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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리포트 : 학교와 교육 환경으로 인한 학교폭력


학교와 교육 환경으로 인한 학교폭력 전혜원(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얼마 전, ‘노페 패딩 계급’ 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사진 한 장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또 다른 교복이라 불리는 한 등산복 브랜드의 패딩점퍼를 가격별로 분류해 놓은 사진이었는데, 패딩의 가격이 높을수록 그 것을 소유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그 브랜드의 상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진 언니·오빠’들의 전유물로 뇌리에 박혀 버렸다. 물대포 맞을까봐 겁이 나서 같은 브랜드의 방수 바람막이를 입고 집회에 참여했던 날,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집회에 삥 뜯으러 온 누나’가 되었고, 계급 구분에 따라 ‘불가촉천민’이 되었다. 그 사진 덕분에 의도치 않게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 받았던 날이었다. 학생들은, 혹은 그것을 지켜보는 제 3자들은 왜 그리도 ‘노페 패딩’에 집착할까.


[ 그림1 - 같은 등산복 브랜드 패딩점퍼를 입고 있는 청소년들 ]


 사실 내가 이 글을 통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 패딩에 대한 고찰이 아니다. ‘패딩 계급’ 이슈가 계기였던 것인지, 뒤이어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학생들의 자살 사건, 특히 또래 집단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삶을 포기했던 학생들의 사건을 집중 조명하며, 국가적 문제로 키워갔던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학교폭력 문제를 이야기하며 굳이 패딩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은 그 두 가지가 맥락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노페 패딩 계급에 따라, 주로 ‘있는 집 날라리’나 ‘대장’ 계급에 위치한 소위 일진학생들이 가해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왜 학생들은 노페 패딩에 집착할까?’라는 질문과, ‘왜 학교폭력은 생겨나는가?’라는 질문은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갈래의 가지이며, 질문에 대한 원인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뿌리는 경쟁이 심화되어 가는 사회와 폭력에 찌든 오늘날의 학교 현장 그 자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흐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 단어가 ‘학생 간 폭력’만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학교폭력이 학생 간 폭력으로만 거론되기 시작하면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는 가로 막힌다. 학교폭력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을 포괄하는 단어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학생 간 폭력’을 비롯해, ‘사랑의 매’ 역시 학교폭력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다. 혹은 교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사를 체벌했던 사건 역시 학교 폭력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다. 가해학생은 나쁜 놈, 피해학생은 불쌍한 놈이라는 설정만으로 학생 간 폭력을 설명하는 것은 사실 너무 게으르지 않은가. 진짜 원인은 그 뒤에 숨어서 ‘나쁜 놈’과 ‘불쌍한 놈’의 가면을 쓴, ‘센 놈’과 ‘약한 놈’을 구분하게 만드는 구조와 문화라는 고민을 하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이 글에서 만큼은 ‘학교 폭력’이라는 포괄적인 얼버무림 대신, ‘학생 간 폭력’이라는 구체적인 단어를 쓰고자 한다.


[ 그림2 - ‘학생 간 폭력’ 피해 중학생 10명 중 1명은 자살을 기도한다. ]


 흔히 ‘100원 줄 테니까 빵 사고 200원 남겨와’라는 문구가 쉽게 떠오르는 ‘빵 셔틀’ 발생 과정을 들여다보자. 학기 초 서로 처음 만나 어색하고 낮선 상황에서 학생들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이 많은 친구들 중에서 나와 함께 점심을 먹고, 등·하교를 하고, 화장실을 갈 친구들을 매의 눈으로 탐색한다. 이때, 성적과 외모, 풍기는 분위기, 전 학교(혹은 학년)에서 규정되어진 위치, 교사와의 관계 등을 고려해 대부분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친구들과 친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달만 지나도 교실 안은 여러 그룹으로 구분되어지고, 이때 쯤 이면 ‘빵 셔틀’도 거의 다 정해진다. 그 중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교실 안에서 가장 존재감 없고 약해보이는 무리에 속한 학생이거나, 그 그룹조차에도 못 낀 학생들이다. 그런데 간혹 ‘중상위층 계급’의 패딩을 입는 학생이, ‘대장 계급’의 패딩을 입는 학생들의 그룹에 섞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는 존재감 큰 무리에 함께 속한 학생이더라도, 그 안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자신보다 더 힘이 센 친구의 빵 셔틀이 되기도 한다. 그 관계 주변부에는 일진 학생들을 타이르려다 반대로 당하는 여교사가 있고, 그런 일진 학생들을 용을 쓰고 잡아내려는 무서운 학생부장 교사(대부분 남성 교사)가 있고, 일진학생을 ‘색출’하라며 그 학생부장 교사를 쥐어짜는 학교 관리자도 있다. 학교 구성원들을 두고 ‘힘의 피라미드’를 그려본다면 아마 ‘학교 관리자-무서운 남교사-일진학생-만만한 여교사-보통학생-찌질이’의 구조가 될 것이다. 힘의 논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구조 속에서 누군가는 밟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밟고 올라서기 마련이다. 힘을 가지지 못한 이는 복종하고, 힘을 가진 이는 지배한다.

 또한,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며, 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육과, 그것을 방관하고 부추기는 사회 전체가 ‘학생 간 폭력’ 문제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원인이다. 학교는 성적이든 뭐든 학생들을 끊임없이 줄 세우고, 구분하며 그 과정에서 낙오되는 이들을 배제하고 공동체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기만 한다. 그것을 묵인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교육은 폭력의 화수분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라면, 타인과의 관계맺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사랑이 결코 될 수 없다. 누가 이 경쟁 속에서 이기고 지는가의 절박함만 남을 뿐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아야만 하고, 더 좋은 대학에 가야만 하고, 더 좋은 직장을 얻어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사회와 학교, 그 경쟁 속에서 도태된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사실 그 사실 자체가 좀 폭력성 게이지를 높이기도 하지만, 배제된 이들이 스스로의 자존감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폭력’이라는 수단을 선택하기도 한다. 학교와 사회의 구조는 힘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니,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폭력을 선택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학교와 사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그림3 - 학생 간 폭력’은 일진도 게임도 아닌 입시 경쟁이라는 교육 폭력의 결과이다. ]


 ‘학생 간 폭력’ 문제의 해결방안이랍시고 내놓은 정부의 대책들 또한 답답하다. 가해학생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대책과 교사의 권한강화, 인성교육 실천 등 ‘학교 폭력 근절 종합 대책’ 을 보고 있으면 과연 정부가 학생 간 폭력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건지 쇼를 하고 싶은 것 인지 잘 모르겠다. 가해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내몰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 되는가. 그러한 ‘징벌’적 대책이 과연 이전에는 ‘없어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교사의 권한강화 역시 의문스러운 대책이다. 일단 지금의 학생 간 폭력 문제는 교사 개개인이 감당해 낼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교사가 학생 간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 교사가 학생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저 ‘일진 학생’들을 잡아내면 능력 있는 교사고, 그렇지 못하면 무능한 교사이기에 평가 점수를 깎던지 처벌을 하던지 하는 식의 말만 있을 뿐이다. 이제껏 발표된 학생 간 폭력 문제를 위한 대책은 참 게으르거나 멍청하다. 아니면 둘 다 이거나.

 폭력적인 구조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매일 전쟁을 치러내야만 하는 우리 모두가 사실은 ‘가해자’다. 언제까지 이 죽음의 교육을 감당해 내야 하는 걸까. 얼마나 더 많은 가해자를 만들어 내고,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야 할까. 학생 간 폭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교 안에 만연한 수직적인 구조를 해체하고,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수 있으며 서로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경쟁교육을 뿌리 뽑는 것 역시 중요하다. 사실 이렇게 쓰고 보면 ‘참 말은 쉽지’ 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전혀 쉬운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깊은 고민과 반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껏 우리가 침묵하고 용인해온 이 폭력적인 교육에 대한 반성과 고민 없이 문제해결의 방법을 찾기는 힘들다는 거다. 한 교사가 ‘왜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은 등산용 ‘노페 패딩’을 입느냐‘고 묻자, 한 학생이 ‘한국 교육이 산으로 가서요.’라고 대답했다던 우스갯소리는 사실 우리가 뼈아프게 받아드려야 할 현실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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