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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문의 영화이야기 님은 먼곳에


최강문의 영화이야기 최 강 문 (요술피리대표작가)


반대말: 어떤 낱말에 대하여 반대되는 뜻을 지닌 낱말. 그 옛날 국민 학교 시절, 받아쓰기를 넘어서 반대말 쓰기 시험까지 치렀던 기억이 난다. '낮'의 반대말은 '밤'이고, '길다'의 반대말은 '짧다'지만, '크다' 반대말은 '적다'가 아니라 '작다'라는 걸 배웠던 기억이 어슴푸레하다. 반대말 사전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물론 어휘력을 높이기 위해서였겠지..
반대말 공부를 한 것은.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흐른 지금, 초등학교에서는 그때처럼 반대말 공부를 하지 않는다. 세상이 그렇게 흑백의 구조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가 아닐까? 여기 '전쟁'이 있다. 그 반대엔 무엇이 있을까?
'평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가 뇌리에 깊게 박힌 까닭이리라.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의 섬뜩한 격언도 떠오른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떨까?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바이블 『전쟁론』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말이지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는 시종일관 흐르는 주제어이기도 하다. '푸른 하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옛 애인을 성심껏 간호하는 나타샤. 그래, 그렇다.
전쟁과 평화 그 사이의, 사랑….

여관방에 마주앉은 순이와 상길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손이 귀한 집안의 대학생 상길에게 시집간 순이. 군에 입대한 남편을 면회 간다. 여인숙 방에서 순이와 마주앉은 상길. 혼자 소주를 들이키다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니.. 내 사랑하나?"
"니.. 사랑이 뭔지 아나?"
순이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상길은 바로 등 돌리고 누워서 말한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남편 상길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처지. 그 사랑 역시 식어가고, 상길은 조용히 베트남으로 떠나버린다.
순이는 시어머니의 닦달 속에 멀리 남편을 찾아 나서려 한다. 그러나 베트남은 일반인이 쉽게 갈 수 없는 땅. 하여 약간의 돈을 써서 위문공연단 '와이낫 Why-Not 밴드'의 가수 신분으로 베트남 행 배에 오른다. 물론 밴드의 리더 정만은 밴드 이름만큼이나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베트남 사이공에서도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써니'로 이름을 바꾼 순이의 미군부대 첫 공연은 엉망진창이 되고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한국군 위문공연을 시작한 밴드는 한 걸음 한 걸음 전선을 향해 들어간다.

한국군 위문공연무대에 선 순이한참 공연의 물이 올랐을 즈음 공연장으로 포탄이 쏟아지고, 밴드의 운명 또한 파국을 맞는다. 구성원간의 갈등도 극에 달하고, 베트콩의 포로까지 되고 말았으니. 이때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냥한 베트콩에게 천하의 사기꾼 종만은 말한다.
"우린 군인이 아니다. 그냥 돈을 벌기 위해 왔다."
베트콩의 답도 걸작이다.
"돈 벌러 왔다고? 그건 한국군과 똑같다."
"다르다. 우린 돈을 벌려고 왔고, 한국군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온 거다."
선문답일까? 베트콩이 다시 묻는다.
"너희들은 평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당신이 우리를 죽이지 않고, 우리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따위 종만의 사기꾼다운 말에 현혹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베트콩 책임자, 싸늘하다. 권총의 공이치기를 딸깍! 젖힌다. 종만은 허둥지둥 써니를 일으켜 세워 노래를 시킨다.
써니,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이다.
밴드 일행은 그 노래 덕에 목숨을 건지고, 베트콩의 땅굴 속에서 새로운 일상이 시작된다. 그때 밴드의 한 멤버가 써니에게 던진 질문 하나.
"그런데 남편은 왜 만나려고 해요?"
써니, 답하지 못한다. 아니, 일부러 답하지 않는 것일까? 그건 가수 써니나 시골아낙 순이로서가 아니라 이 땅의 여성으로서 답을 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이 영화 『님은 먼 곳에』의 절반을 살짝 넘긴 대목쯤 된다. 이제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

님은 먼곳에 영화 포스터이준익 감독.
『왕의 남자』로 유명세를 타기 전 『황산벌』이라는 걸쭉한 영화를 만들었고, 유명세 이후엔 『라디오스 타』와 『즐거운 인생』으로 그 명망을 이어갔던 그가 『님은 먼 곳에』를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전쟁과 평 화, 사랑을 논하기 위해서? 뭐, 솔직히 말해서 베트남 전 더하기 사랑이야기니까 당연히 그런 게 다뤄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플래툰』이나 『지옥의 묵시록』, 『태극 기 휘날리며』처럼 전쟁을 본격적으로 조망한 영화는 아니지 않나? 『러브스토리』류는 더더욱 아니다.
전문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그저 아마추어에 불과한 나 로선 감독의 작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논하는 게 쉽 지 않다. 도무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이럴 땐, 어디서 감독의 말을 살짝 엿듣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남자들의 전쟁, 수컷의 전쟁은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암컷의 본능은 편을 가르지 않는다. 20세기에 수많은 전쟁을 일으킨 남성의 이성을 믿을 수 없다 … 베트남전쟁을 그린 대중영화는 전부 할리우드영화다.

베트남전쟁을 미국식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베트남전쟁을 우리의 시각으로 반성해보자는 의미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 할리우드 전쟁영화의 모든 여자들은 전쟁터에 나간 남자를 기다리는 역할 아닌가. 하지만 『님은 먼 곳에』는 그 전쟁터에 여자를 보내는 영화다. 그럼 여자를 거기 보내는 목적이 있을 것 아닌가?'(『씨네21』664호, 이준익 인터뷰 중에서)

뭔가 잡힐 듯도 하다. 『황산벌』,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 『즐거운 인생』… 주인공들이 누구였더라? 박중훈? 감우성과 이준기, 정진영? 안성기와 또 박중훈? 정진영과 또 누구였더라? 그럼 『님은 먼 곳에』는? 당연히 수애가 주인공이다. 사기꾼 종만 역의 정진영은… 조연 아닐까?
이준익 감독은 '허스토리 her-story'라는 말도 했다. 히스토리 history가 남성 중심적 세계관을 반영한다면, 여성이 주체로 서는 이야기 구조를 통한 새로운 세계관을 추구한다는 거라고. 그래서 이 영화가 단순히 전쟁 영화도 아니고, 그 반대말 평화 영화도 아니고, 얄궂은 멜로드라마 사랑이야기도 아닌, 베트남 전쟁이라는 시대 상황과 봉건적 유교질서, 그리고 굴종과 희생만을 요구하는 남성중심의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것이다. 시골 아낙 순이든, 홀딱 벗고 춤추는 가수 써니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주체성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님은 먼 곳에』는.
아, 가벼울 것 같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 그러고 보니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맞나 보다. '영화는 공갈이다'라고 선언하는, '중요한 건 왜 이런 공갈을 치는지, 이 공갈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라는 것'이라고 잘라 말하는, '영화가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돈 낭비'라고 보는, 그런 그에게 '작가주의 감독'의 칭호는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만드는 영화 하나하나마다 그의 성향과 개성이 너무나도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칭찬이다, 뛰어난 작품성에 대한. 그럼 뭐하랴? 작가주의 영화는 대박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아직도 팽배해있는 2008년의 대한민국에서…. 그래서일까? 개봉한 지 20일밖에 되지 않은 지금, 대형 멀티플렉스에서는 이미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에 밀려나 소규모 상영관에서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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