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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장애인


명통사, 세계 최초의 장애인 단체 정창권 (전 고려대학교 국문과 초빙교수)


 지난번에 우리는 전통시대 시각장애인은 자립(自立) 가능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점복이나 독경, 관현악, 구걸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스스로 먹고 살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선 점복업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세종대왕이 총애하던 시각장애인 점복가 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은 독경맹인, 곧 독경하는 시각장애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좌경하는 모습의 그림  원래 독경(讀經)이란 경문을 읽어 악귀를 몰아내거나 복을 기원해주는 것을 말하는데, 시각장애인 독경사는 무당들이 하는 굿과는 달리 자리에 앉아서 경문을 낭송하므로 '좌경' 또는 앉은굿'이라 하였다. 첨부한 그림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앞에 병풍을 두르고 제사상을 차려놓은 채, 북을 두드리며 경문을 낭송하였다. 또한 주인은 그 뒤에 앉아 독경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뭔가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그들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이미 고려나 조선 전기부터 존재했는데, 당시 그들은 모두 삭발했으므로 '맹승(盲僧)' 혹은 '선사(禪師)'라 불리곤 하였다. 하지만 유의할 점은, 그들은 불교의 승려가 아닌 도교의 도류승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아래와 같은 서거정의 『필원잡기』를 보면, 그들이 도교의 한 부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서거정에게 물었다.
"중국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병행하고 있으나 도교가 더욱 성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는 비록 성하나 도교는 전무한 형편이다. 만약 두 개의 법이 병행한다면, 우리는 나라가 작고 백성도 가난한데 장차 어찌 견디겠는가?"

그러자 서거정이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소격서와 마니산의 참성에서 지내는 초제(醮祭: 병을 향해 지내는 제사) 같은 것은 곧 도가의 일종이다. 중외(中外)를 통하여 항간에서 도복을 입고 도언을 하는 사람은 없으나, 사대부집에서 매양 정월 초하룻날 복을 빌고 건축, 영선(營繕: 수리) 등과 같은 일에 재앙을 없애려고 비는 데에도 반드시 맹인 5~7명을 불러 경문을 읽는데, 그 축원하는 바가 모두 성숙(星宿)과 진군(眞君)의 부류이며, 거기에 제공되는 비용이 적지 않으니, 우리나라에서 도교가 행해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사물을 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맹인들이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것은 옛사람에게서 본 바 없고, 또 중국에서도 행해지지 않는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시속에서 서로 전수되는 하나의 고사이다."

 이처럼 시각장애인 독경사는 도교의 한 부류였다. 그리고 이들은 정월 초하룻날 복을 빌어주고 집을 짓거나 수선하는 일에 참여하여 재앙을 물리쳐줬는데, 이는 중국에선 행해지지 않는 우리만의 독특한 풍습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여러 가지였다. 위에서처럼 각 가정에 불려가 복을 빌어주거나 재앙을 물리쳐주는 것 이외에, 특별히 질병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세종 2년 왕대비의 병환이 깊어지자 임금이 시각장애인 독경사 7명을 불러 독경하도록 했으며, 그달 11월에도 14명을 불러 독경하도록 하였다. 이때는 도지정근도 베풀었는데, 도지정근(挑枝精勤)이란 복숭아 가지 신장대로 귀신을 쫓는 것을 말하였다. 그 모습은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우선 병자가 누워있는 방안에서 북을 치며 독경하기를 3~4일 동안이나 한다. 그리고 복숭아 가지 신장대로 귀신의 강림을 청하여, 입구가 좁고 밑이 넓은 옹병에 담아, 근처의 야산으로 가서 땅을 파고 묻어버린다. 그럼 병이 치료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시각장애인 독경사는 질병의 원인이 악귀가 사람한테 붙어서 장난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독경을 해서 그 악귀를 몰아냄으로써 질병이 치료되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옛날 서민들은 병이 나면 의원을 찾지 않고 먼저 시각장애인이나 무당을 찾아갔는데, 그래서 '양반이 병이 났을 때 시각장애인이나 무당에게 물으러 가면 반드시 죽고, 상민의 병에 의약을 구하러 가면 병자가 반드시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기도 했다. 이는 당시에 의약이 발달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일반 서민들에겐 굿이나 기도와 같은 민간신앙이 의술보다 더 가깝고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서민층의 독경을 이용하는 모습은 판소리 <변강쇠가>에 잘 나타나 있다. 하루는 변강쇠가 장승 동티가 나서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자, 옹녀가 경채 한 냥을 품에 넣고 건넛마을 송봉사란 시각장애인 독경사를 찾아간다. 송봉사는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산통을 흔들어 점을 보더니, 변강쇠가 장승 동증이 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옹녀는 '그럼 원이나 없게 독경이나 하여주소'라고 부탁한다. 그리고는 먼저 집으로 가서 목욕제계하고, 떡과 과일 등 제사상을 차리고 앉아서 기다린다. 이윽고 송봉사는 북을 치고 방울을 울리면서 <조왕경>, <성조경>을 차례대로 읽어나간다. 그는 마지막으로 왼발을 턱 구르면서 "엄엄급급 여율령 사바하 쉐!"라고 주문을 외운 뒤 독경을 마친다. 그러자 옹녀가 경채로 돈 한 냥을 내어준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의하면, 그들을 불러 집안의 복을 빌거나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각장애인 독경사 중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도 있었고, 혹자는 꽤 많은 돈을 주고 첩을 얻고자 하기도 했다.
 한편, 아직까지 '세계 장애인사'가 쓰여지지 않아서 확신하긴 어렵지만, 필자가 보기에 세계 최초의 장애인 단체는 우리나라에 있었던 듯하다. 위에서 말했던 시각장애인 독경사의 단체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전기 시각장애인 독경사들은 '명통사(明通寺)'란 집회소를 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한 번씩 모여 경문을 외며 축수를 하였다. 그 조직의 위계질서도 매우 엄격해서, 높은 사람은 당에 들어가고 낮은 사람은 문을 지키며, 겹문에다 창을 세워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명통사의 위치는 영희전의 동쪽 담 밖에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도성의 남쪽 영희전(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전각) 뒷길에 하마비(下馬碑)가 있고 그 건너편에 맹청(盲廳)이 있으니, 이것이 옛날 명통사가 아닌가 싶다'라고 하였다. 또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맹청은 영희전의 동쪽 담 밖에 있는데, 김자점의 집 옛터라고 한다. 국복(國卜)을 역임한 사람에게 지중추의 역할을 주어 그곳을 주관하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명리학회 회원들도 지금의 서울 중구 저동 68번지 중부경찰서 자리가 바로 그곳이라고 하고 있다.

 원래 명통사는 조선 정부가 시각장애인을 위해 특별히 설립한 것이었다. 즉, 명통사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엄연한 공적기관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태종 17년 6월에는 임금이 그곳 명통사를 보수하고 노비 10명을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임금이 선공감(건축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 명하여 명통사를 다시 짓게 하고 이어서 노비 10명을 주니, 한양 5부의 맹인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통사가 언제 설립되어 언제까지 존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최소한 태종 이전에 설립되어 세종, 단종, 세조 등 조선전기까지 존재하다가 조선중기 이후에 폐지된 듯하다. 그리고 임란 이후 효종대에 민간단체인 맹청으로 부활했던 듯하다.

 이 단체가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일은 가뭄이 들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것이었다. 역대 임금들은 가뭄이 들 때 그들로 하여금 기우제를 지내게 하고, 대신 살이나 베 같은 물건을 보상으로 주곤 했다.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바로 그것이다.

'승려들을 흥천사에, 무당들을 한강에, 맹인들을 명통사에 각각 모아 비가 오기를 빌도록 했다.'
'명통사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맹인들에게 쌀 30석을 내렸다.'
 이처럼 지금으로부터 벌써 600여년 전에 우리나라에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단체가 존재하고, 국가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니, 정말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젠 한국 장애인사도 서구의 눈이 아닌, 우리의 눈으로도 한번쯤 바라봐줬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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