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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스토리 : 내 나이 중년. 자립생활의 길 위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내 나이 중년. 자립생활의 길 위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고관철(前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대표)


 뭐든지 시작하기가 힘들다. 자립생활 연구를 하겠다고 미국까지 왔지만, 출국 바로 전까지 나를 초대해 준 캔사스 대학 관계자들과 안되는 영어로 어려운 소통을 해야 했고, 그들이 요구하는 각종 서류들을 준비하느라 이곳저곳을 뛰어 다녔다. 프로포절을 제출하고,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일정을 확인하고, 비자와 관련된 서류들을 처리하면서, 무엇하나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영어공부도 해야 했다. 무엇 하나 삐끗하거나 지체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가야하는 일들처럼 느껴졌으니 맘에 여유가 없었던 것도 같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인천공항에서 비행기표를 들고 좌석배정을 받고나서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까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LA에 도착해서, 마중 나올 누군가를 기다리던 두시간 동안 전혀 낮선 환경에서 문화적으로 언어와 청각장애인이 되어버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 사진1 - 떠나는 필자를 격려해 준 한국장애인인권포럼 가족들과 함께 출국 전에. ]


 생활에 있어서 언어라는 장벽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혼자서 하는 모든 일들은 곧 모험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내 말을 알아들을 이도 없다. 가끔씩 만나는 한국 학생들이 정말 가뭄 중의 단비가 되어 줄 뿐이다. 버스 타는 것, 핸드폰을 마련하는 것, 대형마트 가는 것, 학교의 시설을 이용하는 것, 인터넷 설치, 사람을 만나는 것 등 모든 것들에 난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형태의 장애가 생겨버렸다.

 어떤 일이든 동기가 있게 마련이다. 그럼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립생활과 더불어 아주 오래된 것 같다. 30대가 넘어서야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했고, 30대 중반에 뜻하지 않게 생계를 위해서 들어간 장애인복지관에서 직업적 교육의 일환으로 보내준 상담교육이 마침 ‘동료상담’이라는 그 당시 아주 낮선 ‘장애인자립생활’에 기반한 교육이었다. 그때 처음 자립생활 운동의 역사를 들었다.

 자립생활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에드 로버츠, 전설적 장애여성투쟁가인 주디 휴먼, 미국장애인법을 초안한 저스틴 다트 등과 최초의 자립생활센터인 버클리자립생활센터의 탄생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다시금 내 혈관에 뜨거운 피가 콸콸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 사진2 - 미국 캔사스 대학의 방문연구원이 된 필자. ]


 그 날 이후 나에게 있어서 자립생활은 종교와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자립생활센터가 전국적으로 늘어나면서 연합회를 만들게 되었고 대표가 되어 한국적 자립생활을 만들어보자고 무모하게 덤벼들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열정에 비하여 앎이 부족한 탓이었는지, 내 도전은 일정한 실패를 했다. 실패의 대가라면 좀 이상하지만, 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의 자립생활이 현재 어떠한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 판단에 우리나라의 자립생활은 일본자립생활의 강한 영향아래에서 성장했다. 내가 받았던 동료상담교육도 일본 동료상담가의 방문교육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난 일본에서 정립되고, 성장한 자립생활의 세례를 받았다. 한국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을 보자면, 일본과 정립회관의 금전적 지원하에 자립생활센터들이 설립되게 시작하였고 또한 지리적 근접성과 금전적 한계, 신체적 장애여건들을 고려하여, 많은 장애인활동가들이 일본에서 연수를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자립생활이 한국에 받아들여졌으며, 그와 동시에 일본과 연대하면서 국제적 무대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목마름은 무엇일까? 무언가의 부족함, 그리고 끝없는 갈증, 풀리지 않는 숙제같은 것들이 남아 있는 듯 했다. 그 부분을 채워야 비로소 한국적인 것이 완성되겠다는 갈증이 생긴 것이다.

 우리의 복지현실에서 자립생활센터는 재활의 관점으로는 도대체 받아들이기 힘든 전달체계였다. ‘어떻게 대상자가 관리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인식이 현장의 전문가를 비롯한, 학자들의 일반적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사회적 지원이 없는 가운데 활동하기 위해서 자립생활센터는 법과 제도를 개정하고 정비하는 권익옹호라 이름 붙여진 영역에 모든 힘들을 집중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서 활동지원제도의 중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일부나마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법적 지위 획득과 활동지원제도의 폭넓은 확대, 직접적 지원등을 위하여 투쟁하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동료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방방곡곡의 장애인들을 동료상담을 통하여 활동가로 육성하고 자립생활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권익옹호하면 법적 제도적 투쟁으로, 서비스하면 활동지원제도로, 활동가 양성이라고 하면 동료상담 만을 인식하게 되었고, 우리에게 장애인운동이란 바로 이 세가지 밖에 없다는 인식의 한계가 발생한 듯 보인다. 필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우리의 자립생활은 아직 완전하지 않고 여전히 완성해야 하는 미완의 사회운동이라고 판단된다.


[ 사진3 - 필자가 앞으로 생활할 캔사스 대학의 기숙사. ]


 자립생활의 본고장 미국에는 두 개의 전국적 규모의 자립생활조직이 있다. 이 조직들은 이념상의 차이에 의해서 나누어진 조직이 아니라, 비슷한 유형의 환경조건 속에서 자립생활을 실천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프로그램의 연합형태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자립생활을 대표하는 조직으로는 NCIL (National Council on Independent Living 전미장애인자립생활협의회)이 있다. 대도시중심의 자립생활센터들이 주도권을 갖고서 주로 시스템권익옹호(관련 법과 제도적 재개정운동)와 상호프로그램 정보 교환등을 주목적으로 1년에 한번 전통적으로 워싱턴D.C에서 총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미국의 또 다른 다수의 자립생활센터들은 농촌과 시골지역에 흩어져있다. 이곳에 생활하는 장애인은 도시에 생활하는 장애인과는 또 다른 많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결성된 것이 바로 APRIL(Association of Programs for Rural Independent Living)이다. 이 연합조직은 결성된 지 15~6년 정도 되었는데 주로 농어촌 시골지역의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목적으로 하여, 매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특히 시골지역으로 1년에 한번 10월경에 총회를 하여 프로그램의 정보들을 교환하는 활동을 한다.

 내가 미국의 자립생활을 현장에서 처음 접한 것도 바로 이 총회에서 였다. 2005년 10월 하와이에서 열리는 APNIL총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을 처음 나간 듯 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에 2006년에는 워싱턴에서 7월에 개최되는 NCIL총회에서 미국 전역의 자립생활센터들과 만남의 기회를 가졌고, 자립생활 운동의 초기 리더들인 쥬디휴먼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4년 후 나는 캔사스에서 한국 장애인 자립생활의 역사와 흐름에 대하여 발표를 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발표를 위해 그간의 일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 어렴풋한 안개가 걷히는 듯 했다.


[ 사진4 - 필자의 이름이 붙은 연구실. ]


 미국에 도착하고 지금까지 한달동안 나는 일종의 멘붕 상태에 빠졌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어의 장벽이라는 장애물의 존재의 거대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 미국에 오면서 두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나는 국제적 연대를 위하여 영어를 최대한 습득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한국적 자립생활을 위한 연구의 결과물을 얻어 내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영어공부를 하면서 미국의 “서포트서비스”에 대한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서포트 서비스”는 한국의 동료상담과 유사하지만 보다 광범위한 분여에 걸친 체계적인 구조의 사회서비스다. 이를 통하여 한국내의 동료상담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어쩌면 커다란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온 듯,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결국 도전하는 용기를 잃지 않고 키워 나가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내게 남은 가장 큰 어려움인 듯 하다.


[ 사진5 - 이 사진을 보고 누군가 대 학자의 뽀스가 풍긴다 했다. 그리 되면 좋겠다. ]


 이제 중년이라 불릴 나이. 새로운 도전은 시작됐다. 이제 분기별로 여러분에게 나의 새로운 도전을 이 지면을 통해 중계해 드리도록 하겠다.

한 가지 더 얻은 교훈이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난 지금 여러분의 칭찬과 응원이 절실하다. 난 이곳에서 새로운 춤을 추고 싶다.

미국 캔사스의 로랜스에서
고관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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