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단 메뉴 바로가기
  2. 본문 바로가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야기 프리즘
HOME > Webzine 프리즘 > Webzine 프리즘
본문 시작

webzine 프리즘

프리즘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분기마다 발간하는 웹진입니다

지난호바로가기 이동
컬쳐포유 최강문의 영화이야기 단편영화 가리베가스, 선화들을 기억하라, 최강문(요술피리대표작가)



단편영화 가리베가스』, 선화들을 기억하라!
최강문(요술피리대표작가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마도 언어가 생겨난 이래 이야기야말로 인류사회를 지배해온 거대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세상은 바뀌고 있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설화와 민담은 종이를 거쳐 필름으로, 디지털 파일로 무대를 옮겨가고 있다. 이리저리 매체를 옮겨 다니는 이야기의 생존력이야말로 질경이 못지않다. 아무렴, 인류역사를 꿰뚫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 사이 이야기로서의 영화에도 엄청난 변화가 오고 말았다. 어쩌면 이야기 구조를 넘어선 변화일지도 모른다. 하루 반드시 6차례 상영이 가능하게끔 재단된 러닝타임에 당구장, 피시방, 커피점에 비해 너무 높지 않을 정도의 가격…. 산업으로서의 영화는 가히 놀라울 지경으로 변모했다. ‘대박’을 좇는 투자자들과 영화판을 쥐고 흔드는 배급사, 거기 맞선 멀티플렉스 영화관들 그리고 어마어마한 출연료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제작비, 흥청망청 광고비를 자랑하는 블록버스터까지…. 어느새 영화는 자본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의 세계에 블록버스터와 흥행, 이윤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산업으로서의 영화가 있다면, 이야기로서의 영화도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아직 죽지 않고서.
문제는 이야기로서의 영화가 무척이나 불편하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광고문처럼 관객들의 엄청난 호기심을 유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계의 거장이 숨을 고르며 만든『천년학』이나 깐느로부터 화려하게 복귀한 『밀양』을 보면 드는 생각도 그러하리라. 그렇기로서니, 이들 영화를 재미없고 흥행성도 없는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달리고 부서지고 폭발하고 속고 속이는, 그래서 몇 번씩 결론을 뒤집고 또 뒤집는 반전 스토리가 줄 수 없는, 그저 불편한 이야기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선화는 가리봉에 산다.”
영화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했다.
구로공단 노동자인 주인공 선화는 가리봉동에 있는 2층 쪽방에 산다. 쪽방집. 그러니까 녹슨 대문을 밀쳐 들어서면 1층에 방방방방방…, 그리고 2층에 또 방방방방방…. 나무로 된 현관문을 열면 연탄아궁이가 있는 좁직한 부엌이 나오고, 방문을 열면 두 평 남짓한 조그마한 방 한 켠으로 손바닥만한 창문이 있는 곳. 벌집처럼 빽빽하니 붙어있다고 해서 벌집이라고도 하고, 칸칸이 닭이 한 마리씩 들어가 있는 닭장을 닮았다고 해서 닭장집이라고도 불렸던 가리봉만의 독특한 주거형태다. 30여 년 전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쪽방집은 골목골목마다 비슷한 모습으로 지어졌다.
영화 속 선화는 다니던 공장이 멀리 외곽으로 이전한 까닭에 이사를 떠난다. 이삿짐이래야 이불 몇 가지와 옷, 주방도구 몇 점. 이삿짐 중 가장 비싸고 덩치 큰 장롱은 그만 부서지고, 선화는 대문 앞에 부서진 장롱을 버려둔 채 떠난다. 1톤 트럭 조수석의 선화에게 그 동네에 남은 임신한 친구는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뭐라고 했더라…? “잘 살아”라고 했을까? 텔레비전 광고에도 자주 등장했던 “부~자되세요.”라거나 핸드폰으로 전화 걸고 받을 때 자주 듣는 인사말 “행복하세요.”는 결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선화는 떠났다. 가리봉을 떠나기 전 선화는 다음 세입자를 위해 ‘부엌의 수채 구멍은 물을 내릴 때 살짝 들어줘야 하고, 빨래는 지붕에 널면 잘 마른다.’ 등등 메모를 남겨두었다. 선화가 떠난 뒤 외국인노동자 두 사람이 그 방으로 이사를 온다.


케이블방송을 통해 본 단편영화 『가리베가스』(감독 김선민, 2005년, 16mm Beta, 상영시간 19분)는 그저 잔잔하기만 하다. 떠나는 자의 심경이 그러하리라. 뭔가 아쉽고, 착잡하고…. 보는 자의 심경 또한 그러했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것, 하지만 결코 잊지 못할 것…. 감독은 말했다. “장농은 선화의 꿈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못다 이룬, 아니 부서진 꿈으로 인하여 떠나는 자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다. 영화의 무대가 된 가리봉은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지금까지도….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위치한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지금은 행정구역이 바뀌어 금천구로 바뀌었지만, 그 시절 그곳은 70년대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수출산업의 전진기지, 구로공단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눈물과 한숨의 땅이었다. 동생 학비를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10대 누이들이 ‘산업역군’이라는 이름 아래 하루 12시간, 14시간 노동을 견뎌내야만 했던 곳. 여름철에는 뜨겁게 달구어진 슬레이트 양철 지붕 아래 비지땀을 흘리며 일해야 했고, 겨울이 되면 시멘트 블록을 얼기설기 쌓아 만든 담벼락을 뚫고 부는 삭풍에 곱은 손 호호 불어 녹여가며 일을 해야 했던 곳.
늦은 밤, 잔업에 지친 노동자들이 으슥한 고가 밑을 지나, 가리봉 시장통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스며들 듯 흩어지던 가리봉 쪽방촌. 그곳은 영화 『가리베가스』의 무대가 되기 이전에도 여러 작품에 소재로 등장한 적이 있다.


소설가 신경숙은 자전적 소설인 『외딴 방』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 거기였다.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 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신경숙의 『외딴 방』 중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또한 가리봉 쪽방촌을 두고서 “‘난쏘공’이 시작된 곳”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0년대, ‘노동3권 보장하라’, ‘민주노조 탄압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권력과 맞서 싸웠던 사람들 또한 바로 이곳 사람들이었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그 시절, 노동자 시인 박노해가 보았던 시장 거리의 활기와 좌절, 분노 또한 이곳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힘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구로공단은 바뀌고 말았다. IMF 한파와 더불어 저임금에 의존하던 노동집약형 기업들은 속속들이 공장 문을 닫았다. 공단과 벌집촌을 오가던 노동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주인공 선화처럼. 곳곳마다 노동조합의 공장 이전 반대투쟁과 고용승계투쟁이 벌어졌지만, 끝내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문 닫은 공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어졌고, 새로운 형태의 빌딩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늘, 공단으로 가는 길은 화려해졌으며, IT기업들이 대거 입주한 고층빌딩으로 인해 공단은 더욱 화려해졌다. 푸른 작업복의 노동자들은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IT분야 종사자가 대신했다. 구로공단의 이름 또한 사라졌고, 디지털단지라 불리기 시작했다.
공단이 바뀌면서 가리봉도 덩달아 달라졌다. 일터를 잃은 수많은 선화들은 떠났고, 그 자리를 중국 교포와 외국인 노동자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악착같이 일해 돈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선화의 꿈’은 이제 중국교포와 외국인노동자의 코리안 드림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조만간 쪽방촌은 헐리고 주상복합빌딩과 호텔, 백화점이 들어서는 재개발 사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수많은 선화들의 가리봉은 이제 없다. 그렇다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은 누구의 몫인지를. 높다란 빌딩과 화려한 네온사인, 거리의 반짝이는 자동차와 그 환한 미소들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의 선화는 어디로 떠났냐고.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어제의 선화들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이 짊어진 역사적 채무를. 매우 거북할지라도. 국민소득

프린트하기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