸려고 애썼다. 장애 대학생 프로그램들은 비장애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여러 유형의 장애인들은 1971년 휴스턴, 1972년 버클리, 1974년 보스톤에서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그 뒤부터 스스로 독립생활센터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이들은 장애인들이 일반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변동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에드 로버츠와 독립생활운동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버클리 캠퍼스를 휩쓸었던 반문화운동은 에드 로버츠의 열정적인 반시설(anti-institutional) 성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14살에 소아마비에 감염되어 최중증 장애인이 되었지만 노동운동가였던 강인한 어머니의 지지를 등에 업고, 로버츠는 자기-회의와 비관주의를 극복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하루 종일 심한 열에 시달렸고 온몸이 마비되어 철제인공호흡기(iron lung) 안에서 살았다. 내가 다 듣고 있는데도 어머니는 의사에게 내가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는 “차라리 죽기를 바라야 할 겁니다. 만일 살아난다면 식물보다 못한 여생을 살아야 할 겁니다. 당신 같으면 하루 24시간 동안 철제인공호흡장치에서 살고 싶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상황이 바뀔 조짐이 없었다. ...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죽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모든 시설을 갖춘 병원에서는 자살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강인하다. 나는 단식을 했다. 그들은 강제로 음식을 주입했다. 정말이지 비참했다. 몸무게가 54파운드나 줄었다.

나를 돌보던 마지막 특별 임무 간호사가 떠난 다음날 나는 살기로 작정했다. 실은, 이때가 큰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이런 간호사들이 하루 종일 내가 할 일을 대신해 주었다. 그들이 늘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결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모두 떠났을 때, 다른 사람들이야 뭐라 하든 나도 생명을 가진 존재구나 라고 느꼈다. 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유였다. 그래서 다시 먹기 시작했다.


 로버츠는 교실에 연결된 전화로 중학교 3학년 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로버츠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고등학교 수업에 참여한 첫 경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예전에 나는 공기를 폐 속에 가득 들이마시는 개구리호흡법을 터득하여 철제공호흡장치 밖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고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이 두려웠다. 그날은 참 화창했다. 점심시간에 학교에 도착해서 남동생이 스테이션 왜건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나를 내려다 주었는데, 테니스 경기장에 온 기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나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돌아서더니 눈길을 돌렸다. 그때 나는 이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고 어쩌면 그들의 문제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응시가 육체적으로는 상처가 되지 않는구나. 아, 스타가 된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 그때부터 나는 쭉 스타로 살았다.


 로버츠는 정치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의 말에 따라 접근가능성 여부가 아니라 자신이 전공하려는 정치학 분야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대학을 물색했다. 제임스 메리디스가 소송 끝에 흑인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미시시피주립대학교에 입학한 1962년 바로 그해, 로버츠 역시 소송을 통해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처음 대학 당국과 대화를 했을 때 그들은 불구자들(cripples)을 받아들이려고 해봤는데 그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대학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겼지만, 로버츠는 여전히 기숙사를 배정받는데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장애가 심해서 버클리대학 병원인 코웰병원에 거주했는데, 그곳에서 베트남 파병 대신 공익요원으로 일하는 청년의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기숙사에 정치적 기류가 자욱했다. 로버츠가 자신을 뒤따라 버클리 캠퍼스에 입학한 전신마비인들과 함께 코웰병원 3층을 활기찬 분위기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대학 당국은 나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기존 기숙사에는 들어갈 수 없어서, 그들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800파운드(약362kg)나 되는 철제인공호흡기가 들어갈 만한 장소를 찾아 다녔다. 결국 찾아낸 것이 캠퍼스 언저리에 있는 코웰병원의 어느 병동이었다. 그들은 나를 그곳에 기거하도록 했다. 그러자 얼마 뒤에 우리 불구자들(crips)이 버클리 캠퍼스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주 신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학생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존 헤슬러와 나는 휠체어를 타고 곧장 시위대 맨 앞으로 가서 경찰들을 노려보았다. 경찰인들 어쩌겠는가? 그들이 우리를 체포하려고 달려들면 우린 이렇게 말헸다. “니들이 우릴 데리고 갈 수 있어? 교도소에 철제인공호흡기 있어?” 당시에는 접근가능한 유치장이 없어서 경찰이 우리를 체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로버츠와 그의 동료들은 1963~64년 버클리 자유언론운동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지만, 대학 내 경찰 주둔 반대 운동과 1964년 민중공원 투쟁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여성운동의 영향도 톡톡히 받았다.

나는 여성운동에서 많은 걸 배웠다. 여성들은 나를 자신들의 모임에 데리고 가곤 했다. 내 생각에 그들은 우리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봤다. 그들은 이 사회가 그들에게 부과한 연약함과 수동성이라는 편견에 어떻게 대처할지 토론했다. 나는 그들이 이런 편견을 이용하여 남성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장애가 강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쳐다보지는 않고 모두들 내 인공호흡장치와 휠체어만 쳐다본다면, 나는 지체 없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사람인 나를 보지 않고 내 장비만 바라보더라도, 나는 그들로부터 내가 얻고 싶은 건 무엇이든 얻고 싶다. 이런 행동이 병리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한, 그것은 하나의 강점이다. 장애는 아주 큰 힘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장애의 힘을 정치적 전략에 사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로버츠도 밝혔듯이, 하지만 모든 시민권 운동가들이 자신들의 운동과 로버츠의 운동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걸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레너드 펠리티어〔미국 원주민 운동가〕가 체포되기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스토클리 카마이클 같은 블랙 파워(Black Power) 운동가들도 만났다. 내가 그들에게 우리도 똑 같은 시민권 투쟁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들의 유사성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예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로버츠는 전에 다니던 전문대학의 지도교수였던 진 워쓰 교수의 부탁을 받고, 그녀가 추진하고 있던 소수집단 대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여기에 착안한 그는 장애학생프로그램(Disabled Students Program, DSP)을 버클리대학에 도립하였다. 장애 학생들은 버클리 시내에 휠체어가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롤링쿼즈(Rolling Quads)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롤링쿼즈는 무장애 캠퍼스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싶은 욕망으로 충만한 회원들은 대학병원을 뛰쳐나와 버클리 지역사회로 들어갔다. 로버츠의 지도에 따라 이들은 1972년 장애인들에 의해, 그리고 이들을 위해 운영되는 자립생활센터를 설립하였다. 이 센터는 훗날 미국 전역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로버츠의 설명을 들어보자.

대다수 사람들은 우리가 독립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장애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지역사회 속으로 들어가도록 한다는 비전과 자원을 제공하는 자립생활센터를 설립하였다. 버클리자립생활센터는 권익옹호에 기반을 둔 조직이란 측면에서 혁명적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말해주는 것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우리 센터의 규정을 보면, 활동가와 운영위원의 51% 이상은 반드시 장애인 당사자여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센터는 예전처럼 억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립생활센터를 분열되어 있는 장애 유형들을 단결시키는 모형으로 생각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우리 센터를 이용하거나 우리 센터에서 일했다. 이것이 우리가 자립생활운동의 미래를 위해 추구하던 비전이었다.


 <뉴욕타임즈>는 버클리를 “장애인들의 메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도시는 자립생활센터의 영향을 받아 장애인들을 지역사회의 통합된 일부로 받아들였다. 이 점에 대해 로버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연석 경사로를 설치했다. 우리가 의원들에게 이 문제를 거론하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연석 경사로, 그게 왜 필요하죠? 길거리에 장애인들이 없는데, 누가 그런 걸 사용하나요?” 연석 경사로가 설치된 뒤에서야 그들은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이 다른 무수한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유모차를 끌고 가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그리고 다리를 높이 들지 못하는 노인들도 연석 경사로를 이용한다. 그래서 이 편의시설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니버설 디자인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를 보여준다. 이제 버클리는 접근성을 아주 잘 갖춘 도시가 되었다.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에서 가지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디든 편리하게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하반신마비재단 뉴욕지부 창립 회원인 제인 윕플러는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 겪은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가장 흥미로운 뉴스는 이곳 사람들의 태도다. 락 콘서트장, 벼룩시장, 영화관, 식료품 가게, 길거리 ... 어딜 가든, 나는 “휠리들(wheelies)”을 만난다. 많은 건물에 휠체어 마크가 붙어있고, 모든 버스의 앞좌석은 노인석 또는 장애인석이다. 전신마비인이 꽤나 가파른 언덕을 그야말로 쏜살같이 내려오는데도 이곳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나는 정말로 용기가 솟구쳤다.


 버클리자립생활센터 창립자인 로버츠는 장애인의 자기결정 원칙을 구현한 사람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해 자신의 분노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로버츠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신과 의사들과 서비스 전문가들은 분노는 나쁜 것이라고 우리한테 말한다. 하지만 분노는 강력한 힘이다. 우리는 분노를 억제하거나 극복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더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 쪽으로 분노의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자신한테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한테로 돌릴 게 아니라 장벽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 나는 늘 화가 난다. 이 나라에서 장애인들이 이류시민인 것에 화가 난다. 어떻게 하여 수십억 달러나 되는 연방 지출예산 가운데 97%를 우리의 의존성을 영구화시키거나 심지어 증대시키는데 쓰는지,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버클리자립생활센터는 캘리포니아주의 28곳 카운티들마다 설립된 위성 센터들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수 백 곳 센터들의 모델이었다. 현재 교육부 차관보인 주디스 휴먼은 1978년 당시 자립생활센터 부대표였는데, 그녀는 자립생활센터 회원들이 이룬 업적을 이렇게 평가한다.

“뭔가 잘 될 조짐이 보인다. 이들은 재활시설들보다 더 많은 센터들을 만들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장애인들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또 이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장애인 당사자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장애인들이 발전하도록 도울 수 있다. 우리는 동료들이다. 우린 다른 장애인들의 역할모델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기존” 단체들에 가보면 장애인을 거의 볼 수 없다. 존경할만한 동료가 전혀 없다. 나는 20대가 될 때까지 장애인 당사자인 전문가를 만나 본 적이 없다. 나한테는 비장애인 역할모델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의 역할모델이 아니다. 나는 비장애인이 아니니까. 지금도 매일매일 계속되고 있는 이 같은 억압을 우리는 자립생활 프로그램들을 통해 바꿀 수 있다.


 로버츠는 UC버클리 정치학과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 자기 같은 장애인은 장애 때문에 지적 능력과 고용 잠재력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과 맞서 싸웠다. 제리 브라운은 1975년에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된 뒤에 로버츠를 주정부 재활국장에 임명했다. 로버츠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어찌어찌하여 브라운 주지사를 면담했는데, 그는 나를 보더니 “1977년 보건교육복지부 샌프란시스코 본부 점거 사건 주도자 가운데 한 분이시죠?” 하고 물었다. 그 때 일을 들려주자 그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나를 재활국장에 임명했을 뿐더러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위한 예산을 삭감하지 않았다. 그는 궁금한 게 있으면 곧바로 나를 찾아오곤 했다. ... 나는 복지혜택을 받는 사람으로 살다가 주정부 재활국장으로 직행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관료(bureaucrat)가 될 거냐고 질문하면, 난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난 ‘애드보크라트(advocrat)’가 될 겁니다.”


 1983년 로버츠와 휴먼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세계장애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 연구소는 장애인의 독립과 삶의 질 개선을 위한 공공 정책ㆍ연구ㆍ교육 전문 비영리 기관이다. 세계장애연구소는 정책결정자, 기업, 비영리 단체들뿐만 아니라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장애인 네트워크와 협력하며 일한다. 로버츠는 뭇사람들이 장애 이슈와 자립생활개념을 전파하기 위해 러시아, 호주, 일본, 프랑스 등지를 순회하였다. 1984년에는 맥아더재단상을 받았는데, 이 상금으로 세계장애연구소에서 일하는 많은 활동가들을 지원하였다.

 로버츠는 1995년 3월14일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56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장애 공동체를 비롯하여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버클리자립생활센터가 설리되기 이전에 이미 몇몇 자립생활센터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로버츠가 자립생활센터 창립자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은, 그가 전국적 심지어 전 세계적으로 자립생활운동을 일으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격월간 잡지 편집자인 루시 그윈은 로버츠를 이렇게 기억한다.

에드가 버클리대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장애인이었다고 해서 모든 해답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자립생활 초창기에 했던 일화들 속에 진짜 보물이 들어 있다. 그 일화들을 통해 나는 많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 나는 그것을 모두 기록했다. 빌리 골퍼스〔장애권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의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와 내가 만나면, 우린 밤이 되면 그가 그리워진다고 말한다. 에드는 밤마다 철제인공호흡장치에 들어가서 전화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 전화 궁정(phone court)의 황제였다.

에드는 자신이 설립한 최초의 자립생활센터인 버클리자립생활센터에 관한 비디오 테이프를 나에게 보내주었는데, 1960년대 시대극을 보는 듯했다. 자립생활 운동가들은 벨 보텀스(Bell bottoms)로 쫙 빼입고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초창기 자립생활 운동가들은 명문 대학에 다니는 백인 남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자칭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1940-50년대 소아마비가 이런 가정에서 곱게 자라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을 볼링 핀처럼 쓰러뜨려 버렸다. 복잡한 라틴어로 명명된 ... 그리고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바이러스 때문에 미국에서 최고로 촉망받는 아이들이 ... 하룻밤 사이에 이류시민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이류시민의 지위에 있다는 의문을 품게 되었을까? 그들은 특권과 보호에서 벗어나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해방과 정의를 부르짖는 민중들은 가시적이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생생한 미국의 모습으로 저녁 TV 뉴스에 나왔다. 흑인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거리에 서 있으면 보안관들은 그들이 고분고분하게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도록 하기 위해 ... 개를 풀어 그들에게 달려들도록 하는 모습을 온 국민이 TV에서 보았다. 흑인 자긍심 운동은 백인의 억압과 흑인의 가난에서 비롯되었다.

자립생활 혁명을 이룬 사람들은 특권을 가진 백인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뜻밖에도 바리케이드를 급습하여 장애인들을 의료모형(medical model)에서 해방시켰다. 이들은 연석 경사로와 식당 접근성, 그리고 직업재활제도 개선을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했다.... 에드 로버츠는 생의 마지막 시기에 전국을 돌며 정책결정 동반자운동(Partners in Policymaking)에 헌신함으로써 더 큰 명성을 얻는다. 당시 그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자립생활센터의 특징

 모든 자립생활센터들은 몇몇 필수 서비스들을 제공한다. 하지만 프로그램, 직원 조직, 재정 원천, 이용 대상자 등은 센터들마다 다르다. 어떤 센터들은 특이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를 테면, 버클리자립생활센터는 초창기에 휠체어 수리 서비스를 제공한 적이 있었다. 뉴욕시에서 초창기에 설립된 뉴욕장애인자립생활센터(1978년)과 브루클린장애인자립생활센터(1979년)는 주거, 급부, 교통정보뿐만 아니라 활동보조, 농ㆍ맹 관련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뉴욕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뉴욕대학병원 부설 티쉬병원과 손을 잡고 장애인들에게 기본적인 돌봄서비스도 제공한다. 브롱크스자립생활서비스는 범죄로 장애인이 된 사람들을 돕는 반면, 퀸자립생활센터는 장애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코르크아트갤러리를 운영한다. 소수 인종 장애인들은 자립생활센터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할렘병원은 퀸자립생활센터와 하워드대학교의 실비아 워커와 힘을 합쳐 1991년에 할렘자립생활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는 뉴욕시에 있는 센터 6곳 가운데 마지막에 설립된 곳인데, 6곳 센터 모두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다른 센터들이 그렇듯 퀸자립생활센터는 다문화 장애 이슈에 대처하기 위해 소수자 포용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장애운동이 활발한 주에 있는 어느 한 자립생활센터가 주 정부 재정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질 경우, 그 센터는 그 주에 있는 다른 센터들과 연대하여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캘리포니아주, 일리노이주, 매사추세츠주, 뉴욕주, 펜실베이니아주 등은 효과적인 자립생활센터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이럴 경우 센터들은 정보와 선진적인 접근법을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게 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애권운동가들은 1978년에 재활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연방 정부의 자립생활 지원금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장애인 지도자들이 이런저런 자립생활 프로그램을 위한 재정을 요청했음에도 1978년에야 10곳 센터가 연방 정부의 설립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러다가 1986년에 재활법이 다시 개정되면서 비로소 법률 서비스와 더불어 자립생활센터 설립과 운영 자금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재활법이 1992년에 다시 개정되면서 자립생활센터에 대한 이용자 통제권이 더 강화되었다. 개정 법률에 따라 연방 지원금이 주 정부 재활기관을 통해 지급되는 게 아니라 센터로 직접 제공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각 주 정부들은 자립생활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립해야 했는데, 위원회는 우선 3년 마다 자립생활서비스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게다가 개정 법률은 자립생활센터 참여자들이 건강돌봄, 주거, 공적인 편의제공, 의사소통과 교통, 그리고 교육과 고용에 대한 동등한 접근을 위한 권익옹호 활동을 독려하도록 구성되었다.

재활의 확장으로서의 자립생활

 자립생활센터는 재활 개념이 시민의 맥락으로 확장된 것이다. 재활의 전신인 보훈병원 회복 프로젝트는 원래 병원과 전장 사이의 중간 프로그램이었다. 장애인들이 주류사회에 통합되도록 지원하는 자립생활센터는 말하자면 시민들의 재활 공간인 셈이다. 재활은 의료 분야를 뜻하고 자립생활은 사회 참여에 필요한 사회 서비스를 자신의 힘으로 획득하는 장애인들을 의미한다. “자립생활은 자기 자신의 생활양식 - 스케줄, 음식, 여흥, 악행과 선행, 레저, 친구 등 - 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자립생활은 위험을 감수할 자유이자 실수를 할 수 있는 자유이다.”

 거번 데종은 재활 접근법과 자립생활 접근법의 차이를 간결하게 설명한다. 재활모형은 문제의 소재를 장애를 가진 개인에게 두고 그 개인의 교정을 강조하는 반면, 자립생활 패러다임은 문제의 소재를 사회의 태도에 두고 환경의 변화를 강조한다. 재활은 권위에 대한 복종을 암시하는 “환자”, “클라이언트” 같은 말을 사용하는 반면, 자립생활은 서비스 이용자에 의한 통제를 암시하는 “소비자”라는 말을 사용한다. 원래 재활은 장애인이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능한 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자립생활센터의 목표는 장애인을 지역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에 완전하게 통합시키는 것이다.

자립생활운동 평가

 휠체어를 타는 전신마비인이자 컨셉 오브 인디펜던트 운영위원장이었던 샌드러 슈너 는 이미 1970년대 후반에 자립생활센터가 장애인 이용자와 서비스 제공자 사이에서 자기-영속적인 신흥 관료층이 될까 우려를 표시했다.《마우스 Mouth》 편집자 루시 그윈은 1990년대 후반에 자립생활센터는 사회변동보다는 현상 유지를 조장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립생활운동은 여전히 에드 로버츠를 따라잡지 못했다. 로버츠는 점잖고 끈기 있는 남자였다. 그렇지만 요즘 센터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람들이 시설 밖으로 나오기를 염원하지만 그렇게 할 돈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는 호통을 쳤을 것이다.”

 소심한 일부 자립생활센터들이 그랬는지 몰라도 다른 센터들은 논쟁적인 활동에 참여해 왔다. 가령, 뉴욕시 자립생활센터 4곳은 낫 데드 옛(Not Dead Yet) - 미국 연방대법원 앞에서 의사조력자살 반대 시위를 하기 위해 조직된 장애인 단체 - 이 1977년 1월 8일에 조직한 시위대가 타고 다닐 버스 두 대를 지원했다. 뉴욕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초대 사무총장 파트리시오 피구에로아는 자립생활센터는 장애인들을 위한 좋은 자원이라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장애인 당사자인 서비스 제공자들이 클라이언트들이 직면하는 똑같은 문제와 좌절에 대처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소아마비인이자 뉴욕대학교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탐 클랜시는 자립생활센터를 권리를 스스로 보호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강화하는 장애인 당사자들의 조직의 하나로 정립한 에드 로버츠의 정신을 장애인 공동체가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립생활과 새로운 장애운동

 시설에서 나온 중증 장애인의 등장과 이들을 지역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자립생활 전략은 장애권운동을 진화시키는 핵심 동력이었다. 상당수 장애운동가들은 시설에 수용되어 있거나 자기 집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었다. 자립생활운동 창립자 에드 로버츠는 철제인공호흡기에서 잠을 자야했다. 장애인행동(Disabled in Action)을 만들고 로버츠와 함께 세계장애연구소를 설립한 교육부 차관보인 주디스 휴먼은 일상생활 활동을 위한 활동보조인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스톤자립생활센터와 미국장애시민연대 창립자인 프레드 페이는 메사추세츠주 콩코드시에 거주하면서 매일 하루 24시간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활동보조인과 컴퓨터 3대를 적절하게 조합하여 자기 집을 통제하고 지역 및 전국 투쟁, 뿐만 아니라 국제〔장애〕운동까지 지휘했다. 저스틴 다트는 “우리 사회는 프레드 같은 사람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대신 그 보다 돈이 훨씬 더 많이 드는 요양원에 그들을 집어 넣는다”고 말했다.

 자립생활운동은 할리우드 영화《더 맨》(1950)과《귀향》(1978)의 차이에서 보듯이 장애에 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다.《더 맨》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휠체어 탄 제대군인은 아내에게 일어나서 한 걸음 걸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 그런 장애인 제대군인 정도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는 언제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그 시절 영화에 잘 어울리는 대단원이었을지 몰라도, 장애인 공동체가 아무리 노력해도 건축물과 태도의 장벽이 절대 바뀌지 않는 시대를 이미 벗어난 1970년대 감각에는 잘 맞지 않았을 것이다. 순응하고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더 맨》의 주인공과 달리,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가 장애인이 된《귀향》의 전쟁 영웅은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고 인식개선 교육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70년대 장애권 운동가들의 예언자적 언어는 1960년대 인종적 정의를 위해 투쟁하자며 청중들에게 사자후를 토해 내던 시민권 운동가들의 연설을 연상시킨다. 이를 테면, 골드워터병원에서 만성적 돌봄 환자로 살았던 전신마비 휠체어 사용자 탐 클랜시는 1977년 10월 5일 뉴욕대학병원에서 열린 토론장에서 “장애에 대한 심리적 충격”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장애를 가진 청중들을 각성시켰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dream)”과 제임스 볼드윈의 “무지개 표지(rainbow sign)” 및 “다음에는 불덩이를(the fire next time)”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면서, 클랜시는 청중들이 아쿠아리우스 시대(Age of Aquarius)를 대체하는 새로운 시대를 마음속에 그리도록 했다.

미국을 주목하십시오. 내가 등장했으니까요. 나는 늘 나의 꿈과 나의 무지개를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그림이 더욱 산뜻하고 색깔이 더욱 선명합니다. 나는 시행착오를 겪었고 소리 없이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걸을 수 없어서 나는 그저 않아서 지켜만 봤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을 테지요. 솔직히 말하면, 여러분은 내 말을 들어본 적조차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러분은 나를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곳에 숨겨두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이 창조한 물질만능의 혼돈에 대한 도덕적인 해답을 찾기 시작했으니, 내 목소리가 커질 것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완전함은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바로 여기 있잖습니까. 내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불가능”이란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쿠아리우스를 옮겨버립시다! 신새벽이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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