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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삼호의 장애학이야기

윤삼호 대구DPI부장 사진

존엄사와 의사조력자살(PAS) 윤 삼 호 (대구DPI 정책부장)


지난해 11월 28일, 서울서부지법은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모(76·여)씨 가족들이 세브란스 병원을 상대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판결은 당사자인 김씨의 평소 뜻에 따른 결정이었다는 게 법원의 설명이다.


 그러자 세브란스 병원은 곧바로 윤리위원회를 열고 법원의 결정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비약상고를 제기하였다.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존엄사에 대한 법적 기준 및 사회적 합의가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세브란스 병원이 스스로 설명하듯이 “존엄사를 인정하고 집행한 첫 사례로 남는 것은 사실 병원 입장에서도 엄청난 부담”이었고, 특히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생명을 함부로 다룰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서구 사회에서나 있음직한 이른바 ‘존엄사’ 논란이 우리 사회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존엄사는 정말 존엄한 죽음인가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 갈 것이 있다. 언론에서 말하는 ‘존엄사’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까? 보통 영미권에서는 존엄사를 death with dignity(존엄한 죽음) 혹은 mercy killing(자비로운 죽음) 따위로 표현한다. 얼핏 듣기에 죽음의 미학을 표현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안락하고 존엄한 죽음이 존재할까? 불치병을 앓고 있는 어떤 환자가 삶 대신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가 정말 죽음을 더 좋아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비루한 삶을 포기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비루한 삶이란 침대에 누워서 혹은 휠체어에 앉아서 평생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삶을 말한다. 이런 것은 이른바 ‘정상적’인 삶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비정상적’인 삶이라는 가정이 우리 사회에 널리 존재한다.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고, 가족들에게는 엄청난 부담만 주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육체적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는 사고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사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회적 기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 같은 사회적 기대와 가정을 충족시킬 수 없어 죽음을 강제당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존엄사가 진정 존엄한 죽음을 의미하는가?


 실제로 세계적인 프랑스 패션전문지 ‘엘르’의 편집장 ‘쟝 도미니크 보비’의 실화를 다룬 영화 <잠수종과 나비>는 이 같은 사회적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잘 보여준다. 보비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로지 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한 때 잘 나가던 지식인이 침대에 누워 눈꺼풀만 깜박거릴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지만, 그는 15개월 동안 20만 번이나 눈을 깜박거리면서 알파벳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책을 저술하였다. 이렇게 해서 발간된 책이 130페이지에 달하는 <잠수복과 나비>였다. 이 책이 발간된 지 10일 만에 보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꿈과 의지가 담긴 <잠수종과 나비>는 전 세계인의 마음에 남아있다. 이 영화는 최악의 신체 조건에 빠졌더라도 주변 사람의 도움만 있으면 인간이 얼마나 강인하고 고귀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보비의 사례 말고도 치명적인 부상이나 질병을 가진 사람들의 용기있는 삶에 대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그래서 존엄사 찬성론만큼이나 반대론도 만만찮다. 가령, 최근에 로마 교황청은 존엄사를 ‘인간의 얼굴을 한 테러’라고 맹비난했다. 존엄사에 대한 교황청의 이 같은 반대는 인간 생명을 주관하는 사람은 신이므로 인간이 함부로 목숨을 앗아가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 믿음 때문일 것이다.


존엄사는 실제로는 의사조력자살(PAS)


 종교적 색채를 거두고 장애학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존엄사’라는 말에는 질병 혹은 장애를 개인의 병리 혹은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의료모형을 교묘하게 포장한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신체나 정신에 치명적인 이상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변 환경이나 사회가 이를 적극 수용한다면, 보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얼마든지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회모형의 논리가 장애학의 설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장애학자들과 장애운동가들도 오래전부터 존엄사를 반대해 왔다. 이들은 존엄사가 장애인을 비롯하여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한다. 장애인 낙태 문제처럼 존엄사가 우생학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반대 이유이다. 살 가치가 없는 존재는 폐기되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바람직하다는 우생학적 논리는 장애인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매우 위험한 이데올로기라고 이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서 장애학자들은 ‘존엄사’라는 표현 자체를 거부한다. 그 대신 의사의 도움을 받는 자살, 즉 ‘의사조력자살(Physician Assisted Suicide, PAS)’이라 부른다. 존엄사 찬성론자들이 죽음(死)이라는 어두운 단어 앞에 존엄(尊嚴)이라는 아름다운 수식어를 덧붙여 사람의 죽음을 부추기는 반면, 반대론자들은 ‘자살’이라는 부정적 표현으로 존엄사의 비윤리성을 부각시킨다. 비장애인의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회적 자원을 쓰면서도 장애인을 비롯한 불치의 환자들의 자살에 대해서는 어째서 그토록 관대한가라고 반대론자들은 질문한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 스스로 죽을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 주는 것이 더 인간적인가, 아니면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있는 생명을 거두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더 인간적인가? 이 주제는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크게 논쟁거리가 되겠지만, 분명한 건 사람의 목숨조차 그 사람의 사회적 가치에 따라 결정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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