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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호의 장애학이야기 첫번째 이야기 마당. 장애학 탄생의 역사적 배경, 윤삼호(한국DPI 정책팀장)

첫번째 이야기 마당. 장애학 탄생의 역사적 배경
윤삼호(한국DPI 정책팀장



요즘, 우리나라 장애인 사회에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이라는 낯선 이름이 떠돌고 있다. 이미 의학, 사회복지학, 특수교육학, 재활공학 등이 있는데, 장애학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의구심을 가질 독자들도 더러 있을듯하다. 하지만, 기존 장애 관련 학문들 중 장애학은 전혀 다른 접근법이다.


예를 들면, 의학은 장애인을 치료의 대상으로, 사회복지학은 서비스의 대상으로, 특수교육학은 교육의 대상으로, 재활공학은 재활의 대상으로 고정시켜 놓고 접근한다. 이들 학문들은 장애인들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양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장애인들은 분석의 대상일 뿐, 그들의 경험과 가치는 무시되기 일쑤다. 하지만 장애학은 장애인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장애와 장애인을 제약하고 억압하는 사회구조와 환경을 주목한다.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ㆍ역사적 조건과 장애의 생산/구성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장애학의 주요 관심사이다. 물론 장애인 당사자들의 경험이 모든 분석의 기초가 된다. 결과론적으로, 장애학은 기존 장애 관련 학문들과 협력적 관계라기보다 적대적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장애학은 1970~80년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두 나라 장애학은 그 배경과 전개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 미국 장애학은 인류학, 문화이론, 인권운동, 소비자운동의 전통이 강하다. 이는 미국의 장애운동이 1960~70년대 흑인운동, 여성운동, 게이운동과 같은 소수자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미국은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은 치열한 흑인운동의 결과였다. 당시 흑인들은 ‘통합교육’, ‘공공장소와 일터에 완전한 접근 보장’, ‘분리 반대’ 등을 외쳤는데, 이런 주장들은 그 뒤 미국 장애운동의 슬로건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 결과, 1973년에는 재활법이 개정되어 504조에 건축물의 장벽 제거; 장애인 고용 보장; 장애인 대학생의 교육권 보장이 규정되었다. 1975년에는 장애아동교육법이 제정되어 만3세~21세 사이의 장애아동 및 학생들이 통합된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에는 미국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ADA)이 제정되어 적어도 법률적 측면에서 장애인 인권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다른 소수자 운동들은 장애인들의 투쟁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가령 동성애자들은 1969년에 벌어진 게이바 스톤월(Stonewall) 투쟁을 기념하여 매년 가두행진을 벌인다. 행진은 게이 집단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게이 사회의 저항성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또한 미국 흑인들은 프리 라이더(Free Rider) 운동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버스 점거와 같은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저항 문화는 미국의 대표적인 중증장애인 저항 조직인 ADAPT의 운동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참고 - ADAPT는 원래 ‘American Disabled for Accessible Public Transit(접근할 수 있는 대중교통수단 쟁취를 위한 미국 장애인들)’의 약자였으나, ADA가 제정된 뒤에는 ‘American Disabled for Attendant Program Today(활동보조인 프로그램 쟁취를 위한 미국 장애인들)’로 단체명을 바꾸었다.) ADAPT는 오늘날까지 거리행진과 점거를 주요한 투쟁 수단으로 삼고 있는 대표적인 미국의 중증 신체장애인 단체이다. 이러한 장애인권 투쟁을 통해 장애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1970년대 후반에는 미국 장애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 장애운동과 장애학은 정치 이슈보다는 주로 인권 이슈에 집중되어 있다. 장애운동은 직접적인 대정부 투쟁보다는 소송이나 로비를 통한 정치를 선호하였고, 장애학은 장애인 개인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상호작용론의 전통이 강하다. 이 점이 영국 장애학과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장애학은 주로 사회학, 정치경제학, 정치적 운동에 기초하고 있다. 미국과 달리 좌파의 전통이 강한 영국에서는 복지국가(welfare state)모델을 둘러싸고 장애운동과 국가가 직접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경우가 많아 장애학도 이런 조류를 반영한 것이다.


영국 장애운동과 장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UPIAS(Union of the Physically Impaired Against Segregation, 분리반대신체장애인연맹)의 등장이다. UPIAS는 1972년에 출범하였는데, 영국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전 세계에서 최초로 결성된 장애인 당사자 정치조직이다.


UPIAS는 폴 헌트(Paul Hunt)라는 중증장애인이 장기거주시설을 나와서 만든 조직이다. 헌트는 시설에 있을 당시 ‘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소비자 단체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는 내용을 담은 짧은 글을 가디언에 싣는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장애인 시설에 전혀 관심이 없던 지식인들이 이 글을 읽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부터 많은 학자들과 시민들이 장애인 거주시설을 직접 방문하고, 그 실상을 알게 된다. 마치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우리나라의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 현장에 뛰어든 것처럼. 결국, 헌트는 바깥 세상 사람들의 도움으로 시설을 나와 그들과 함께 UIAS를 창립한다. UPIAS는 1976년에 <장애의 기본원리 Fundamental Principles of Disability>라는 문건을 발표하는데, 여기에 장애인 당사자의 시각으로 정리한 ‘장애 정의’가 들어 있다. UPIAS는 장애를 ‘신체적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사회 활동으로부터 배제시키는 동시대 사회 조직에 의한 불이익이나 제약’으로 정의하였는데, 손상과 장애를 분리하는 이런 정의는 그 당시로는 혁명적이었다. 훗날, 영국 장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마이크 올리버(Mike Oliver)는 UPIAS의 장애 정의를 바탕으로 사회적 장애모형 정립한다.


UPIAS를 비롯한 영국의 장애인 당사자 조직들은 빈곤ㆍ주거ㆍ분리ㆍ사회통합ㆍ소득보장과 같은 이슈들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정치적 지향을 분명하게 한다. 특히 1980년 우파 정부가 등장하면서 장애인 서비스가 축소되자, UPIAS가 중심이 되어 장애인 우산조직인 BCODP(British Council of Disabled People, 영국장애인협의회)를 결성되었다. BCODP는 전국 규모의 투쟁을 조직하여 장애인 정치운동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였다. 장애학도 이에 발맞추어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영국 장애학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경험과 요구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장애를 가진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적 성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장애학을 정식 과목으로 개설한 대학이 아직은 없다. 외국에서 장애학을 전공하고 와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부 장애학자들이 있지만, 아직은 그 수가 워낙 적다. 그래서 장애운동이 ‘노선 없는 실천’만 거듭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루빨리, 한국에서도 운동과 이론이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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