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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소통

하성준씨 사진, 다양성으로 대표되는 미국

허성준의 유학일기 하성준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재활상담 석사과정)


미국 사회를 표현하는 말로 다원주의 혹은 다양성 (Diversity)라는 말이 있다. 여러 인종, 종교,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를 살펴보자. 필자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들었고 배웠던 말 중에 어디 산의 정기를 받고 어찌어찌해서 태어난 “단일 민족”, 곰이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고 살더니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고 그리고 낳은 아들이 우리의 시조라는 의미로 “단군의 자손” 그리고 무슨 일이 있을 때 마다 강조하는 말 “우리 겨레”, 이런 말들이 갖는 의미는 모두 다원주의나 다양성이라는 반대말인 단일성 혹은 통일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글의 서두에 거창하게 민족이 어떻고 겨레가 어떻고 하니 좀 거창해 보이기는 하지만 오늘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미국 사회가 가진 다원성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그러한 다원성이 미국 장애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짝 엿보기로 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흑인이다!


 필자가 지난 9월로 기억하는데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현 오바마 당선자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을 때, 미국 라디오 채널인 NPR (National Public Radio)에서는 이렇게 헤드라인을 보도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이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습니다.” 미국이 아무리 선진 사회이고 인종차별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이 일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최초의 유색인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남북 전쟁 이후 흑인 노예가 해방된 이래로 흑인이 거둔 또 하나의 인간승리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필자가 공부하고 있는 일리노이 주는 노예 해방의 주역 링컨이 정치생활을 했던 곳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칭할 때, “Land of Lincoln"이라고 할 만큼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바마 당선자 역시 시카고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의 오랜 인권 운동 경력 역시 이곳 일리노이에서 쌓였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또 하나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흑인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종차별의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해 보기로 한다. 사실 우리는 아직도 흑인, 백인 등과 같이 피부색이 사람의 특성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이것은 미국인이라고 별다르지 않지만 적어도 그런 사람을 지칭할 때, 색깔을 나타내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불구자나 장해자 같은 말 대신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미국에서 인종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는 우리의 그것과 좀 다른데 백인을 표현할 때는 Caucasian이라고 한다. 흑인을 표현할 때는 African American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도가 될 것 같다. 남미계는 출신지역에 따라 멕시코계 (Mexican), Chicano, Hispanic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계 (Latino) 등 다양하다. 원래는 출신지역에 따라 혈통에 따라 구분된 말이지만 실제로 같은 의미 즉, 남미계 미국인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다. 끝으로 우리와 같은 황인종들은 아시아계 미국인 (Asian American)이라고 표현하고 출신지에 따라 한국계 (Korean American), 일본계 (Japanese American), 중국계 (Chinese American), 필리핀계 (Filipino)등 다양하게 지칭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white나 black과 같은 색깔을 나타내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공식적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흑인 대통령으로 일할 오바마는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표명하고 있는 정책이 교육 정책의 안정화이다. 공부하고자 하는 미국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더 많이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적어도 능력이 안돼서 공부를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을 만들지는 않겠다는 의미이다. 또 많은 수의 미국인들이 기피하는 분야 즉, 기초 과학, 공학, 수학 등의 학문에 더 많은 투자를 약속했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인권 운동을 오래 동안 펼쳐온 당선자다운 행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4년 미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이 경제 쓰나미를 넘어서 어떻게 미국을 또 지구촌을 이끌어 갈지 기대해 본다.


선거는 중요한 인권 보장의 기회이다.


 오바마 당선자가 과거 했던 수많은 일들 중에 흑인의 선거인 등록이 있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선거제도인 선거인단 등록 (Voter Registration)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거인 명부라는 것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일 기준 투표가능연령에 있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작성하고 투표 당일에 이 명부에서 본인 확인을 받고 투표를 한다. 최근에야 이 명부도 전산화해서 컴퓨터로 조회하지만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각 지역에서 손으로 일일이 기록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선거하러 가면 선관위원들이 공책 같은 것들을 보면서 선거인 명부를 확인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일정한 연령이 되면 그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선거인 명부에 등제되고 투표가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은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투표자 등록이라는 절차를 미리 거쳐야 한다. 물론 미국 시민권 (Citizenship)을 가진 사람에 한해 해당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의 경우 10월에 투표인 등록을 했는데 이 기간이 정당과 NGO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시기이다. 필자가 속한 National Rehabilitation Association (NRA)에서도 학생 회원과 일반 회원들에게 전체 공지를 통해 선거인 등록에 참여할 것을 동여했다. 오바마 당선자의 업적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선거인 등록에 흑인들을 대거 참여시켜 그들의 정치력을 과시한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정당의 당원 수, 민간단체들의 회원 수 등은 허수가 많고 또 선거일 이전에 선거에 대한 홍보가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선거 참여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미국은 선거일이 휴일도 아니고 선거를 하려면 미리 선거인 등록도 해야 하기 때문에 등록을 했다는 자체가 선거에 반은 참여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 흑인들의 경우 실업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많고 직업이 있다고 해도 저임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등록만 했다하면 선거에 참여한다고 하니 애초에 선거에 참여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계몽하고 그들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한 오바마 당선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필자가 마치 대단한 오바마의 지지자처럼 보이는데 사실 필자는 오바마를 지지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당선된 후에 이곳저곳에서 흘려들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자 했을 뿐임을 밝혀 둔다. 그러면 장애인들은 어떨까? 미국은 장애인의 선거를 돕기 위해 별도의 선거참여규정을 갖고 있는데 그 골자는 투표기 (Voting Machine)에 있다. 지금은 어떤 것을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미국에서는 투표기가 투표용지에 구멍을 뚫어 주는 기계였다. 투표용지를 넣고 지지하는 입후보자의 기호를 누르면 해당 번호에 구멍이 뚫린다. 이렇게 하면 도장을 날인하는 우리의 방식에 비해 간편하고 시각장애인이나 뇌병변장애인과 같이 도장을 날인하기 불편한 사람들도 쉽게 기표할 수 있다. 또 기표된 상태가 일정하게 유지됨으로 무효표로 처리되는 비율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그래서 미국의 경우 장애인이라고 크게 투표에 참여하기 어려운 것도 또 참여하는데 큰 불편이 있는 것같이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 정치적으로 집단화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장애인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례가 분명하지 않고 시의회나 주의회에서 활동한 장애인은 있지만 국회 (National congress)에서 활동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미국 장애인들이 우리나라 장애인들에게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다.


다원성은 무엇인가?


 필자가 수강하는 대다수의 수업에서 빠지지 않고 다루는 주제가 다원성 (Diversity)에 대한 내용이다. 그 주제 또한 다양해서 단순히 문화적 다원성만을 다루기도 하고 어떤 과목에서는 종교, 인종, 국적, 성별, 교육수준, 장애유무, 주거지역 (남부인지 북부인지, 도시인지 시골인지), 경력 등 다양한 요소들을 다원성을 갖게 하는 요인으로 분석하고 거기에 대해 다루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개인은 성별, 인종, 국적, 교육수준, 등 앞에 열거한 요소들 중의 몇 가지로 자신만의 다원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 개별성을 띠게 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다원성을 구성하고 있는 요인에 따라 끊임없는 교집합의 연속으로 분화되고 이러한 분화는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강화되기도 하고 소멸 또는 약화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라는 공통 요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인종, 종교, 성별 등의 요인에 따라 분화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요인들은 시각장애라는 요인에 의해 통합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성의 해석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각 요인들 중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호되는 것과 배척되는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대체로 백인이 흑인에 비해 주류로 분류되고 미국 시민이 외국인에 비해 주류이다. 교육수준은 당연히 높은 것이 주류이고 종교는 기독교가 주류이다. 사실상 다원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된 상태에서 다원성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좀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말로는 다원성을 인정하고 지켜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고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들 주류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태도라는 것이다. 올해 초로 기억하는데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TV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흑인 아이들에게 백인 모양의 인형과 흑인 모양의 인형을 동시에 보여주고 “어느 것을 갖고 싶어?”, “어떤 것이 더 좋은 거야?”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백인 인형을 좋은 것이고 갖고 싶은 것이라고 답했다. 이것은 미국 사회가 아이들에게 조차 묵시적으로 인종을 차별했고 흑인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피부색에 대해 적대적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되고 있다. 필자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2006년 미국 NFL의 하인즈 워드가 방한했을 때 있었던 많은 일들을... 방송에 보도된 내용 중의 하나가 흑인 혼혈인 여학생이 하인즈 워드를 보고 엉엉 울었던 기억을... 필자 역시 한국에서는 피부색만은 주류라 그런지 한국에서 그 보도를 볼 때는 크게 못 느꼈던 감정을 미국에 와서 하인즈 워드에 관한 내용을 신문으로 보았을 때에 더 많이 감동했다.
 다원성에 관한 논의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언어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언어상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 더 많이 느끼지만 수많은 다원성의 논의에서 언어의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미국 사회에서 영어와 스페인어 이외의 언어는 큰 메리트가 없다. 또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영어를 기반으로 하지 않을 경우 그 역시 논의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일예로 필기 운전면허시험에는 한국어 시험 문제지를 제공하지만 실기 도로주행에서는 영어만 할 줄 아는 미국인이 감독관으로 참여하고 언어적 문제로 인해 불합격하는 경우에도 구제방안이 없다. 여타의 모든 공공활동에 한국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SAT라는 유명한 적성검사도구에도 언어영역에 선택과목으로 한국어를 포함시키고 있지만 이것도 아프리카어나 부시맨어 외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다수의 언어 (약 17종) 중의 하나로 한국어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원성은 한 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적 요소를 규명하고 그러한 요소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발견하려는 미국 사회의 통합화 노력의 일환이다.
 이러한 다원성이 장애인들에게 왜 중요한가? 그 해답은 바로 장애라는 다원적 요소를 가진 사람의 수가 다른 여타의 요소들을 가진 사람들 보다 많다는 것이다. 실제 흑인의 비율이 전체 미국인의 약 20% 정도인데 반해 장애인의 비율은 통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소 15%에서 최대 30%까지 보고 있다. 물론 장애를 바라보는 범주의 차이가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또 성별이라는 다원성은 최근 성성(Sexuality)에 대한 논의로 많이 이동한 상태라 성별 (gender) 자체는 큰 요소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남자 혹은 여자라는 식의 단순한 구분보다는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와 같은 요소들이 더 크게 부각되고 있으며 혼인신고만 어려울 뿐, 미국 사회 내에서 동성애는 큰 허물도 스스로 자신을 부끄러워할 무엇도 아니다.
 다음으로 장애라는 다원적 요소를 가진 사람들은 독특한 다원적 요소를 주류로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독신, 저임금 혹은 실업 같은 것이 주류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또,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피부색은 큰 문제가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장애라는 차별적 요인을 가진 사람들은 피부색이라는 차별적 요인을 덜 인식하고 지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흑인 장애인이 백인 장애인에 비해 대우 받을 때가 많다. 뭐 대우 받는다고 하니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피부색과 장애라는 이중의 다원적 비주류 요소는 더 이상 차별적 요소가 아니라 강점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특히 석사나 박사과정 입학사정이나 직장을 구할 때 이러한 요소는 큰 강점이 될 수 있다. 일예로 유학생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흑인 여자는 박사학위를 받으면 무조건 대학에서 임용해 준다.” 이것은 많은 미국의 대학들이 다원성을 인정하고 추구하기 위해 교수진에 꼭 장애인이나 유색인종을 포함시키는데 흑인으로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여성의 숫자가 너무 적기 때문에 일단 학위만 받으면 대학들이 서로 모셔간다는 것이다.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된 바 없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보여 지는데 그것은 필자가 알고 있는 박사과정에서도 흑인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결국 다원성을 인정하고 어떤 사회적 집단이 다원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강하다. 이것은 여러 민족이 여러 가지 문화를 공존시키면서 살아가는 미국만의 특성일 수도 있다.


장애인에 대한 다원주의적 접근


 지금까지 미국이 다원성에 대한 관심과 그 양상에 대해 설명했다면 이제 다원성이 장애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비록 다원성이 미국의 사회적 특성으로 인해 체계화되었고 미국 사회가 그것을 인정하는 문화로 흘러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표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 문화, 우리 민족이 가진 단일성이 문화나 민족에 대한 생각에서 그치지지 않고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에 대해서 까지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게 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바뀌어야 할 사회현상일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다원성이나 다원주의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의식이다.
 민족, 성별, 언어, 인종이나 국적 같은 특성들을 다원주의적 요소들로 본다면 장애는 또 다른 형태의 다원주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장애인과 재활을 주제로 다룬 상당수의 논문들에서 장애인구 자체의 다원성과 장애 자체를 사회를 구성하는 다원주의적 요소로 간주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미국이다. 2000년 이후 미국의 인구센서스들은 이민자의 급증으로 인한 인종, 국적의 다양성이 언어의 분화는 물론 장애인구의 다원화를 촉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Rubin과 Roessler, 2006). 또한 이러한 장애인구의 다원화 경향은 이민가족의 높은 출산율로 더욱 극심해 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일찍이 인식한 Middleston (1996)은 장애인서비스 전문 인력의 직무수행에 있어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다른 문화를 가진 클라이언트에게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지식적 기반에 대해 역설했다. 결국, 장애 자체가 하나의 다원성으로 인정되는 미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의 개인적 특성 즉, 어떤 유형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가를 넘어서 그들의 성별, 인종, 언어 및 문화까지 고려한 서비스 제공을 염두에 둔 연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를 살펴보자. 필자가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하던 시절, 중국교포인 시각장애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주민등록도 업고 물론 복지카드도 없었다. 그래서 그분에게 제공되는 복지관의 서비스는 모두 비공식적으로 제공되었다. 간단하게 말해, 실적이 안 잡히는 서비스였고 복지카드를 요구하지 않는 서비스였다. 지금은 어떻게 이러한 이용자들을 대할지 알 수 없지만 당시의 경험을 회상해 보면 필자 역시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명재와는 거리가 멀게 행동했던 것 같다. 미국의 서비스를 살펴보자. 앞서 기고한 글들에서 언급한 부분이 있는 만큼 간략하게만 언급하면 필자와 같은 외국인도 어느 정도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서비스비용의 일부를 학교 측에서 부담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서비스를 제도적으로 못 받게 하지는 않는다. 또 사회보장번호가 있으면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수준도 높아지고 학교 측의 부담도 줄어든다. 한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일단 복지카드가 없으면 서비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복지서비스의 대부분이 이용자 혹은 제3자의 지불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 보다는 정부를 비롯한 공적 (사회적) 자원에 의해 운영되다 보니 서비스제공의 주체들이 서비스 제공을 복지카드를 통해 증명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로 인해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거나 복지카드가 없는 사람은 공식적으로 서비스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자립생활운동에 참여하시는 많은 분들을 만났을 때 가진 신선함 중의 하나는 장애영역간 통합을 전재로 하는 자립생활운동의 모터를 따라서인지 장애영역에 대한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타 장애를 낯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원성이 긍정적으로 확립되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시각장애인이 휠체어 장애인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상지 장애인이 시각장애인에게 신문을 읽어 주는 모습, 자립생활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는 아직 이러한 다원성의 인식이 다소 부족하다. 그것은 환경적 영향으로 보여지는데 특수학교는 장애영역별로 구분되어 있어 타 장애영역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다. 또 통합된 환경에서 오래 생활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대중 즉 장애가 없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얻어진 또 다른 단일성의 단면인 경우가 많다. 몇몇 장애인을 알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반대로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들과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그들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다원성을 인식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원성이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정한 사회적 인구학적 요인에 의해 분류된 계층의 사람들이 가진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고 이러한 이해는 단편적인 경험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론부터 먼저 언급하자면 통합된 환경의 조성이 이러한 이해를 높여 준다. 이번 학기 필자가 수강한 수업 중에 “상담이론과 실천”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수업에 참여한 약 25명의 학생들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또 젊은 사람 (20대 중반)도 있었고 나이가 많은 사람 (50세 이상)도 있었다. 물론 장애인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며 필자처럼 시각장애인도 있고 휠체어를 타는 사람도 있었다. 미국인도 있었고 외국인도 있었으며 흑인도 있었고 백인도 있었다. 일리노이 (중부)출신이 있는가 하면 동부나 서부 출신도 있었다. 이 뿐만 아니다. 성성 (Sexuality)의 차이, 결혼여부의 차이, 자녀의 유무, 종교의 차이 등 수업시간에 토론한 주제만 10 가지가 넘었다. 이렇게 다원성은 통합된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우리나라의 강의실을 살펴보자! 남자도 있을 수 있고 여자도 있을 수 있다. 서울 출신이 있는가 하면 지방 출신이 있을 수 있다. 제일 어린 학생과 제일 나이 많은 학생의 나이차가 20세가 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 한다. 외국인이 있을 확률은 좀 더 낮을 것이고 결혼이나 자녀에 관해서는 안했거나 없는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문화는 다원성을 의식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애가 하나의 다원적 요소로 인정받기는 더욱 어렵다. 그것은 두 가지 장벽 즉, 장애 자체를 다원적 요소로 인정받기도 어렵고 또 다원적 요소에 대한 배려도 익숙지 않은 문화라는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통합과 다원성


 앞서 통합된 환경의 조성이 다원성을 높일 수 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다원성은 통합된 환경 속에서 한 사람의 약점을 들추는 것과 구분되어야 한다. 앞서 한 개인의 다원적 요소는 같은 다원적 요소를 가진 사람들과의 집단화를 일으키고 이러한 집단화는 기준과 상황에 따라 분화와 통합이 지속된다고 언급했다. 이것은 통합된 환경에서 긍정적으로 다원성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장애라는 다원적 요소로 집단 내에서 하위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고 장애를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다른 여성들과 함께 또 다른 하위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집단이기주의나 소외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의 장애에 대한 태도이다.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장애는 하나의 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 요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판단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장애에 대한 태도는 지나치게 긍정적이거나 지나치게 배타적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고 불굴의 의지가 있으며 우리 사회가 공존해야할 이웃이라는 식이다. 필자는 이런 태도가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을 형성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은 장애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절대 불가능할 수 있고 그들은 인생의 큰 좌절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자포자기적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들의 장애는 그들의 잘못이라고 하기 보다는 사회적 모순에 의해 발생했으므로 그들에게 적절한 지원이 사회적 차원에서 제공되어야 한다. 또 장애인도 인간인 만큼 일하고 싶고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하며 건강한 사회생활을 꿈꾼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도 합리적이고 정당한 배려 속에서 동등한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 이러한 개념으로 장애인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장애는 미국과 한국에서 거의 동등하게 인식된다고 본다. 즉, 장애라는 요소는 그것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고 경제적 곤란을 초래하며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반응은 조금 다른데 미국은 일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정부가 주도하여 장애인고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자립생활과 직업재활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사회적 서비스를 마련하고 있으며 소득보장체계를 갖고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하긴 하지만 아직은 자립생활 보다는 시설보호 중심이고 고용프로그램은 개선의 여지를 많이 안고 있으며 소득보장체계가 미비 되어 있다. 흑인들의 대대적인 선거인 등록이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를 만들어 낸 것같이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 당사자들의 노력이 장애라는 요소가 하나의 다원주의적 요소로써 인정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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