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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포유 역사속 장애인열전(1) 장애인도 과거를 보아 관직에 오르다, 조선시대 장애인 정치가들, 정창권 고려대교수


장애인도 과거를 보아 관직에 오르다 -조선시대 장애인 정치가들-
정창권(고려대교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렇거늘 옛날 장애인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편견에 불과한 듯하다. 전통사회에서 장애인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엔 장애인이라 하여 천시되지 않았고, 자신들의 특성에 맞는 직업이 주어졌으며, 양반층의 경우는 과거를 보아 높은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다. 나아가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면 때때로 이름난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즉, 그들은 엄연한 사회의 한 일원이었던 것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과거를 보아 높은 관직에 올랐던 조선시대 장애인 정치가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전통시대엔 등이 굽은 척추장애인, 이른바 '곱추'도 사회에 진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세종대에 우의정과 좌의정, 곧 오늘날 국무총리의 지위에까지 오른 문경공 허조(許稠: 1369~1439)는, 어려서부터 얼굴이 야위어 마치 깍아놓은 듯하였고, 또 등이 굽은 사람이었다.
평소 그는 경서와 사서 등 학문에 정통하였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뭇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 매양 새벽닭이 울 때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과 띠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었지만, 전혀 피로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또 항상 나랏일을 근심하고 집안일에는 말이 없었으며, 국정을 논의할 적에는 자기의 신념을 굳게 지키고 남을 쫓아서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가법(家法)도 매우 엄격하게 하여 자식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집안의 사당에 고하고 벌을 주며, 노비들에게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법에 따라 다스렸다. 허조는 특히 태종, 세종을 도와 조선 초기 유교식 예악제도를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리가 하나 뿐인 사람, 곧 지체장애인도 일반인과 더불어 살았고, 어떤 지체 높은 장애인은 임금과 지속적으로 교유하며 친근한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인 숙종대의 윤지완(尹趾完: 1635~1718)은 경상도 관찰사와 병조판서 등을 거쳐 좌참판, 우의정까지 지낸 인물인데, 기개와 도량이 훌륭하고 청렴 검소한 성품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데, 숙종 20년 윤지완은 정승(우의정)에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각질(脚疾), 곧 다리의 질병 때문에 관직을 그만두었고, 곧이어 왼쪽 다리가 썩어서 절단했으며, 결국엔 다리가 하나 뿐인 지체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 그가 다리의 병이 심해져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요청하자, 숙종이 애써 만류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윤지완은 무려 79차례나 간청해서 겨우 사직을 허락받았는데, 임금은 어의(御醫) 백광현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해주었다.
이후 윤지완이 고향인 안산으로 물러가 거주한 지 10년이 넘었어도, 평소 그를 중히 여긴 임금이 계속 친근하게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숙종은 여러 차례 윤지완을 불렀는데, 독대(獨對)할 때는 목발을 짚거나 남의 부축을 받고, 또 엉금엉금 기기까지 하는 윤지완을 기쁘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윤지완이 한쪽 다리를 잃게 된 내력은 이러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윤지완은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는데, 동상으로 무릎이 썩어 들어가도 오직 시묘살이에만 열중하였다. 그래서 결국 병이 심해져 한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 이후로 사람들은 윤지완을 일각(一脚) 정승, 곧 다리가 하나 뿐인 정승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의 친필 글씨가 《근묵(槿墨)》이란 서첩에 실려 지금까지 남아있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간질(癎疾) 장애가 있어도 과거를 보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예컨대 중종대 우의정 권균(權鈞: 1464~1526)은 간질 때문에 해마다 침 맞고 뜸 뜨면서 치료를 해보았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상소하여 사직을 요청하였다.
"신은 숙환(宿患)인 간질 때문에 해마다 침 맞고 뜸 뜨면서 겨우 벼슬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많은 데다가 고질병까지 겹쳐서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하므로 혈기가 고갈되었습니다. 다방면으로 치료를 해보았지만 전혀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짐을 벗겨 한가롭게 지내면서 안심하고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이보다 큰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임금은,
"아니다! 말미(휴가)만 더 주도록 하라."
라고 극구 만류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끝으로 선천성 기형의 장애아도 별다른 탈 없이 자라나서 능력만 허락한다면, 과거를 보아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조선전기 권절(權節: 1422~1494)은 처음에 태어날 때 두 손의 여덟 손가락이 모두 붙어 있었다. 그래서 부모가 한쪽 손의 네 손가락 가운데를 각각 잘라 두 손가락만 붙게 하였다.
권절은 자라면서 기운이 점차 빼어나게 되었고, 세종시절 문과에 급제하고 단종시절엔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평소 수양대군과 친분이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찾아와 계유정난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으나, 권절은 듣지 못하는 사람으로 가장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그 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된 뒤에도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했지만, 광질(狂疾), 곧 정신분열증을 구실 삼아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단종에 대한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남효온을 대신하여 말하기도 한다. 그는 저서로 《율정난고(栗亭亂稿)》를 남겼으나, 현전 여부는 미상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장애인은 양반층의 경우엔 과거를 보아 높은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장애인이라 하여 차별하지 않았고, 일반인과 똑같이 능력 위주로 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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