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단 메뉴 바로가기
  2. 본문 바로가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야기 프리즘
HOME > Webzine 프리즘 > Webzine 프리즘
본문 시작

webzine 프리즘

프리즘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분기마다 발간하는 웹진입니다

지난호바로가기 이동
컬쳐포유

문화 에세이프리즘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

학교와 직장과 지역과 동떨어져

 “언제부터인가 나는 스무 살까지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 나이까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대 후반까지는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현실을 외면하려는 듯이 닥치는 대로 책만 읽었다. 50권짜리 전집을 1권부터 50권까지 읽고는 다시 50권부터 1권까지 읽는 식이었다.
그러다 라디오에 글을 써서 보내고 잡지에도 글을 쓰게 되면서 편지 친구들이 생겼다. 그렇게 ‘사랑의 고리’(천주교 장애여성 기도공동체)도 알게 되었고 다른 장애인들도 알게 되었다.”(박영희, “장애여성으로 산다는 것”, 당대비평 2001년 여름호)

  어느 한 장애여성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개인차는 있지만,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장애인의 삶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렇듯 교육, 취업의 기회 자체가 막혀 있어 일찌감치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우리 장애인들도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간다. 아니, 살아있는 한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은 사람들과 서로 부딪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동시에 세상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회참여 기회가 막혀 있는 우리 장애인들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나? 비장애인들은 보통 거의 예외 없이 학교라는 사회, 직장이라는 사회, 지역이라는 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그 안에서 울고 웃고 부대끼곤 한다. 그 밖의 종교, 친목, 사교 등을 목적으로 하는 작은 사회들은 개인에 따라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그것 역시 학연, 지연 또는 직장생활을 통해 얻은 사회적 관계망을 활용해 재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는 태생적 가족이야 개인의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거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2차적 가족을 구성하게 될 경우에도 어떤 학교, 직장, 지역에 속해서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는지에 따라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장애인들로서는 학교, 직장, 지역이라는 사회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이루어내는 비장애인들의 소통방식을 감히 흉내내기 힘든 기본적인 조건을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 장애인들의 활동범위는 지극히 협소하다. 물론 장애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이 도저히 문밖에 나설 수 없도록 만드는 환경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집안에 갇혀 지내는 우리들이 세상과 소통하고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 역시 지극히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책읽기, 라디오 듣기, 편지쓰기... 지극히 제한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기에 ‘골방문화’라고 일컬어질 수 있을 제한적인 소통방식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우리들의 문화임에 틀림없다.

책읽기와 편지 쓰기

  우리 어렸을 적에는 책이 귀했다. 그래도 바깥활동이 적거나 아주 없었던 우리들에겐 책이 간접으로나마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과 접촉하게 해주는 좋은 매개체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나 역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무엇보다 사람냄새가 그리웠기에 세상에 뛰어들어 직접 부딪치며 성장할 수 없는 여건을 그렇게라도 보상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계적인 명작보다 제법 어른스런(?) 소설들을 즐겨 읽었는데, 그건 유독 조숙해서가 아니라 내게 책을 골라 읽을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린 보기 드문 장애여성이었지만, 학교 도서관에는 책이 별로 없었고, 지금처럼 도서관이 흔했던 것도 아닌 상황에서 보고 싶은 책을 직접 사서 읽을 형편이 아니었기에 집안에 굴러다니는 책들을 섭렵해나갔다.

  다행히 우리집에는 삼촌들이 결혼 전 읽었던 책들을 비롯해서 엄마가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서 사들인 전집들이 꽤 많았고, 우리 형제들은 이사 때마다 그 책들을 거의 버리지 않고 열심히 싸갖고 다녔다. 그래서 우리집에 있던 헤르만 헷세와 헤밍웨이전집, 그리고 대망이라는 일본대하소설 등등이 내 먹잇감이 되었으며, 간간이 직장에 다니는 언니들이 사들이는 당시의 베스트셀러들도 섭렵하였다. 그때는 최인호, 박범신 등의 대중소설이 등장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그때 나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인생의 비애를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소설보다 더 짜릿하고 재미있었던 건 당시 유행하던 ‘선데이서울’이라는 주간지였다. 그 잡지 안에는 어른들에게 귀동냥으로 얻어듣거나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접할 수 있는 세계, 그 이상이 있었다. 나는 선데이서울을 통해서 교과서 밖의 현실에 눈을 떴고 내가 제법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었다.

  책장 너머로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갔다면 직접 소통하고픈 욕구는 편지를 통해 발산했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펜팔이 유행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써낸 위문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오는 군인아저씨나 내가 다녔던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벽지 어린이들과 펜팔을 했다. 내가 보낸 위문편지에는 보통 너댓 통의 답장이 왔는데, 나는 그들에게 꼬박꼬박 성의 있게 답장을 해주었다. 더러는 내 편지를 받은 상대방의 옆 사람들이 덩달아 내게 편지를 보내는 일도 있어 내겐 펜팔친구가 꽤 많았다. 나는 그 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한두 사람과 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때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편지는 누군가를 직접 대면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불편함을 굳이 감수하지 않고도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좋은 매개체였다. 가끔 뜻하지 않은 오해가 생겨 마음아파하거나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답장이 오지 않다가 결국 연락이 두절되어 상심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처럼 전화가 발달했다면 굳이 겪지 않을 일이었을 테지만, 속도가 느린 만큼 오래 곱씹는 관계들도 나름대로 좋았었다.

라디오와 인터넷

  나 어릴 적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그야말로 라디오의 전성시대였다. 라디오로 뉴스도 듣고 노래와 연속극도 즐겼다. 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사람들의 사연은 어린 내가 듣기에도 절절했다. 지금도 중증 재가장애인들은 라디오를 즐겨듣는 것 같다. 아직도 라디오에는 텔레비전에서 느낄 수 없는 사람 냄새가 남아있어서일까? 사실 텔레비전을 틀었다 하면 얼짱, 몸짱들이 판을 친다. 하다못해 행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사소한 답변을 듣는 프로에서조차 웬만한 인물이 아니면 편집 대상이다. 장애인도 예외는 아니다. 성공한 장애인이거나 빼어난 외모여야 한다. 여지없이 불쌍한 장애인으로 그리려 해도 일단 그림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나마 라디오에는 보통사람들의 울고 웃는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라디오를 들으며 위안을 얻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는 장애인들이 꽤 있다. 4~5년 전쯤 불교방송에서 하던 ‘그리운 등불 하나’라는 라디오 프로에 일주일에 한번씩 고정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한 방송을 들은 지역의 한 장애인으로부터 가끔 전화를 받으면서 그런 사실을 처음 접하고 의외였던 기억이 있다. 그때 ‘요즘 세상에도 라디오를 열심히 듣는 사람들이 있구나!’ 생각했었다. 올해로 25주년을 맞았다는 KBS 제3라디오의 ‘내일은 푸른 하늘’이라는 장애인 프로가 그토록 장수할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청취하고 있는 장애인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줄 안다. 이 프로의 애청자들이 만든 모임도 지속되고 있다고 하니 장애인들에겐 라디오가 아직도 유효한 매체 역할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초고속 정보화시대를 달리고 있는 지금 시대에 역행하고 있는 듯한 독특한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허나 정보화가 급속도로 진행될수록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여성, 노인, 장애인들은 더욱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임을 감안한다면 그리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닐 것이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 장애인들도 안방에서 정보와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곧 도래할 것처럼 장밋빛 환상을 가졌었지만, 인터넷 이용률이 세계 최고라는 지금의 한국에서 장애인들은 얼마나 인터넷 접근이 자유로운가? 장애인들이 세상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장벽이 인터넷으로 인해 과연 조금이나마 허물어졌는지 묻고 싶다. 아마도 인터넷이 분명 장애인들에게 편리한 공간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사이버 커뮤니티 하나 없는 현실이 이에 대한 답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시대를 거꾸로 살아가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도 당분간은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울고 웃는 장애인이 존재할 듯싶다.

프린트하기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