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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스토리 : 마리 앙뜨와네뜨와 모차르트의 도시 비엔나


마리 앙뜨와네뜨와 모차르트의 도시 비엔나 현근식 연구위원(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기를 타고 오랜 시간 비행했던 나는 어느 정도 시간에 대한 관조자가 된 듯 했다. 2시간가량 연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무척 여유로웠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버렸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항공기를 갈아타고 비엔나로 가려던 우리 일행은 둘로 나뉘어져 장애인 위주로 구성된 분파들만 비엔나 항공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우리 일행이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이유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발 빠른 장애인 케어 시스템 때문이었다. 장애인 케어 직원 2명은 재빠른 항공기 환승을 위해 넓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최단거리 지름길로 우리 파를 안내했고, 그들의 안내와 편의시설 덕분에 신속하고 편안하게 비엔나행 항공기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먼 이동거리와 복잡한 수속 때문에 뒤따라 비엔나행 항공기에 탑승하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비엔나행 항공기는 우리가 탄 것이 마지막이었다.

비엔나에서 첫날을 묵은 호텔
비치된 구형 TV
[ 사진1,2 - 비엔나에서 첫날을 묵은 호텔 및
고풍스러운 구형 TV ]

 프랑크푸르트에 두고 온 일행들을 걱정하며 우리는 비엔나 공항에 내려 호텔로 향했다. 밖에는 비엔나의 황홀한 야경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 묵은 호텔은 예전의 성으로 사용했던 고풍스런 건물이었다. 내부 역시 약간 엔틱풍의 인테리어로 치장되있고 TV조차 몇 십 년은 됐음직한 제품이었다. 욕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집기들이 고풍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헤어진 일행을 만나기 위해 비엔나 공항으로 갔다. 마치 수년 만에 다시 보는 벗처럼 일행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제 유럽연수단은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피부로 느끼면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매우 여유로운 도시이다. 도시의 전체적인 인상을 주도하고 있는 고전 양식의 건물들 때문일까? 아니면 거리에 교통수단의 하나인 전차와 마차 때문일까? 비엔나 곳곳에서 벌어지는 연주회와 전람회 때문일까? 굳이 경제적 지표를 따지지 않아도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사회 분위기는 여유라는 표현과 너무 잘 맞는다.

 또, 이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 모차르트가 주 무대로 활동했던 곳이다. 그로인해 클래식 음악으로 창출하는 부가가치가 상당하다. 상업적인 측면 뿐 아니라 문화로서의 측면이 모차르트로 대변되는 서구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자부심과 그를 향유하면서 얻는 만족감을 시민들이 삶의 질을 추구하는데 있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비엔나 곳곳에서 공연되는 연주회나 전시되는 전람회는 이방인에게는 서울의 거리와는 전혀 다른 도시의 분위기를 맛보게 해주었다.

 우리가 찾아갔던 곳은 오스트리아 장애인총연맹이다. 사무실은 비엔나의 오래된 건물을 내부 인테리어만 새로 하여 사용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옛날식 원형계단 내에 설치한 엘리베이터인데, 휠체어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자 우리가 가고자하는 사무실이 보였다. 오스트리아 장애인총연맹은 78개의 단체가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으며 약 40만 명의 장애인과 관련서비스 이용자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다. 핵심 업무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타를 사회적이며 제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즉 입법과 정책 과정에서 장애인이 참여하여 차별을 배제하고 당사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또한 장애인의 발전과 권익을 침해받지 않도록 대외적 홍보활동을 하거나 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행한다.

오스트리아 장애인총연맹 사람들 회의하는 모습
[ 사진3,4 - 오스트리아 장애인총연맹의 방문 ]


 오스트리아의 사회복지는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의 덕분으로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잘 구축되어 있다. 특히 노동자로 고용되면 사회보험(의료보험, 장애보험, 연금보험, 실업보험)에 강제로 가입되어 납부하게 되는데 임금에 대한 부담액이 높은 편이나 반면 위험에 대한 사회복지망은 비교적 탄탄하게 갖추어진 상황이다. 그곳에서 만난 장애인 중 한 분은 외국인 대한 보장 또한 원칙적으로 비자를 받는 순간부터 보험에 가입되어 의료보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장애인 복지 또한 장애인에게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이 최선이며 일할 수 있는 직장만 있다면 사회보장제도를 100%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일을 할 수 없는 최중증 장애인들은 절대빈곤층으로 생활보장을 위한 중앙 및 주정부 예산이 투여된다. 외국에서 방문한 손님들을 의식했는지 이러한 사회보장제도, 특히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제도를 거의 완벽하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약간은 질투심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도 만만치 않은 투쟁의 과정이 있었으리라.
재미있는 것은 그 기관 홈페이지에 나온 장애인 현안 해결 방법이다.

 - 무조건 소리를 지를 것!
 - 물고 늘어질 것!
 - 주목을 끌 수 있는 방법은 총동원 할 것!

 무척 자극적이고 단순해보이지만 이 문구를 표현한 사람의 장애인 운동가로서의 결의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 결과로 가장 놀라운 것은 오스트리아에는 현재 장애인 생활시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 시설에서도 인권문제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1980년대에 대규모 시설을 국가에서 폐쇄하고 그룹홈이나 공동작업장으로 전환하여 현재의 고용과 직업 위주의 복지 정책으로 변화하였다고 한다. 많은 중증장애인들이 생활시설에서 아직도 인권 침해를 당하고 있고, 탈시설 운동의 성과가 더딘 우리로써는 매우 좋은 사례인 듯하다.

 장애인 단체 방문을 마치고 쇤브룬 궁전을 둘러보았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여름 별궁이었던 쇤브룬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과 더불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테레지아 여왕의 막내딸 마리 앙뜨와네뜨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마리 앙뜨와네뜨는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 16세와 혼인하여 왕비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의한 혼인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도래하여 시민들에 의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왕실의 아름다운 공주였지만 프랑스 왕비가 되어 화려한 소비행각 때문에 적자왕비라는 조롱꺼리로 또 혼외정사를 즐겨 여러 명의 정부가 있었다는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를 기록한 책들에 의하여 유럽 황실의 아름다운 소녀이지만 매우 평범하고 상냥한 성향의 소유자였다고 전한다. 다만 모든 역사적 변혁이 원인이 그렇듯이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삶을 곤궁하게 만든 책임은 위정자, 특히 왕정의 절대권력 몫이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항상 자신의 힘이 누구로부터 나오는지 성찰하지 않으면 결국 권력은 비극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마리 앙뜨와네뜨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쇤브룬 궁전

[ 사진5 - 마리 앙뜨와네뜨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쇤브룬 궁전 ]


쇤브룬 궁전 뒤의 아름다운 정원과 저 멀리 보이는 글로리에떼

[ 사진6 - 쇤브룬 궁전 뒤의 아름다운 정원과 저 멀리 보이는 글로리에떼 ]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장남 요제프 왕자 결혼식 그림 일부
[ 사진7 - 쇤브른 궁전에 걸려있는 그림중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장남 요제프 왕자 결혼식 그림 일부. 어린 모차르트가 그려진 부분 ]

 유능한 정치가이며 문화에 대한 취향이 남달랐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여름 궁전 쇤브룬의 내부는 정말 화려했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화려한 장식물 들을 찍어오지는 못했지만 가구의 대부분이 청나라 도자기로 꾸민 ‘푸른 방’과 벽지를 비롯한 모든 장식물을 금박으로 꾸민 방들은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위화감을 느낄 만큼 호화롭고 섬세했다. 사방이 온통 거울로 장식이 된 ‘거울의 방’은 6살 난 천재 음악신동 모차르트가 여왕과 그 가족 앞에서 연주를 했던 일화도 전해져 온다. 실제로 궁전 내부에는 여왕의 아들 요제프 왕자의 결혼식 그림이 걸려있는데 이날 참석한 모든 사람을 그려 넣은 정교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천명이 넘는 하객들이 자세히 묘사된 이 그림 끝에 어린 모차르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는 왕자의 결혼식 참여하지 않았지만 후에 모차르트가 너무 유명해져 화가가 유일하게 가상으로 그려 넣은 어린 모차르트의 모습은 관광객의 관심을 충분히 끌고 있다.

 이 궁전 뒤에는 기하학적 무늬가 일품인 드넓은 정원이 있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은 베르사이유와는 달리 야외에서도 호화로운 연회를 펼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리고 그 끝 언덕 위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러시아 제국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글로리에떼가 호위군처럼 궁전을 바라보고 있다.

 궁전을 뒤로하고 마리 앙뜨와네뜨와 모차르트의 인상이 아직도 거리에 남아있는 비엔나 시내의 공원을 느긋하게 거닐면서 나는 처음 와본 비엔나와 작별을 하고 있었다. 공원은 다시 요한 슈트라우스의 동상을 보여주며 비엔나의 서사시를 들려주려고 시도하였지만 그만 귀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쇤브룬 궁전의 마리 앙뜨와네뜨와 모차르트 이야기만 해도 비엔나에 대한 첫인상은 강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일은 비엔나를 떠나 모차르트의 고향인 짤쯔부르그의 여정이 잡혀 있던 참이다. 아쉽지만 불빛이 하나씩 들어오는 시내의 야경에게 ‘비엔나여 안녕~’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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