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단 메뉴 바로가기
  2. 본문 바로가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야기 프리즘
HOME > Webzine 프리즘 > Webzine 프리즘
본문 시작

webzine 프리즘

프리즘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분기마다 발간하는 웹진입니다

지난호바로가기 이동
컬쳐포유

최강문의 영화이야기-


전쟁의 시대에 던지는 질문최강문(요술피리 대표작가)


 전쟁시대다. 중동지역에서는 전쟁을 시작한 지 벌써 8년째를 넘긴 이라크전과 아프카니스탄전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불과 석 달 전 1,200톤급 초계함 천안함이 서해 해상에서 두 동강이 나 가라앉았다.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발표가 있었고, ‘일전불사’를 외치는 보수단체들은 ‘북한 응징’과 ‘친북좌파세력 척결’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이번 [영화이야기]는 전쟁의 시대이니만큼, 전쟁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에 관한 것이다. 그냥, 짧게 표현하자면, 전쟁영화 이야기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있다. 엄청난 흥행수입을 올린 영화를 일컫는데, 그만큼 엄청난 투자가 선행되었다는 점에서 제작비 규모가 크고 유명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영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블록버스터는 원래 폭탄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은 4~5톤 규모의 대형 폭탄을 사용했는데, 폭발력이 엄청나서 웬만한 구역 하나를 송두리째 날려버린다고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화판에서 블록버스터는 한 마디로 큰 돈 들여 만들어 영화시장을 통째로 휘어잡아서 큰돈을 벌어들이는 걸 의미하는, 정말이지 폭력적인 개념이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장면  블록버스터 영화의 특징이 있다. 큰돈을 투자해서 만드는 만큼 압도적인 시각적 효과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자동차 한 두 대의 추격전은 밋밋하다. 그래서 질주하는 와중에 수십 대가 부서지고, 개중 네댓 대 정도는 뒤집어져 하늘을 날아야 하며, 서너 대 정도는 엄청난 화염을 내뿜으며 폭발해야 한다. 아니면 <타이타닉>처럼 수천 명이 탄 배가 곧바로 두 동강이 나야한다. 물론 그 장면장면마다 주인공은 몸을 날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물론 이걸로 끝난 건 아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주로 헬기가 등장한다. 아니면 다중이 이용하는 지하철, 비행기, 교량, 놀이공원, 대형 빌딩 등을 볼모로 스릴 만점을 추구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관객은 더욱 불안해 하니까.
 관객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가장 흔한 기법은, 생명을 담보로 벌이는 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게임의 정점에 바로 전쟁이 있다. 전쟁영화는, 그래서 적은 투자로 보다 많은 효과를 얻기 위한 영화자본의 논리에 가장 충실한 장르로 자리잡아 왔다.

 스릴러 영화에서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총소리가 전쟁영화에서는 콩 볶는 소리 정도로 미미하게 느껴진다. 여기저기 대포 터지는 소리, 가히 천둥벽력과도 같다. 고막이 터지는 장면쯤은 익숙하기 마련일 정도로 음향의 크기부터 다르다. 폭발음 뿐이랴. 건물이 폭삭 내려앉고, 사방으로 자갈흙이 튄다, 폭발로 인해 생을 마감했음이 분명한 병사들의 신체들과 함께. 이 와중에 바로 옆의 병사가 총이든, 포탄이든 맞게 된다. 피를 철철 흘리며 신음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주인공의 액션은 정해져 있다. 죽어가는 전우를 부둥켜안고 절규한다. 감동적인 전우애다. 이어지는 장면, 전우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주인공 두 눈은 적개심으로 가득하다. 이럴 때 전형적인 대사가 나온다면, 오히려 감점 요인이겠지만, 자주 등장한다. ‘다 죽여 버리겠어’ 따위 말이다.

영화 속의 전쟁 장면

 이런 영화의 결론 또한 전형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찌어찌 생사의 갈림길을 몇 번이나 넘어서 어렵사리 고지를 사수한 부대원들,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부둥켜안거나, 먼저 간 이들로 인해 오열한다. 살아있는 영웅의 등극이거나, 죽어간 영웅에 대한 추념이 이어진다. 이럴 때 슬쩍 바람에 나부끼는 국기가 이들의 어깨 너머로 보이게 되고, 장중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바탕으로 장면 전환이 이루어진다. 일상으로의 복귀를 암시하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돌아온다. 그게 평화라는 듯이.
‘전우애 - 적개심 - 영웅’으로 이어지는 유의 전쟁영화는 4세기 로마의 군사전문가 베제티우스의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금언에서 그다지 벗어나있지 않다. 전쟁 발발의 원인이나 해법은 중요하지 않다. 당면한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참이고 진리로 치부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블록버스터 자본은 세상의 숨은 진리 따위에 천착하기 보다는 세상의 숨은 돈을 긁어모으는 데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래, 그게 자본의 생리다.

 여기까지가 서론이다. 너무 길었다. 쫓기듯 [영화이야기]꺼리를 마련하느라 찾아간 멀티플렉스 극장. 마침 최근 시간이 맞았고, 좌석 여유도 많았다. 게다가 6월의 분위기에 맞는 전쟁영화. 바로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연출한 김재한 감독의 한국판 블록버스터 <포화 속으로>다.

포화속으로 영화포스터
 한국전쟁 60돌을 맞아(축하할 일은 아니다) 당시 경북 포항지역(공교롭게도 지금 대통령의 고향이다) 학도병의 활약을 다룬 작품이다. 차승원, 빅뱅의 탑, 권상우가 북한군 장교 또는 학도병으로 출연하는 이 영화 제작에 120억 원이 들어갔다고 하니, 평균 영화제작비의 2배에 달하는 큰 금액이다. 촬영에 사용된 화약의 양도 엄청나서, 역대 영화제작 사상 최고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줄거리는 ‘전우애?적개심?영웅’이라는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 또 어떠랴? 지금은 전쟁시대가 아닌가? 상당 기간 동안 예매율 1위도 달성하고, 네티즌 평점도 10점 만점에 7점대를 유지했다. 물론 전문가 평점은 3~4점대에 불과했지만.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는 이런 영화리뷰까지 실렸다.
‘학생들과 젊은 청년들이 이 영화를 보고 바른 우파적인 생각과 애국심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 자신이 사랑하는 배우가 빨갱이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북한을 주적으로 보게끔 하는 스토리와 주연 선정이 탄탄했던 거 같습니다.’

 사실, 전쟁영화의 원조는 뭐니 뭐니 해도 미국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급격하게 성장한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바탕으로 블록버스터급 전쟁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전쟁영화는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부합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뒤쫓는 이윤에도 맞아떨어졌다. 그리하여 70년대까지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80년대 이후에는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대량생산되었다. 근육질 배우 실베스타 스텔론 주연의 <람보> 시리즈와 1998년 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대표적. 물론 이 말고도 정말 많다. <위워솔저>, <윈드토커>, <바스터즈-거친 녀석들>….


허트로커 영화포스터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의 전쟁영화는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전쟁의 이유를 되묻는 <플래툰>이나 <지옥의 묵시록> 같은 작품들이 블록버스터의 틈새를 비집고 나타난 것이다. 서부의 총잡이로 이름을 날렸다가 감독으로 전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몇 년 전 작품도 기억난다. 2006년 작 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일본 이오지마 섬에 상륙한 네 명의 병사들은 성조기를 높이 세우며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기억에 이오지마는 초라하게 남아있을 뿐. 깃발을 올리는 사진 또한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전쟁이라는 괴물이 어떻게 영웅이라는 허상을 조작해내는지 예리하게 파고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올해 세간의 관심을 모은 히트작도 있다. 지난 3월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음향상, 음향편집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한 <허트 로커>. 세월이 흐른 만큼 배경은 이라크로 옮겨졌다.

 ‘전쟁은 마약이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영화의 배경은 이라크 바그다드. 폭발물을 제거하는 부대에서 극도의 긴장감을 즐기듯 폭탄을 해체하는 제임스 중사의 동작 하나하나가 관객에게는 긴장과 공포로 다가온다. 제임스의 통제되지 않는 행동은 대원들을 위험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과 누가 자폭 테러리스트가 될 지 구분할 수 없는 환경은 결국 부대원들의 정신 상태까지 위협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우는 대상은 이라크 반군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 백미는 제임스 중사다. 그에게 삶이란, 한 번 더 폭발물을 해체할 기회에 불과한 것이다, 정상적인 가정과 사회에 도저히 정착할 수 없는. 전쟁이 파괴하는 것은 건물이나 교량, 적군의 생명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역작이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개봉되었다가 금세 막을 내린 한국의 전쟁영화 하나도 다시금 소개된다. <작은 연못>.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피난길에서 이유 모를 무차별 공격에 스러져간 충북 영동군 대문바위골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작은연못 영화포스터
 전쟁이 일어났지만, 노인들은 정자나무 아래 바둑을 즐기고, 아이들은 전국 노래 경연대회 준비에 열성이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는 머리 위로 마구 떨어지는 포탄에 우왕좌왕하고, 결국 아무런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만다. 바로 1980년대 언론에 공개되면서 큰 논란을 불러왔던 ‘영동 노근리 학살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늘근 도둑이야기>를 연출한 극단 차이무의 대표 이상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데뷔작이지만, 제작비 10억 원 가량의 저예산 영화인 까닭에 문성근, 송강호, 문소리, 유해진 등 거의 모든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연기 봉사'를 했다고 한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든 간에, 모든 전쟁영화가 갖는 공통점 하나를 들라면 이것이 될 것이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나게 되나?’ 하는 질문.
누가 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영화처럼, 전선을 넘어오는 적들을 향해 총질하고 대포알을 퍼부어 죄다 죽여버리면 끝날까? 도대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준비한다’는 이상한 논리 앞에서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이 땅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한국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단지 휴전 중이라는 상황이 그러하듯, 숱한 의혹 속에 두 동강 난 천안함 사건이 그러하듯, 지금도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적대시하며 으르렁대듯.

프린트하기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