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과 무존재
얼마 전까지 인류사에서 인간의 대다수는 미천한 존재였다.
물론 문자해독권을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은 신의 뜻이나 세상의 이치를 안다는 명분 하에 인간으로 취급되었다. 무력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의 일부도 인간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머지 대다수는 미천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 나머지 다수를 소인, 어리석은 작은 자로 칭했으며 더 나아가 비인간, 동물로까지 인식했다. 사제, 양반 혹은 브라만으로 칭해지는 인간들 그리고 소인 혹은 미물로 칭해지는 인간들. 그 사이에는 많은 차이들이 있었지만, 그 차이들의 대강은 결국 어디에 살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 수준이었다.
다수의 사람들에겐 의식주에 관한 결정권이 없었으며, 그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물건처럼 공여되거나 팔려 다니는 그런 동물스런 존재들이었다. 자유를 향한, 자기결정을 향한, 인간다움을 향한 해방운동의 역사는 그래서 전 인류사를 관통한다. 농민해방, 노동자해방, 민족해방, 여성해방, 흑인해방...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도 지겠다는, 자결의 의지를 향한 해방운동의 면면들이다. 저 긴 인류사적 과정으로서의 해방과정을 통해 이제는 많은 인간 집단들이 인간 취급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일단의 사람들은 여전히 미물이다. 그들 중에 장애인이 있다. 근대 영국의 수용시설 베들람에서 일요일에 1페니씩을 받고 장애인들을 구경시켰을 때 그들은 동물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장애인의 삶은 지금도 인간스럽지 못하다. 학교에서 따돌림의 대상이고, 공원에서 놀림의 대상이고, 식당에서 거지취급의 대상이다. 경우에 따라 장애인들은 현대사회에서 동물을 넘어 무존재이다. 저 위대한 오르지 못할 계단들로만 만들어진 집, 공원, 지하철, 버스 승강장 등 현대의 구조물들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장애인의 사회적 무존재성을 어렵지 않게 감지한다.
저 계단을 만든 사람들이나 이용하는 사람들의 삶과 인식 속에 장애인은 없다.
척수장애를 갖기 전에 내가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