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단 메뉴 바로가기
  2. 본문 바로가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야기 프리즘
HOME > Webzine 프리즘 > Webzine 프리즘
본문 시작

webzine 프리즘

프리즘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분기마다 발간하는 웹진입니다

지난호바로가기 이동
컬쳐포유 : let's go go go, 남산에 올라 봄에 취하다.


남산에 올라 봄에 취하다. 고관철(한국장애인자립생활연구소 소장)


 지금 2월의 끝자락에 걸터 앉아 3월로 넘어가고 있다. 벌써 봄인 것이다. 지난 겨울 돌이켜보면 그다지 춥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몇 일간의 추위가 몇 십년 만의 최고라는 둥 호들갑이 심했다. 특히 독감 때문에 콧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화장지를 옆에 차고 살아야 했던 지난 한달 동안은 심히 봄이 기다려진 것은 사실이다. 독감이 아무리 쎄다고 한들 봄날 한 시간의 따스한 봄볕에 비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하기야 겨울이 깊을수록, 더욱 매서울수록 봄날은 모든 이의 기다림이 된다. 그 기다림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간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 그림1 - 봄이다! 꽃이다! 나란 남자... 봄 기둘리는 남자다. ]


이렇듯 기다림으로 모든 이들의 마음이 가득 찰 즈음, 슬며시 봄이 찾아드는 것이다.

꽁꽁 닫힌 문틈으로, 비닐장막으로 가려졌던 누렁이의 우리로, 겨우 내내 얼어있을 것 같은 마당 한 귀퉁이에 남아 있었던 얼음더미들이 어느 틈에 녹아버린 자리에, 앙상한 주변 가로수의 나무들 사이로, 심지어 길가에 깔아놓은 보도블럭 이음새 틈바구니 사이로, 처녀 총각의 옷깃으로, 생생 달리는 전동휠체어가 일으키는 바람속에서, 내 집 마당으로부터 문지방을 넘어 마루를 지나 겨우내 누워있던 방안으로 넘실넘실 햇살의 넘어올 때면,

아하. 봄이 왔구나!


[ 그림2 - 아하. 봄이 왔구나! ]


이제, 모든 이들이 설레임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봄은 공평하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그것은 햇살이 모든 것을 비추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설레임으로 시작된 봄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꿔놓기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정원의 가지 앙상한 나무에서 하얗고 탐스런 꽃이 피어있음을 본다. 목련꽃이다. 목련은 잎사귀보다 꽃이 먼저 핀다, 그리고 꽃이 떨어지고 나서야 새 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볼수록 신기한 꽃나무이다.


[ 그림3 - 남산의 목련꽃. 봄의 힘을 느끼게 하는 신비로운 꽃나무 ]


그리고 등교길에 학교 담장으로 흐드러지게 가지를 드리우며 마디마디마다 노란 꽃을 피우는 개나리가 있다. 그 개나리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학교에 들어와 있게 된다.

특히, 내가 다녔던 남산에 있는 동국대학교는 동대입구역 지하철에서 나와서부터 시작되는 오르막이 끝없이 이어진 듯하여 장애인인 나에게는 무척이나 괴로운 등교길이었다. 하지만 봄날 만큼은 개나리꽃의 유혹에 정신이 팔려 걷다 보면, 그 오르막이 끝나 있곤 했다.


[ 그림4 - 남산 꽃길 ]


노란 색깔에 이어서 등장하는 연분홍의 물감은 온통 세상을 진달래와 철쭉으로 뒤덮는 듯하다. 봄날이 되면 어김없이 학교 길을 따라서 뒷산처럼 다니던 곳이 남산이었다. 3월로부터 시작되는 봄의 남산은 하얀색과 노란색, 연분홍색, 빨간색, 그리고 긴 겨울을 견디어낸 소나무의 푸르른 색과 더불어 물감들을 어지러이 쏟아낸 모습이 그대로 산으로 옮겨간 듯, 산 전체가 커다란 대가의 팔레트가 된 것처럼 그렇게 펼쳐진다.

그 색감에 숨이 턱턱 막혀오고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하면, 수업을 하다 말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교수님과 더불어, 여러 동료들과 어울려 부축을 받으면서 남산으로 들어간다.

야외수업이다.

동료들도 공부가 눈에 안들어 오기는 마찬가지지만, 선생도 제아무리 교수라고 하나 봄빛을 이겨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더불어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산속으로 들어갔지만, 이내 산에는 흔적이 없다. 그들도 그 산 봄 빛깔의 일부가 되 버린 것이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이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위를 두르고 있는 수많은 꽃들의 향연이다.

진달래, 개나리와 더불어, 앙상했던 가지에 파란 잎사귀와 하얀 꽃을 터트리는 아카시아 나무가 지천에 피어있다. 그리고 이제 큰 나무들이 꽃망울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 절정은 아마 벚꽃이 만개했을 때일 것이다.


[ 그림5 - 벚꽃에 취해 보실랍니까? 남산은 서울에서도 손 꼽히는 벚꽃놀이 장소다. ]


4월초쯤..

이 시기에 남산을 들어가보자. 전동휠체어로 남산 순환도로로 들어가 돌다 보면, 개나리와 진달래, 철쭉, 아카시아, 그리고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주위를 감싸고, 하늘에서 하얀 꽃잎이 지난 겨울에 내리려 했던 함박눈이 계절을 못 잊고 내리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이렇게 색깔에 익숙해질 즈음.

봄빛을 따라서 안개처럼 스며드는 것이 바로 향기이다. 꽃은 저마다의 향기를 갖고 있다. 매화나 개나리처럼 은은하게 향기를 묻어내는 것들도 있지만, 진달래나 철쭉처럼 향기를 강하게 쏟아내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아카시아처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렬한 놈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강렬한 향기는 봄의 전령들을 유혹한다. 바로 나비와 벌들이다. 특히 아카시아 곁으로 가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의 강렬한 향기는 나를 유혹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긴 겨울에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생존에 몰두해 있는 꿀벌을 향한 손짓이기 때문이다. 잘 못 갔다간 독이 오를대로 오른 그 놈에게 봄의 인상을 강렬하게 온몸에 새겨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봄이 제대로 완전히 갖춰진 것이다. 빛깔과 향취와 생물이 모두 봄의 이름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도 포함해서 말이다.


[ 그림6 - 가는 길목 길목 봄을 만날 수 있다. 올 봄엔 남산에 가 보자! ]


나는 20대의 젊은 청춘의 세월 속에서 근 10년 동안 매해마다 이맘때 쯤만 되면 봄의 색깔에 온 몸이 물들고 나면, 봄의 향취에 온 신경이 마취되고 나면, 지금은 없어진 중턱 언저리의 막걸리 집에서 갓 나온 생 막걸리 한잔에 파전 한 조각 털어놓고 동료들과 주점주점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얼큰하게 취해 허우적 거리면서 내려오게 된다. 봄 향기에 취하고 막걸리에 취해, 돌아온 교정의 잔디밭에서 때 이른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남산의 모습은 나에게는 봄에 더욱 더 깊게 남아있다. 누구에게나 이런 산들은 뒷산이나 앞산의 모습으로 우리가 사는 마을 근처에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올 봄에는 모두 봄나들이를 앞산이나 뒷산으로 떠나보자. 마음껏 봄볕에 취하고 봄 향기에 취하고, 봄 맛에 취해보자.

나도 이번 봄에는 간만에 못 가본 남산 길을 따라, 봄 속으로 들어가 봐야겠다.

프린트하기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