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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삼호의 장애학이야기

선택과 권리


선택과 권리: 우생학, 유전학 그리고 장애 평등 탐 세익스피어


 이 글은 유전학과 산전 진단에 대한 현재의 이슈를 탐구하고, 장애평등 관점에서 분석을 전개한다. 내가 말하는 장애평등 개념은 손상(몸의 의학적 조건)과 장애(사회적 차별과 편견)를 구별하는 장애에 관한 사회모형에 기초한다. 장애인들은 모든 시민권에 접근해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을 사회적으로 주변화시키는 사회적 장벽을 제거하려고 지금껏 투쟁해 왔다. 나는 장애평등을 다음과 같은 정치적 원리로 정의한다. 즉, 사람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고,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통합되어야 하며, 신체적ㆍ지적 자질을 불문하고 자기 의사가 반영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산전 유전학 검사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에는 선택과 권리의 문제 - 즉, 여성의 선택권, 장애인의 시민권, 아직 실현되지 않은 태아의 권리,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권리의 경합 - 가 대립한다. 하지만 결정 과정에 작용하는 폭넓은 사회적ㆍ문화적 맥락, 의료 전문직의 역할, 그리고 의학적 지식을 더 활용할 것인가 경험적 지식을 더 활용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기술의 가능성, 출산 결정의 맥락, 그리고 논쟁에 참여한 다양한 이익집단을 세심하고 민감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유전학 검사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출산을 둘러싸고 첨예한 논쟁이 발어졌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들은 모든 유산은 나쁘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과 임신상태를 유지할지 아니면 그만둘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손상을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손상이 유산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의학의 발전이 유전병의 구세주라고 소리 높여 외치더라도 장애권운동은 새로운 유전학이 나치의 우생학과 다름없다고 본다. 두 경우 모두, 도덕적ㆍ정치적 확신에 차서 감성적 수사를 동원하고 원대한 결말을 주장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장애와 유산은 맥락적이면서도 역설적인 방식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일부 ‘낙태 선택권 지지(pro-choice)’ 운동가들은 유전적 비정상은 위험하다며 유산권(abortion rights)을 정당화한다. 반대로, ‘생명권 지지(pro-life)’ 운동가들은 장애권을 내세우면서 유전적으로 비정상인 태아의 유산을 반대한다. 한편, 일부 ‘생명권 지지’ 의원들은 사회적 유산은 반대하면서도 특별한 산전 검사에는 찬성한다. 또한, 일부 산과의사들은 태아의 비정상이 확인된 경우만 빼고 어떠한 경우에서도 유산에 반대한다는 보고가 있다. 거꾸로, 일부 장애권 운동가들은 태아의 비정상이 확인된 경우만 빼고 모든 유산권에 찬성한다. 여기서 선택적ㆍ사회적 유산을 둘러싼 관점의 조합들이 죄다 나타난다.

 나는 현재의 산전 검사가 곧 우생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료 전문직, 그리고 출산 결정이 이루어지는 맥락은 자유 선택의 가능성을 훼손할 뿐더러 우생학적 결과를 조장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선택권을 수용하되 장애인에 대한 선택적 제거를 종용하는 사회적ㆍ문화적 압력에 반대한다. 끝으로, 나는 앞으로 부모가 될 사람들이 더 용이하게 자신의 출산 결정에 관한 인지된 선택을 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전학 vs. 우생학

 오늘날 새로운 유전학은 그것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한다. 특히, 유전자 치료 분야에서 그렇다. 과학기술의 잠재력이나 과학 지식은 한계가 있으며, 뿐만 아니라 자원과 실용성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우생학이라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1)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그런 걱정을 줄여야 하고, 우생학이라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은 그 유토피아에 대한 흥분을 줄여야 한다. 과학기술의 한계는 태아 검사 같은 것이 없었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문제들을 야기하는데, 이런 문제들은 마침내 유전자 치료가 실현되면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유전자 치료는 아직 요원한 상태여서, 오늘날 주요 손상에 대한 유전자 검사는 효과적인 치료나 개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전자 상담의 가능성과 산전 검사 및 유산을 초래한다. 이는 유전학 검사가 부모가 될 사람들에게 도덕적ㆍ정치적 딜레마를 더욱 부추긴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검사 기술의 등장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기술적 개입은 이른바 ‘자신 없는 임신’, ‘완벽한 아기 신드롬’, ‘슈퍼마켓 신드롬’에 대한 원인을 교묘하게 바꿔치기 한다. 즉, 의료 전문가는 아기의 손상이나 질병을 없애 줄 것이며 사람들이 이 같은 힘을 활용하지 않는 건 이기적이라는 사고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건강과 질병 사이의 경계가 바뀌고 사회적 경험은 점차 ‘유전학적으로 된다.’

 Richards는 오늘날 산전 검사 정책에 관한 논쟁을 철저하게 규명했다. 유전학자의 입김이 거의 작용하지 않고 주로 산과의사가 실시하는 산전 검사와 의료 유전학자나 유전학 상담사에 의한 유전학 상담 및 검사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모든 임신 여성들 - 특히 가족력, 연령, 민족의 특성 따위 때문에 유전적 비정상의 위험성이 더 높다고 알려진 여성들 - 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산전 검사를 주목한다. 5,000가지가 넘는 단일 유전자 결함이 존재하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수천 분의 일의 확률로 발생한다. 따라서 연골형성부전증 같은 손상을 야기하는 아주 드문 돌연변이가 유전학적으로 검사되고 제거될 것이라는 사고는 현실성이 거의 없다. 비용 때문에라도 수많은 증상들을 모두 검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초음파 같은 기존의 비-유전학적 기술로도 태아의 ‘가시적인’ 결함을 검사하고 선택적 유산을 이끌 수 있다. 임신 여성들의 경우, 본인도 모르게 혈액을 통한 매독 검사를 하는데, 이것도 비-유전학적 검사의 일종이다. 신경관 결함(가령, 척추피열) 검사도 흔하지만, 다운증 검사는 일상적이어서 유산을 야기하는 가장 흔한 사례이다. 오늘날 어떤 지역에서는 낭포성 섬유증 보균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부부가 일상적으로 검사를 받는 경우도 있다. 웨일즈에서는 모든 산모가 뒤셴형 근디스트로피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산전 검사를 받는 임신 여성들의 수도 증가하고 검사 대상이 되는 증상(condition)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서구에서 유전학 검사는 법률적 개입의 결과라기보다 민주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과 남성의 자유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치 스타일의 우생학이 형태만 바뀐 채로 실천된다고 주장하는 건 정확하지 않다. 중화인민공화국 같은 권위주의 정권들과〔나치의 우생학을〕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새로운 우생학 기술의 위험성을 과장하고, 유전학자들을 비방하는 것은 위험하다. 실제로, 정치적 조치를 통해 낙태나 선택적 낙태를 규제하려는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데, 이는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해법이다.

 하지만 오늘날 유전학이 ‘발현적 특성’으로 발전하는 것은 분명 위험하다. Nuffield Council on Bioethics 같은 주류 단체조차 유전학이 발전하면서 ‘유전학 검사가 우생학적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증가하고 있는 건 틀림없다’고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유전학’과 ‘우생학적 오용’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 의학은 갈수록 임신을 불안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산전 검사가 더 확대되고 임신기에 검사받을 수 있는 유전학적 이상(conditions)의 수가 계속 늘어나면서, 더 많은 부부들이 감염된 태아를 유산해야 할지 출산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연골형성부전증 같은 손상이나 헌팅튼병 같은 질병보다는 유방암이나 대장암 소질(preposition) 같은 것일 때, 결정은 더 복잡해지게 된다. 게다가 감염된 태아를 유산하려는 수많은 개인적 결정의 집단적ㆍ사회적 결과, 이 같은 결정이 이루어지는 문화와 가치의 맥락, 그리고 이런 일에 기여하는 과학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유전학에 관한 최근 연구는 유전학 전문직의 관점을 강조한다. Kerr는 유전학자들이 과학과 과학의 응용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전학 정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도 유전학 활용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한다. 과거의 우생학은 ‘나쁜 과학’이나 ‘오용된 과학’일 뿐 자신들과는 무관하며, 오늘날 유전학은 그 책임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솔직한 주장이 아니다. 과학은 사회의 일부이며, 사회적 결과를 낳는다. 즉,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가 적용되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하며, 자신의 신념과 실천을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부 유전학 전문가들은 명백하게 우생학적 시각을 견지한다는 연구도 있다. 이런 전문가들은 유전학 검사를 통해 건강한 아기를 가질 수 있어서 좋다고 주장하며, 특정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특정한 태아의 출생을 막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동성애 유전 소질을 밝혀 낼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으며, 이 같은 이유에서 선택적 유산을 용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폭넓은 인간 행동과 개인의 특성에 대한 유전학적 설명을 점차 신뢰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수용의 경계, 가령 배아 실험 특히〔수정 후 14일까지의 배아를 일컫는〕 ‘전배아(pre-embryo)’라는 용어의 발명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친숙화(familiarisation) 및 탈감각화(desensitisation) 과정을 후퇴시키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주로 산과의사들이 우생학적 태도를 많이 보이는 것 같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유전학자나 유전학 상담사들보다 산과의사들이 임신 여성들에게 직접 조언을 더 많이 하고, 이런저런 유전병을 가진 태아의 유산을 더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테면, 다운증의 경우 유전병 간호사의 94%, 유전학자의 57%가 간접 조언을 한 반면, 산과의사들은 32%만 그렇게 하고 나머지는 직접 조언을 했다. 그들 가운데〕다수는 개방성 척추피열, 무뇌증, 헌팅던병, 다운증, 뒤센형 근디스트로피를 가진 태아의 낙태를 선호했다. 산과의사들이 더 직접적이라는 것을 이 연구는 확인했다.

 우생학이란 ‘유전되는 특질을 통제함으로써 인간을 개선하는 학문’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우생학은 (‘좋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재생산되는 것을 보장하는) ‘긍정적 우생학’과 (‘나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재생산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부정적’ 우생학으로 구분되었다. 한편에서는 수사적 과잉을 피하기 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불행했던 과거의 음습한 분리를 피하기 위해서, 우생학이란 말이 가진 강한 의미와 약한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 ‘강한 우생학’은 1930년대에 벌어졌던 것처럼 국가 개입에 의한 재생산 통제를 통해 인간의 수준을 개선하려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장애인의 생명은 가치 없는 것이다, 그리고/또는 이 사회는 장애인처럼 비생산적인 구성원들을 지원하기 위한 재정적 비용을 감당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판단에 의해 추진되었다. 반면에 ‘약한 우생학’은 비-강제적인 개인의 선택을 통한 재생산 선택 기술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애가 있는 생명은 극도의 고통을 수반한다는 의학적 판단에 의해 추진된다. 수세기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는 강한 우생학적 사고와 약한 우생학적 사고 둘 다 널리 유행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구분을 수용할 경우, 지금의 영국 유전학 실천은 강한 우생학이 아니라 약한 우생학이다. 개인의 선택에 대한, 그리고 고통의 회피에 대한 강한 수사적 언급이 존재한다. 하지만 검사를 모든 사람에게 확대시킨다거나 비용-편익분석을 통해 산전 검사 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균형감을 잃게 할 수 있다. 더욱이 강한 우생학은 유전학적/산과학적 콤플렉스의 ‘발현적 특성’ - 즉, 과정의 어느 한 요소를 명백하게 의도한 것도 아니고 그 요소에 우연히 관련된 것도 아닌 결과지만, 연결된 관련 행위의 결과 - 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ㆍ전문가적 압력이 결과를 결정한다는 맥락에서 임신을 중절하는 개인적 결정들의 조합은 실천적으로는 ‘국가 개입을 통해 재생산을 통제함으로써 인간 수준을 개선’하는 결과를 낳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 드러난 사례가 있다. 키프로스에서는〔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전성의 용혈성 빈혈인〕탈라세미아(thalassaemia)가 있는 태아의 유산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우생학으로 볼 수 있다.

손상 vs. 장애

 산전 검사를 둘러싼 용어법 역시 사회적으로 논쟁거리가 된다. 의사들이 낭포성 섬유증, 연골형성부전증 같은 유전학적 이상을 ‘유전병’으로 부르는 것이 점차 일반화 되고 있다. 그러나 장애운동은 모든 인간의 유전학적 변이에 ‘병’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에 반대한다. 다운증이나 선척성 농(deafness)을 가진 사람들은 의학적 문제와 전혀 무관하며, 아주 건강하다. 장애운동은 손상을 장애인의 삶을 결정하는 특성으로 보는 ‘의료모형’을 거부한다. 장애운동은 장애를 창조하는 것이 사회적 장벽이며, 장애인이 살면서 겪는 곤경은 손상 탓이 아니라 차별과 편견 탓이라고 주장한다. 의료과학 접근법은 (생물학적인) 손상과 (사회적인) 장애를 구분하지 못한다. 손상이란 곧 질병, 아픔, 그리고 저급한 삶의 질인데, 이 모든 것들은 개인의 특성으로만 간주된다. 페미니스트들도 유전학이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젠더(gender)의 상대적 차이를 알지 못한다고 똑 같이 주장했다.

 장애를 유발하는 장벽을 주목한다는 것은, 손상을 철저하게 검사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박이자 사회적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행동에 대한 강력한 지지이다. 그러나 장애운동이 손상을 무시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연구자들은 사회적 억압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하더라도, 손상 역시 중요한 이슈라고 주장한다. 유전학적 검사 논쟁에서 손상을 배제하면 두 가지 결과가 생겨난다. 첫째, 유전학적 검사는 손상 수준에서 작동한다. 철학적으로 볼 때, 장애운동이 손상의 중요성을 낮잡아보면 새로운 유전학적 기술을 통한 손상 제거를 반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어려워 질 수 있다. 장애운동이 손상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고 손상을 가진 생명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 부여에 도전할 때만이, 장애인의 생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자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억압은 손상 이상의 문제라는 주장이 있다. Hubbard는 손상과 인종을 비교하면서, 인종차별주의가 흑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인종적 다양성을 제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부가 까맣다는 것과 손상을 가졌다는 건 다른 경험이다. 특정한 사회적 맥락을 제외하면 피부가 까맣다는 게 본질적인 곤경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손상을 가지면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도 고난, 고통, 조기 사망을 야기한다. 따라서 Hubbard의 주장에는 흠이 있다. 그녀는 ‘모든 장애가 똑 같고 늘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더라도,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똑 같다고 할지라도’ 모든 장애인들을 함께 묶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한 일이 바로 모든 장애인들을 함께 묶는 것이었다.

 장애인의 생명에 대한 윤리적 가치를 방어하면서도 손상의 상이한 영향도 동시에 인정하는 더욱 섬세한 시각을 가져야 할 때이다. 〔연속체의〕한 쪽 극단에서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사회적 결과를 가진 어떤 것이지만 육체적 고통이나 고난은 없다. 그 연속체를 더 따라가면, 작은 키의 결과는 정형외과적 문제와 연결됨에도 점차 편견과 차별과 관련이 되고 있다. 연속체의 반대편 극단에서는, 테이색스병이나 무뇌증 같은 이상은 큰 고통을 초래하고 조기 사망에 이르게 한다. 장애인이 되더라도 생존할 수 있고 가치 있는 존재 양식이지만, 진정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전혀 없이 살아가는 것은 사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주장도 중요하다. 이 연속체는 위험한 비탈길 같은 것이다. 즉, 안락사 논쟁에서도 그랬듯이 삶의 질에 관한 어려운 판단이 요구된다. 하나의 절대적 주장이 논쟁을 봉쇄하고 그 주장이 윤리적으로 더 명쾌할지라도, 하나의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려면 이 문제의 복잡성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핵심이다.

 나는 장애인 스스로 이런 이슈를 놓고 논쟁하고 손상의 차이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손상은 문제를 거의 일으키지 않고 장애를 유발하는 사회적 요인들만 걸림돌이라면, 이상(conditions)이 있는 태아의 유산을 주장하기가 어려워진다. 드물긴 하지만 손상이 불가피한 신생아 사망이나 영구적인 인식능력의 결여를 야기하는 경우에는, 산전에 검사하여 그 같은 이상을 제거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전체론적 입장 - 손상을 가진 모든 태아를 유산한다거나 손상에 기초한 모든 유산을 금지한다 - 은 아주 어렵게 출산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용어 구분 - 유전병과 손상 사이, 혹은 손상과 만성질병 사이, 혹은 장애인과 환자 사이 - 은 주로 이론적이며,〔오히려〕명확해야 할 실질적인 연관성과 차이를 가려버린다.

 장애와 유전학적 인과관계를 이해하는데 세심한 입장이 필요하다. 이 입장은 개인적 자질과 환경적/구조적 요인 모두를 대면한다. 장애인은 손상과 장애의 문제를 경험한다. 손상은 장애인이 되는 결정적 특성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아픔과 손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손상을 가진 자’와 ‘손상을 가지지 않은 자’로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결국, 새로운 유전학은 모든 사람이 몇 개 정도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명 ‘유전학적으로 병들어’ 있다고 말해 준다. 게다가 유전학적 요소를 가진 대다수 이상(disorders)은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기인한다. 약 4,000가지 이상(conditions)이 이 같은 상호작용 때문에 발생한다. 많은 이상들이 간단한 단일-유전자 모형이 아니라 몇몇 유전자의 상호관계 때문에 발생하고, 환경도 유전학적 이상에 영향을 준다. 한 예를 들자면, 당뇨병은 현대 식생활에서 당분의 과다 섭취와 관련되어 있지만, 유전학적 요인도 함께 가지고 있는 이상이다. 오늘날 기본적으로는 환경에 의한 질병을 유전학적으로 검사하는 러시아에 그 증거가 많이 있다. 또한, 유전학은 환경에 의한 질병에 영향을 준다. 만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 담배를 20개비를 핀다면, 폐암은 유전병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유전학적 이상과 특정한 장애는 환경적/구조적 요인과 유전학적/개인적 요인 모두에서 기인한다. 개발된 사회적 장애이론은 장애인의 손상 경험과 장애 경험 두 측면을 모두 아우른다. 〔그리고〕적절한 유전학 모형이라면 유전병 개념을 손상과 장애를 가진 삶에 대한 다면적 이해로 대체함으로써 유전자형뿐만 아니라 사회적 요인까지를 포함한다.

장애권 vs. 낙태권

 일부 장애권 지지자들은 낙태를 명백하게 비난한다. Society for Protection of Unborn Child의 장애인 분과는 오래 전부터 BCODP의 회원단체다. 이처럼 장애권은 여성의 선택권과 대립하는 말로 사용될 때가 있다. 또 어떤 장애인들은 전체적으로는 여성의 선택권을 옹호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손상을 이유로 한 임신 중절 선택권에는 반대하려고 한다. 현재의 낙태법은 손상을 입은 태아를 차별한다. 1992년 Human Fertilisation and Embryology Act은 ‘심한 핸디캡을 가진’ 신체적ㆍ정신적 기형인 경우에는 24주 시한을 넘겨도 유산을 허용한다.

 나는 이 세 가지 입장 모두가 논리적ㆍ윤리적ㆍ정치적 이유에서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법률은 손상을 입은 태아와 손상을 입지 않은 태아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 모든 임신에 동일한 시한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동시에, 낙태권은 보호받아야 하며 유산이 타당한 이유가 여러가지다. 가정 환경, 연령, 경제적 상황 등을 비롯하여, 손상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모든 조건에서는〔여성의〕낙태권를 인정하지만,〔태아의〕손상을 이유로 한 낙태에는 반대한다는〔일부 장애인들의〕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경우에서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더라도, 손상을 이유로 한 낙태를 금지하면 여성의 선택권은 훼손당할 것이다.

 더욱이 개인들이 선택적으로 임신 중절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꼭 우생학인 건 아니다. 만일 여성들이 자신의 일이나 경제적 사정 때문에 아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여성이 손상을 가진 아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역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아이는 비용과 보호와 관련된 아주 복잡한 요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Anne MacLean은 장애인의 생명은 가치 없는 삶이라는 이유로 인한 낙태와 장애 어린이를 돌 볼 형편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 하는 낙태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애 평등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대답은, 부모가 임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더 나은 복지 서비스와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오늘날 선택적 유산의 기초가 되는 결정은, 장애인 출산을 염려하는 우생학적 거부감이 아니라 장애 어린이 양육의 사회적 함의와 관련될 때가 더러 있다.

 일부 장애권 지지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선택권은 옹호하면서 성별 선택에는 반대하듯이 여성의 선택권은 옹호하지만 산전 검사에는 반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Asch & Geller는 우생학적 이상을 가진 태아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여아를 선택하지 않는 것보다 윤리적으로 더 쉽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초기 인종 문제에서 제기되었던 비슷한 이유를 들어 여자 아이라는 것은 손상을 가진 아이라는 것과는 다르다면서 이 같은 비교를 기각했다. 게다가 동성애 소질이 유전된자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만일 그렇게 입증될 경우, 자유ㆍ선택ㆍ평등에 관한 아주 어려운 이슈들이 제기될 것이다. 이 때 여성과 동성애자를 위한 정의와 평등에 대한 정치적 요청이 있을 경우, 여성의 선택권은 보편적 권리가 될 수 없다는 건 확실하다. 그러나 손상의 경우에는 이렇게 단순 비교를 할 수 없다. 심각한 육체적 문제를 야기하는 이상(conditions)도 일부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산전 검사를 옹호할 때 개인의 선택 및 소비자 요구 모형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부모가 태아의 성별 선택을 요청하면 대개는 반대한다. (비록 최근 연구를 보면 29%가 성별 선택에 응하고, 이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는 있지만.) 이중 기준이 작동되고 있는 셈이다. 즉, 의사들은 특정한 도덕적 요인 안에서만 부모의 바람을 따르거나, 아니면 손상을 가진 아기의 출산을 막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만 특정한 성별을 가진 아이의 출산을 막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본다. 아울러, 선택을 하나의 진공 상태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즉, 개인적 선택은 더 폭넓은 사회적 판단과 압력에 의해 구성되고 영향을 받는다. 끝으로, 개인적 선택의 누적된 결과는 특정 결과를 향한 일종의 집단 이동이다. (가령, 인도의 성비 왜곡)

 폭넓은 사회적 담론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장애 평등, 성 평등을 촉진하기 위한 공공 교육을 받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논쟁을 한다는 의미이다. 특정한 출산 결정을 금지하는 것 보다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차별에 항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장애인이든 여성이든 관련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우생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유전학과 산부인과학에 내재한 이 같은 요소들이 개선되어야 한다. 이 논문의 나머지 부분은 이두 분야를 다룰 것이다.

우리가 없는 자리에서 우리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말라.

 목소리(voice) 이슈와 관련하여 강조할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유전학 체제는 새로운 유전학 기술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독차지한다. 둘째, 손상의 함의를 이해하고 개인적ㆍ사회적 산전 검사 옵션에 관한 적절한 결정을 하려면, 우리는 직접적으로 유전학적 이상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장애학 연구자들은 장애인이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서 대해 발언권을 가지지 못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장애인의 삶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는 장애인 당사자라는 점을 도외시한 채 전문가, 대표권이 없는 자선단체, 그리고 정부가 장애와 관련된 것들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출산 기술이 여성들에게 특정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무시될 때가 더러 있다. 여성의 경험적 지식이 배제되고,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유전학에 관한 연구서들은 젠더맹(gender blind)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같은 지적은 장애와 유전학에 관한 서적에서 반복해서 나타난다. 각종 정부 위원회는 장애인들을 배제하고 언론은 과학자들의 목소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탓에, 장애인의 대표권이 설 자리가 없다. 진보적인 연구자들은 장애인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Ruth Bailey는 이렇게 주장한다.

정치가, 과학자, 의사들은 장애인이 산전 검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들이 산전 검사 논쟁에 체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장애와 손상 경험의 복잡성에 대한 일반적 통찰력을 갖게 되고, 지금의 잘못된 개념들이 상당 부분 교정된다.


새로운 유전학의 사회적ㆍ심리적 함의에 관한 최근 저작에는〔흑인 유전병의 일종인〕겸상적혈구빈혈증을 가진 사람을 비롯하여 1인칭 해명(first person accounts)2)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여기에 대해 Marteau와 Richards는 이렇게 주장한다.

 감염된 태아를 가진 것을 알게 되면, 우리들 가운데 상당수는 우생학적 주장을 수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겸상적혈구빈혈증은 그 징후와 진단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의사가〕우리와 충분하게 상담하지 않고 어린 아이를 가지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은 다소 비도덕적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중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되고,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없고 수명이 극히 짧을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 실제로, 나는 감염된 아기를 가질지도 모르는 임신을 해서 관습적인 검사를 받아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나는 유산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보균자를 가진 아기를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 생각은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Marteau와 Richard의 책은 1인칭 해명의 문제점 몇 가지를 조명한다. 예를 들자면, 유전병에 감염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있고 페미니즘적 관심사에 관한 일반적인 논문도 한 편 있지만, 장애권 관점으로 쓴 글은 한 편도 없다. 개인적 관심사에 관한 이슈를 제기하는 것보다는 장애인의 집단적 목소리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용자’ 또는 ‘환자’ 또는 ‘감염자’의 목소리는 대표성이 없거나 정치적 이슈를 망각할 때가 더러 있다. 게다가 장애를 가진 개인들은 자기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의존한 채 유전학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장애인들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고통 때문에 산전 검사를 환영할 것이다. 또 다른 장애인들은 자신과 같은 존재를 미연에 방지하는〔유전학적〕실천을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산전 검사를 반대할 것이다. 장애인의 생명 가치와 다양한 시각에 대해 합리적으로 주장하려면 이와 같은 정서적인 수준을 뛰어 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논쟁은 단지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공적 이슈와 집단적 관점에 관한 것이다.

1) ‘brave new world’는 원래 Shakespeare가 에서 사용한 것을 Huxley가 자신의 소설 책 제목으로 삼았다. Huxley는 이 소설에서 생명공학과 기계문명으로 인한 인간성과 주체성의 상실, 물질만능주의의 팽배, 예술과 감성적 사고 경시, 그리고 전체주의적 사고 등을 제시함으로써 디스토피아의 참혹함을 보여 준다.
2) 3인칭 해명(third person account)은 사람이 “빨간색이 보인다”고 말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망막과 충돌하는 특정 파장의 빛과 같이 오직 객관적인 사건들만을 인식하는 반면, 1인칭 해명(first person account)은 빨강의 감각과 같이 주관적인 사건에 관한 것이다.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는 1인칭 경험들을 뇌로 사상(寫象, mapping)하는 프로그램을 신경현상학(neurophenomenology)이라 이름 붙였다. 여기서 ‘현상’이란 의식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말하며, 그러한 현상의 본질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학문이 ‘현상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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