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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리포트 : 용산 두개의 문, 인권으로 향하는 문 열자


용산 두개의 문, 인권으로 향하는 문 열자 이원호 사무국장(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두 개의 문>에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들

"<두 개의 문>은 인간의 존엄에 대해 묻고 있었습니다. 철거민들은 자본의 부속품이 아니었는지, 진압경찰은 권력의 도구가 아니었는지. 참 집요하고 치밀하게 이 질문들을 던지더군요. 그래서 너무 괴로웠습니다." -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의 트위터

영화 <두 개의 문>은 2009년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영화이다. 용산문제를 차갑고 냉철한 시선으로 접근한 수작이라는 평을 받으며, 독립다큐로는 기록적인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두 개의 문>을 본 관객들의 반응은 뜨겁다. SNS상에서 관람평들을 올리고, 꼭 봐야할 영화라고 추천하면서며 흥행을 견인했다. 관객들 스스로, 참사가 발생한 남일당 건물 터를 방문해 국화꽃을 두고 가는 추모의 발길이 이어지기도 했고, 지난달에는 3년여 만에, 참사현장을 떠난 후 처음으로 그 곳에서 촛불문화제를 갖기도 했다.
알려졌듯이 <두 개의 문>에는 용산참사 유가족들이나 철거민들이 나오지 않는다. 중국집 사장님과 호프집 아저씨, 도서대여점 아줌마가 왜 망루에 올라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찰특공대원들의 시선에 초점을 맞춘다. 법정에서 진술하는 특공대원들의 떨림, 그 날을 ‘생지옥’이라고 증언하는 그들의 공포. 누군가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숨 막히는 진압작전의 실상을 통해, 특공대원들마저도 생지옥으로 밀어 넣은 국가폭력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철거민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지 않지만, 영화는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1월 19일 망루를 짓는 것을 돕고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려다 경찰과 용역에 의해 발이 묶인 다른 지역의 철거민들의 속 타는 시간. 그 새벽 경찰특공대를 실은 컨테이너가 크레인으로 오르는 순간, 건물 내부로 진입한 경찰들이 옥상 문을 부수기 위해 연신 두드려대던 해머 소리 속에서 경찰과 용역이 합동으로 발포하는 물대포에 흠뻑 젖어 얼어붙은 손발로 버틴 까마득한 어둠과 추위, 공포의 시간들. "용산에 농성하는 데 연대 갔다 올게"하고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던 시간. 숨죽인 채 레아호프에 숨어 그 긴 밤을 버티며 제발 시아버지, 남편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던 시간. 그 참사의 찰나에 숨겨진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이들 중에 용산참사로 희생된 故이상림(당시 72세)님의 유품에는, 망루에 오르면서 품에 지니고 있었던 용산구청의 공문이 있었다.


[ 사진1 - 용산참사 희생자 故이상림님의 망루 유품 중, 용산구청의 질의회신 공문. ]


"세입자 보상계획에 대한 협의가 없다고 해서 관리처분계획인가 등을 중단할 수 없는 사항임을 회신하오니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산구청장"

법에 따른 관계인의 보상협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음으로, 협의가 완료될 때까지 ‘관리처분인가를 중지해 달라’는 요청에 대한 회신 공문으로, 용산구청은 "관리처분을 중단할 수 없다"며 거절을 통보했던 것이다.

한강갈비에서 레아호프까지 한 자리에서만 30년 가까이 생계를 꾸리고, 가게 건물 옥탑에서 거주하며 살아온 서울시 용산구 주민으로서의 마지막 절박한 요구마저 거절당한, 그 구청 공문을 품고, 그렇게 사랑스런 막내아들과 함께 하늘 끝 망루에 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그 공문은 유서가 되었다. 그는 죽고 아들은 아비를 죽인 죄인이 되어 5년 4개월의 형을 받고 독방에 갇혀 있다.
그런데 원통하게도 거절당했던 그 요구는, 2010년 11월초에 서울고등법원에 의해, 절차상 중대한 위반이 있었다며 "용산4구역 관리처분 무효"라는 판결로 내려졌다. 주검이 되고 땅속에 묻힌 한참 후에야 말이다. 이처럼 비록 세입자이지만 수십 년 지역에 살아오고, 지역의 상권을 발전시켜온 ‘주민’이, 개발 현수막이 나부끼는 순간 ‘철거민’이 되고, 구청은 ‘철거민’을 더 이상 지역의 주민으로 대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정당한 권리를 말하는 지역 주민들의 민원이 아니라, 그저 귀찮고 시끄럽게 하는 ‘떼잡이’들의 ‘생떼거리’로 취급되곤 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을 건 저항은 ‘도심 테러’로 매도된다.

이러한 잔혹한 개발사는 7~80년대 판자촌 철거에서부터 90년대의 달동네 아파트 건설과 신도시 건설, 그리고 2000년대 뉴타운건설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경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철거민이 되어 쫓겨나거나, 저항하거나, 죽임당해야 했다.

무관용을 되돌려 줘야한다.

참사를 빚은 용산4구역의 개발은, 참사발생 4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 개발이 멈춰진 채로 허허벌판으로 남아있다. 망루가 불탄 남일당 자리는, 철거민들을 폭력적으로 내쫒던 철거용역 깡패들이 주차장 터로 사용하면서 임시영업을 하고 있다. ‘그렇게 허허벌판으로 방치할 걸, 왜 그리 빨리 내쫓으려 했냐’는, 유가족들의 애통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최근 ‘컨택터스’라는 경비용역이 진압경찰과 유사한 복장, 장비를 소지하고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해 비난이 일고 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용산참사 당시 현장을 누비며 POLICIA라고 적혀있는 사제 방패를 든 이들이 떠올랐다. 이들은 경찰로 오인되었던 철거용역들이었다. 당시 철거민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남일당 건물 3층에서부터 집기들을 불태우며 연기를 위로 올려 보냈던 용역들과 경찰과 함께 물대포를 쏘던 용역들은 집행유예와 벌금형의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

무리하고 성급한 진압을 한 경찰도, 살인적인 개발을 밀어붙인 건설사도, 폭력적인 철거용역도 제대로 처벌받지 못했다. 오직 철거민들만이 모든 책임을 지고 4~5년의 형을 받고, 3년 반째 감옥에 있다. 대통령 측근도 석방되고, 용산 안건을 ‘독재’적으로 막은 이가 인권위원장에 연임되었지만, 철거민들에 대한 각계의 사면 요구는 거절당했다. 처벌받지 못한 경찰은 쌍용차 노동자들을 폭력진압 했고, 무리한 개발을 추진한 용산4구역 시공사 삼성과 대림은 강정에서 불법적인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그리고 용역깡패들은 자본의 사 병이되어 노동자와 철거민들을 폭행하며 활개를 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무관용 원칙에 입각한 폭력에, 우리의 관용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용산참사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은 계속해서 짓밟힐 수밖에 없기에, 이제 우리가 무관용으로 폭력기구들을 지켜봐야 한다.
지난 8월 20일, 결코 관용하지 않겠다는 시민들이 용산참사 진압책임자 전 서울경찰청장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두개의 문>을 본 관객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한 달간의 고발운동에 760여명의 시민들이 고발장을 직접 작성하여, 검찰에 제출했다. 3년여 전, 서면답변서 한 장만으로 조사도 없이 무혐의 처분되어 기소조차 되지 않았던 전 서울경찰청장을, <두 개의 문>을 통해 용산을 기억하는 이들이 다시 소환하고 있다. 바로 우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 사진2 -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구 한강로2가 재개발지역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경찰이 강제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철거민 5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


<두개의 문>, 여기 사람이 있다.

"살아보겠다고 아우성치는 우리에게 이렇게 해야 합니까? 정의사회구현이 이런 겁니까? 힘없고 가난해도 생명이라고 살아보려는 우리들을 군화발로 짓밟고 부유하고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해 아파트를 짓고 공원 만드는 것이 정의사회란 말입니까?"
(1985, 대통령께 보내는 목동, 신정동 철거민들의 호소문/ ‘철거민이 본 철거’, 1998, 한국도시연구소)

1985년 목동, 신정동 철거민의 호소가, 30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도 변함이 없다. 살아보겠다는 아우성이 군홧발에 짓밟혔던 역사는,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을 망루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2009년 용산참사로 반복되었다. 그렇게 끔찍한 참사를 겪고도 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곳곳의 철거민들은 "대책 없이 내쫓지 마라"며 살기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 여전히 대한민국 철거민들의 시간은, 청소차량에 실려 강제 이주당한 1971년 광주대단지에, 20여명에 이르는 이들이 불타죽고, 맞아죽고, 건물잔해에 깔려죽은 1980년대에, 그리고 다섯 명의 철거민들이 학살당한 2009년 1월 20일 용산에 멈춰져 있다.

30여 년 전 철거민들의 호소를 기억해 내지는 못해도, 아직까지 우리는 용산참사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 그 기억마저 망루위로 검붉게 타오르는 화마의 이미지로만 흐릿해 질 때, 우리는 또 다시 잘못된 역사의 반복, 내일의 또 다른 용산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두 개의 문>은 더 이상 살아보겠다는,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이 짓밟히고 죽임당하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존엄한 인권의 문을 열기 위해서라도, 끝나지 않은 용산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억 해 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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