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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칼럼

고현수 상임대표 사진


2009년의 화두, 공간의 고현수 (제주장애인인권포럼 상임대표)


1. 공간의 정치화 : 공간은 어떻게 정치화 되었는가

“모든 공간은 정치적이다.”
이 구절은 프랑스 철학가 미셸 푸코가 1980년에 지은 <공간, 앎, 권력>에 나오는 말이다. 공간 배치를 보면 앎과 권력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으로 건축에서의 공간 배치는 권력의 위계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간의 권력화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감옥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강력한 처벌은 공개사형이었다. 개방적인 공간에서의 죄수처형을 통해 권력자는 범죄 행위의 잔악함을 타도하려는 모습을 잔인한 형벌로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대로 오면서 공개처형이 사라지고 감옥이라는 공간에서의 처벌이 시작된다. 교화라는 명목의 감시는 개인의 공간을 고정시키고, 배분하며, 등급을 매긴 것이다. 그리고 개인으로부터 최대한의 시간과 신체적 힘을 끌어내며, 개인의 육체를 훈련시키고, 개인의 행동에 규칙을 부과하였다. 공간이라는 장치가 개인의 규율, 자유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이런 상황을 ‘규율권력’이라 칭하였다. ‘규율권력’은 감옥이라는 공간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규율권력’이 감옥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등 현대 사회 전 부분에 있어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밝혔다.

2. 공간 통제 : 학습된 무력감

  1975년 심리학자 셀리히만은 개에게 공포 반응 실험을 하던 중 무력감이 학습되는 것을 발견했다. 셀리히만은 24마리의 개를 세 집단으로 나누어 상자에 넣고 전기충격을 주었다. 제 1집단의 개에게는 코로 조작기를 누르면 전기충격을 스스로 멈출 수 있는 훈련을 시켰다(도피 집단). 제 2집단은 코로 조작기를 눌러도 전기충격을 피할 수 없고, 몸이 묶여 있어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는 훈련을 받았다(통제 불가능 집단). 제 3집단은 상자 안에 있었으나 전기충격을 주지 않았다(비교 집단).

  24시간 후 이들 세 집단 모두를 다른 상자에 옮겨 놓고 전기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앞서 실험과는 달리, 상자 중앙에 있는 담을 넘으면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실험 결과 전기충격 도피 훈련을 했던 제 1집단과 전기충격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제 3집단은 중앙의 담을 넘어 전기충격을 피했다. 그러나 통제 불가능 집단에서 훈련을 받은 제 2집단은 전기충격이 주어지자 피하려 하지 않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낑낑대며 전기충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왜 통제 불가능 집단에서 훈련받은 개들은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달아나지 않았을까. 이미 훈련 과정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전기충격을 피할 수 없음을 학습했기 때문에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무력감을 학습하고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절망에 빠져버린 것이다. 셀리히만은 이를 ‘학습된 무력감’이라 칭했다.

3. 2008년 한국 장애인의 자화상

  2008년 대한민국 장애인은 어떤 공간에서 살았는가. 이 질문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느냐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단언하건데 다수의 장애인은 공간에 들어설 수 없었으며, 공간의 둘레에 머물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혹여 공간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그 공간은 푸코의 말처럼 감시와 ‘규율권력’이 존재하는 권력자의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공간에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소수의 장애인은 어떠한가. 미안하게도 그들 대부분은 자신을 위한 공간을 형성하지 못하고 그저 시혜와 동정 아래 받는 것에 익숙해진, 셀리히만이 말한 ‘학습된 무력감’에 빠진 장애인들이었다.

  2009년 내가 말하는 화두는 정치적 공간이다. 공간은 결코 건축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물리적 심리적 장벽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장애인이 권력서열을 탐하거나, 그 반대로 무기력에 빠지지 않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소위 장애인을 위한다는 비장애인은 말할 것이 없고, 장애인당사자라 하여도 정치적 발언과 행동이 기존권력 앞에서 반동화 되거나 아니면 붕괴되는 것을 적잖이 목격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 인권활동가들의 탈시설(혹은 반시설)과 정치사회적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 공간은 지난 지방선거와 총선, 대선에 이르기까지 단결된 성장을 이루어 내지 못했고, 아직 장애인인권에 대해 사상적, 이념적 담론 설정에 익숙하지 못하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실패의 경험이다. 이 실패의 경험이 쌓이면 학습된 무력감에 빠지게 되고 학습된 무력감이야 말로 장애인의 인권활동과 자립생활에 가장 큰 벽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장애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장애인운동 내부공간의 절망의 체험을 깨야한다. 장애인의 문제가 장애인에 의해 해결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더 이상 장애인은 자율성을 지니지 못하고 푸코의 말처럼 규율권력에 의해 지배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2009년 우리는 ‘규율권력’에 의해 ‘학습된 무력감’의 셀리히만의 실험실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 정치공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담론 설정은 물론 끝없는 자기 성찰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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