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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삼호의 장애학
노동하지 않을 권리 - 권력과 장애


노동하지 않을 권리 : 권력과 장애 서니 테일러 씀 / 윤삼호(대구DPI 정책부장) 옮김


* 이 글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사회주의자 잡지인「Monthly Review」2004년 3월호에 실려 있다.

서니테일러가 직접그린 좌화상 2001년 서니 테일러(Sunny Taylor)는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대학에서 미술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주로 초상화와 인물화를 그렸다.

 고백하건대, 나는 노동하지 않겠다. 지금 나는 SSI(연방생계보조금)에 의지해 살고 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노동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나는 우리나라 복지 시스템을 좀먹는 존재이다. 고백할 게 또 있다. 나는 노동하지 않아서 아주 행복한데, 이것이 잘못이 아니라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동하지 않는 대신, 나는 가장 보람 있고 가치 있는 활동이라 여기는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낸다.

  내가 화가라고 말하면 사람들의 첫마디는 이렇다. “그림을 파나요?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나요?” 난 그림을 팔기도 하지만,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건 아니다. 시험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이런 질문이 끔찍스럽게 싫고 당혹스럽다. 내 라이프스타일과 취미가 정당한 것인지, 또 돈이 이 정당성의 척도인지 여부를 따져보는 시험 말이다. 돈이 정말로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경제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해서 내 그림과 라이프스타일은 정말 덜 가치 있는 것인가?

  선천성 다발성 관절만곡증 탓에, 나는 손대신 입으로 붓을 물어 그림을 그리고 이동할 때는 전동휠체어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전통적인 일터에서 노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우선 먹고사는 게 걱정되었다. 그러나 내가 “비생산적인” 시민으로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나 자신의 내재적 가치를 믿으면서 자라난 나는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이다. 다른 분야에서 성공했으면서도 “노동하지 않는데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난 9월 장애 권 (disability rights) 투쟁에 참석했을 때, 나는 장애인들이 노동하지 않는데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행사는 ADAPT(American Disabled for Attendant Personal-care Today, 활동보조 확보를 위한 미국 장애인들)가 주최했는데, 2주일 동안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 D.C.까지 144마일을 행진하는 것이었다. ADAPT는 지난 20년 동안 미국 장애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이날 행사 참여는 내 생애 첫 투쟁이었고,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본 적도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분위기에 위축되었다. 하지만 200여명의 장애인들과 주차장에서 야영을 하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면서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는 장애운동을 공부하고 다른 장애인들의 생각을 들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기로 결심했다.

  나는 행진에 참여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하였다. 첫 번째는 우리의 투쟁이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국 규모의 일반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심지어 좌익 매체조차 우리 행사를 외면했다. 두 번째는 많은 활동가들이 노동을 하지 않는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들 가운데는 신체 조건상 도저히 정규직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ADAPT는 지금처럼 시설 화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는 대중교통기관들과 전쟁을 벌였다. 원래 ADAPT는 American Disabled for Accessible Public Transit(즉 ‘접근가능한 대중교통 확보를 위한 미국장애인들)의 약자였다. 이 단체는 1983년 콜로라도 주 덴버시의 아틀란티스 지역사회 활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의 목적은 시설 밖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 참여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ADAPT는 장애인의 승차권리(right to ride)를 위해 미국 전역을 돌면서 버스를 가로막고, 도로를 점거하는 등 7년 동안이나 시민불복종 운동을 벌였다. 이들의 평화로운 직접행동은 장애인의 대중교통 이용권을 보장한 1990년 ADA 제정에 일조하였다. ADAPT의 그 다음 투쟁 이슈는 당연히 활동보조서비스였다.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한 많은 장애인들이 이제 지역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9월 행진은 여전히 요양원과 지적장애인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200만 명의 “도둑맞은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200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탄 채 리버티 벨에서부터 국회의사당까지 144마일을 행진했는데, 이들은 요양원 거주자들이 시설 밖으로 나올 경우 가정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은 ‘메디케이드 지역사회 보조서비스와 지원법(MiCASSA)’ 제정을 요구했다.

  현재 미국에는 17,000개가 넘는 요양원이 있고 이 가운데 2/3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MiCASSA는 메디케이드 예산을 700억 달러나 되는 요양원 산업에 쏟아 붓는 대신, 당사자들이 자신의 메디케이드 급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지역사회에 거주하는〕특정 개인에게 메디케이드 서비스를 지원하면 연평균 9,692 달러면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을 요양원에 수용하면 연평균 40,784 달러나 들고, 더구나 서비스 질이 충격적일 정도로 형편없을 때도 더러 있다. 요양원에서는 위생과 심리적 욕구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 성적학대 사건이 비일비재하다. 제일 잘 운영되는 시설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있는 개인들은 시설 밖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들, 이를테면 무엇을 먹을지, 언제 잘지, 누구와 대화할지와 같은 자유를 비롯하여 수많은 자유를 박탈당한다.

  200만 명의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할 지, 누가 자신을 돌보아야 할지에 대한 결정권을 거부당하고 있다는 명확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진을 언론이 다루지 않은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장애인은 원래 불이익을 받는 시민으로 간주되기에, 이 같은 사실 그 자체로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장애는 개인의 비극이고, 특별한 사람에게 어쩌다 발생하는 것이기에 휴먼스토리가 아닌 이상 헤드라인은 언감생심이고 재고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단순히 장애인은 사회적ㆍ경제적 평등의 향유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장애인을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종과 성 평등 이슈는 정치이론과 사회이론의 핵심이지만, 장애는 이런 이론의 관심밖에 놓여 있다. 장애인은 제도적으로 차별을 받는 정체성 집단이 아니라 삶의 불이익을 받아들여야 하는 “불행”의 희생자로서 연민의 대상으로 치부된다. 중요한 사회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여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와 달리, 장애는 사회적 레이더에 잡히지 않고 있으며 장애차별주의는 해로운 편견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동정의 대상으로서 장애 개념은 우리의 운동에 아주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신체적 고통은 있지만 내 몸과 삶을 즐기고 이를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경우, 이 같은 사고는 모욕적이고 뻔뻔스럽다. 안타깝게도, 이런 것이 아직도 장애인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방식인 듯하다.

  지난 30년 동안 시민권 운동 덕분에 장애 관련 법률과 동등한 접근권 법률이 만들어지는 등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발전에도 불구하고 장애는 여전히 부차적 이슈다. 1960~70년대를 휩쓴 여러 사회운동들 - 가령, 시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 게이권리운동, 환경운동 등 - 가운데 장애운동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장애정치가 이처럼 무시당한 건 손상이 쿨(cool)하지도 않고 섹시(sexy)하지도 않은 주제라는 사실 탓이기도 하다. 장애가 “쿨”하지 않다는 것에 토를 달기는 어렵다. 미국 사회의 성역 가운데 성역인 마케팅에 의해 선취된 다른 운동들처럼 장애가 패셔너블(fashionable)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광고 시장에서 흑인 모델들이 파워를 행사하고 있고, 최근 페미니즘의 시장화를 빗댄 “걸 파워(girl power)”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최첨단 아이콘을 만들기 위해 휠체어나 요실금을 광고에 삽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이렇지 않아야 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평등과 차이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쿨”하고 더 존중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 이해를 이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은 단일한 장애 모형이 없는 탓도 있다. 인간의 몸은 수많은 이유로 손상될 수 있으며, 누구나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마이클 올리버는 “장애인은 정상 성 보다는 차이 - 성, 소수인종, 성적 취향, 연령별 능력, 종교, 재산, 건강, 노동 접근성 등의 차이 - 를 통해 특징 지워진다. 분명한 건, 전통적인 정상 성 개념과 단일한 문화적 지배 가치에 기초한 이론이나 정책으로는 장애인의 처지를 이해하거나 변형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장애 화(disablement)되었으며 손상으로 인한 경제적ㆍ행위적ㆍ정서적 동질성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손상을 입은 사람들의 이 같은 강고한 차이성의 결과인 장애는,〔다른 소수자들은 이미 시민권을 획득한 오늘날〕시민권 운동의 유일한 갈래일지도 모른다. 장애인은 그 이미지와 가능성이 한없이 다양한 운동의 전형이다. 이 다양성은 우리 장애인이 작금의 기업 환경에 포섭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장애인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그렇게 하는데 어떤 적응, 편의시설, 비용이 필요한가, 그리고 어떤 이익이 감소될 것인가?

  이론과 실천이 발전하였지만, 장애 권은 가장 마지막에 고려되는 분야기 때문에 예산 삭감이나 “개혁”을 해야 할 때가 되면 가장 먼저 지워지는 분야가 되기 일쑤다. 하지만 장애운동은 우리의 존재가 이 사회에서 유용하고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실패했다. 대중은 우리의 투쟁이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장애인 운동가들은 실제로는 노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이들이 요구하는 서비스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비장애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핵심 주장을 널리 알리는데 실패했다. 우리의 핵심 주장이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장애가 개인적 이슈가 아니라 정치적 이슈라는 사고에 가장 잘 드러나 있지 않을까 싶다.

  장애 이론가들은 장애(disability)와 손상(impairment) 사이의 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을 밝혀냄으로써 이 점을 규명한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신적ㆍ신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가 곧 손상이다. 이 손상은 개인의 상처, 그리고 정신적 발달과정과 육체적 결함에서 비롯된다. 손상을 입었다는 것은 팔이나 다리가 절단되었다거나 태어날 때부터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신체화 된 상태이다. 따라서 손상을 입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고단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손상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장애인들도 많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관절만곡증이란 손상 때문에 팔을 제대로 쓸 수 없지만, 입을 사용해서 거뜬히 이 문제 대처하고 있다.

  이와 달리, 장애는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ㆍ사회적 억압이다. 이 억압은 이들을 경제적ㆍ사회적으로 격리시키기 때문에 발생한다. 장애인은 집을 구할 때 선택의 폭이 좁고, 사회적ㆍ문화적으로 추방되고, 취직 기회도 거의 없다. 장애인 사회(disabled society)는 이 같은 불이익이 손상 탓이 아니라 손상에 대한 문화적 반감, 장애인을 위한 생산적 기회의 부족, 그리고 수십억 달러 규모로 성장한 장애인 수용 및 “돌봄” 산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사회적 장애모형(social model of disability)이라 부른다. 장애 화는 개인적 상태가 아니라 정치적 상태이기에 시민권 이슈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적 틀로 장애를 바라보면, 이 같은 정치적 억압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잘 드러난다. 예를 들자면, 장애 이론가 브렌던 글리슨은 맑스주의를 채택하여 자연(nature)은 경험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 노동의 변혁적 관계에 의해 그 자연의 질과 의미를 획득한다.”고 한다. 자연은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서 사회 외부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사용하고 변형시킨다. 맑스는 이 역사적인 변혁을 설명하는데 “두 가지 속성(two natures)” 개념을 사용했으며, 인간 노동을 통해 이런 변형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자연 세계”는 인간의 개입으로 크든 작든 변경되었고, 자연은 영원히 인간 사회와 관계를 맺는다. 맑스는 이와 같은 자연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인류 잠재성의 상당 부분을 거부하기 위해 자연을 변경시켰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자연은 사회적 구성물 이전에 존재하지만, 또한 생물학적ㆍ생태학적 요인들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개입을 통해 스스로 진화한다. 인간은 성별, 연령별, 그리고 장애 유무에 따라 각자 자신의 육체적 경험을 통해 자연과 관계를 맺는데, 신체 화된 각각의 경험은 자연의 요소들을 통해 역사적ㆍ사회적으로 진화한 것으로 봐야 한다. 몸은 생물학적 실재이자 문화적 인공구조물이다. “전자는 후자가 형태를 갖추는데 필요한 전(前)사회적 유기체의 토대를 구성한다.” 장애 활동가와 이론가들은 손상을 “첫 번째 속성”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장애를 “두 번째 속성”의 예로 보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특정한 생물학적 신체 화 - 가령, 비장애인 백인 남성 - 가 어떻게 특권을 부여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이 때문에 몸에 대한 공간의 영향력 - 가령, 접근할 수 없는 건물과 교통수단 - 을 이해하려면, 누가 공간을 만들고 누가 그곳에 사는지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오늘날 손상 입은 사람들이 느끼는 극단적인 접근 불가 성과 소외는 그들 자신의 개인적 신체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 내ㆍ외부에서 진화하고 우리가 장애로 간단하게 치부해버리는 역사적ㆍ문화적ㆍ지리적 차별 시스템 때문일 것이다. 신체불구자나 노인은 생산과 소비를 뜻하는 기계에 의존해야 한다는 특이성이 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효율이 떨어진다. 그리고 운 좋게도 숨겨둔 돈이라도 많은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요양원에 들어가 “침상(beds)”으로 불려 지기 일쑤다. 말타 러셀이 정확하게 지적하였듯이, 장애인의 시설 화는 “장애인이 상품화될 수 있다는 차가운 현실에서 진화되었다. 장애인은 자기 집에서 살 때보다 시설에서 침상에 누워있을 때가 GDP 향상에 ‘더 많은 보탬’이 된다.”

  글리슨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비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상품 관계가 태동한 뒤로 노동 패턴에서 비롯된 사회적 신체화 과정이 이렇게 확 바뀐 것이다. 특히, 이런 정치경제적 변화로 말미암아 손상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과 가정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들었다. 영세한 농가에까지 도입된 시장, 가치 법칙에 기초한 노동 잠재력에 대한 추상적이고 사회적인 평가. 말하자면 노동자의 경쟁력은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의 평균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생산성 법칙 때문에 사회적 필요 비율을 생산할 수 없는 사람들의 노동 잠재력은 가치 절하되었다. 가정이 차츰 경쟁적인 노동력 판매에 의존하게 되면서, “느린” 혹은 “의존적인” 가족 구성원들을 부양할 능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글리슨의 설명을 보면, 중세 유럽에서는 농민이 사회적으로 배치되었기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도 경제적ㆍ사회적 시스템에 통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봉건사회 농민은 가정생활과 노동의 결합이 상대적으로 끈끈했던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의 다양한 기술과 능력이 사회적으로 유용했다. 이들 대부분은 가족과 함께 살면서 가정 경제에 기여를 하였다. 중세 사회는 자급자족 경제였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들은 먹고 살기 위해 각자 어떤 형태의 노동이든 해야만 했다. 가족을 먹이고 입히는데 필요한 일거리가 많아서 손상을 입은 가족 구성원도 늘 뭔가를 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의지할 곳 없는 사람(the helpless)이란 개념이 발명되지 않았고 손상을 입은 사람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던 것 같다. “봉건적 생산이라는 물질적 맥락 덕분에 농민들은 가족 구성원의 육체적 능력에 맞는 일과를 계획한 것이 많이 자유로웠다.”

  봉건시대가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천국이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 대신, 오늘날 장애 개념과 장애인의 처지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도전받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독립과 자립을 부르짖고 있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 충분한 힘만 하다면, 개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해서 멋진 새 차, 큰 집, 만족스런 은퇴 계획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 나아가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그리고 아름다워지겠다는 더 멋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도 있다. 이 나라에서 독립은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이 말은 우리 같은 장애인의 삶은 자동적으로 비극적이며 의존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이클 올리버는 독립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서로에게 의지한다. 장애인 사회와 비장애인 사회가 의존성을 바라보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말은 개인의 신체적 독립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전문가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씻기, 옷 입기, 대소변 처리, 요리하기, 식사하기 같은 자기-돌봄(self-care)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을 독립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들은 독립을 다르게 정의한다. 이들은 독립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이 같은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본다.” 오늘날 독립은 신체적으로 완전히 자립하는 개인적 활동이 아니라 자신이 받는 서비스들을 통제할 수 있는 개인적 활동이다. 이는 비장애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이다. 신체적 자립을 이렇게 사고하는 것은 경제적 자립을 부르짖은 데 따른 부산물이다. 그러나 미국 자본주의에서 그 누구도 독립적으로 살지 않는다. “혼자서 성공한” 개인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점에서,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처지를 곱씹어 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보면, 서로 의존하는 장애인들의 처지는 모든 비장애인들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장애인은 신체적 의존성 때문에 부담이 된다는 인식이 장애인에게 달라붙어 있는 낙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날 표준화된 경제 시스템에 따르면 장애인은 노동할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비장애인들의 부담도 늘어난다. 실제로, 이처럼 제한된 선택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장애인들은 가족과 친구의 짐이 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주정부의 독립생활 지원프로그램이 없어서 개인의 부담이 너무 큰 탓에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단지 돈이 없어서 시설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의존적으로 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들의 손상 때문이 아니라 사회서비스 시스템의 손상 탓이다.

  나는 극단적인 신체적 의존과 상대적인 신체적 독립 모두를 경험하였다. 10살도 되기 전에 몇 년 동안 스스로 옷을 입고 용변을 처리하는 훈련을 받았다. 당시에는 신체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난 영원히 가족의 짐이 될 것이며 내 삶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은 활동보조제도 덕분에 신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 내 삶이 적어도 더 편안해진 건 사실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시설수용을 걱정하거나 활동보조인 문제로 다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원할 때 오줌 누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고 해서 나의 삶이 생각만큼 획기적으로 바뀐 건 아니었다. 이때부터 이런 제도가 나의 자아나 일상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신체적 제약으로 벌어지는 직접적인 사태는 크게 염려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한 도움에 달라붙어 있는 낙인, 그리고 신체적 도움 때문에 나의 선택권을 빼앗지나 않을까 라는 걱정에서 비롯된 간접적인 사태가 주요 관심사이다.

  장애운동이 목소리 높여 주창하는 것들은 주로 고용, 평등한 접근권 따위다. 자본주의는 생산성 가치에 내재한 개인의 가치라는 관념에 뿌리를 박고 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자본주의가 원하는 일 잘하는 노동자가 결코 될 수 없는 장애인들도 많이 있다. 움직일 수 없거나 말할 수 없는 장애인은 주류 직종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장애인들 가운데는 전문가, 변호사, 예술가, 교수, 작가 따위로 일함으로써 “성공을 달성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 수가 적다할지라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이들은 운 좋은 소수자이며, 이들이 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특정 계층에 국한 된 것이지 모든 장애인들에게 열려 있는 건 아니다. 난 다른 사람들처럼 멋진 웨이트리스, 비서, 공장 노동자, 버스 기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장애인이라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조차 이런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용-편익 분석을 따질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직장을 구하는 건 어렵다. 장애인들 가운데도 일부는 괜찮은 직장에 다니지만 이들은 비장애인 동료들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해고당하기 일쑤다. 고용주들은 장애인 노동자들로부터 잉여가치를 쥐어짜내기 위해 가장 열악하고 분리된 일자리로 내몰고 있으면서도 최저임금조차 주지 않는다. (가령, 발달장애인 “보호 작업장”의 경우) 환경이 이런데도 장애인 노동자들에 대한 생색내기는 아니꼬울 정도다. 장애인이 노동 “기회”를 통해서만 이익을 얻고, 그런 기회에 감사해야할 정도로 노동이 중요한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 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똑같은 문화적 이상과 열망, 그리고 꿈을 가져야 한다고 배웠다. 또한, 노동은 무조건 숭고한 것이고, 직장을 동경해야 하고, 임금 노동자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자유라고 배웠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이처럼 환상적인 노동에 접근할 기회를 거부당한다. 우리들 가운데 다수는 정부 지원이나 가족의 도움, 심지어는 자선에 의지해 살고 있다. 중증 장애인이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은 26.1%에 불과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동연령대 비장애인의 취업률은 82.1%에 달한다. “침상(beds)” - 요양원의 공실율과 은행 계좌를 채워주는 노인과 장애인을 일컫는 말 - 으로 있을 때, 우리는 이 나라 경제에 가장 크게 기여한다.

  따라서 다른 집단과 달리 장애인을 해방시켜주는 것은 노동 - 특히, 월마트 같은 곳에서 손님들에게 길 안내나 인사를 하는 하찮은 노동 - 이 아니라 노동하지 않을 권리(the right to not work)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고 또 이를 자랑스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이같은 사고 변화가 손상을 입은 사람의 권리와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의 자기-이미지를 대하는 일반인의 목표와 태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그렇다고 장애인들이 활동을 그만둬야 한다거나 다시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격리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노동하지 않을 권리는 노동 생산성, 고용가능성, 혹은 임금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많은 장애인들은, 특히 중증 장애인들은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어서 노동을 하지 못하거나,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어서 괜찮은 일자리에 고용되지 못하고 있다.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적 변화만큼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의식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노동뿐만 아니라 노동 행위의 의미, 그리고 임금 노동을 통해서만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사고를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아울러 노동의 의미를 회의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노동의 의미를 평등과 참여의 징표로서 액면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좀 더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ADA 시행과 정부의 기업 지원이 장애인 고용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고용주인가 아니면 고용인인가?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나는 현재의 제도 아래에서 동등한 노동권을 갖기 위한 투쟁을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이와 함께 지금의 제도를 지양해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장애인들은 일하고 싶어 하고 또 일을 할 수 있지만, 보험 회사와 고용주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 장애인이 대학에 들어가는 건 매우 어렵다. ADA가 있었지만 내가 지원한 모든 학교에서 나를 차별하였다. 이처럼 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인들은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부조리함이 존재한다. 좋은 일자리는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주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SSI의 혜택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중증 장애인들에게 SSI는 필수적인 욕구를 해결해주는 유일한 급부일 수 있다. 일자리가 없는 노인이나 장애인들에게 지급하는 SSI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준다. 장애인이 되어 SSI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당하는 자가당착, 곤경, 경제적ㆍ사회적 도전을 보면서 나는 매일 혼란스럽다. 현재의 제도 안에서 평등한 노동을 위해 싸우는 것 - 즉, 피착취 계급의 일부가 되는 것에 대항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착취 계급의 일부가 될 권리 - 이 투쟁의 최종 목표여야 하는지가 의심스럽다.

  지금의 사회 속으로 “주류화 되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면 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 목표인가? 올리버의 말처럼 “근본적인 변화 없이도 우리가 완전한 시민권과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가진 장애인으로 영국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회 언저리에서 서투른 솜씨로 하찮은 일이나마 하게 해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영국 사회에 장애인이 완전한 부분으로 역할하려면,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근본적인 사회 변화는 멀고도 먼 길처럼 보인다. 이를 인정하지만, 그렇더라도 시스템을 바꾸는 길은 그 시스템에 참여하는 것뿐이라는 말만 너무 난무한다. 경제적ㆍ사회적으로 풍요한 사람일수록 기존 시스템 안에서 요령껏 잘 살 수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노동을 통해 직장에서 성공한 덕분이라고들 말한다. 여기에 중요한 진실이 담겨있다.

  노동 평등의 첫 번째 단계는 요양원에서 나와 독립생활을 하는 것이다. 요양원을 나오는 순간,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접근 가능한 환경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들도 지역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교류할 수 있고, 관심사를 서로 나눌 수 있고, 지리적ㆍ환경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같은 물질적 변화 - 즉, 접근할 수 있는 건물과 교통, 그리고 독립생활 - 는 장애인 해방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많은 장애인들은 실제로 생활 임금 쟁취 - 이는 초기 영국 장애운동의 주요 이슈였다 - 를 위해 투쟁해 왔는데, 이것은 손상을 입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쟁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쟁점은 노동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으며, 생활할 권리(right to live)뿐만 아니라 노동하지 않을 권리까지도 포함한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얼굴, 완벽한 일자리, 완벽한 가족, 완벽한 몸을 갈망하는 자본주의 소비자 사회에서, 장애는 결코 달갑지 않은 것이거나 심지어 온전하게 수용되지도 않는다. 외견상 자립과 자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자본주의〕문화에서, 이런 미신에 부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애인의 의존성은 언제나 매도되거나 기껏해야 보호의 대상이 될 뿐이다. 진보적인 시설과 사람들조차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차별하였다. 대다수 비장애인들처럼, 진보주의자들은 병신들(crippled people)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질색하고, 두 가지 단순한 진리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첫째, 이들은 자신도 오래 살다보면 우리 같은 처지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장애운동가들은 일반인들이 자신을 “일시적인 비장애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누구나 늙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대부분 허약해지는데, 이 사회는 노인의 삶의 질과 부자유함에 대한 관심이 놀라울 정도로 부족하다. 나는 이것이 거부감에 대한 집단적 대처 메커니즘(coping mechanism)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일반인들은 장애인에 대한〔불평등한〕대우가 고용된 비장애인들의 처지보다 조금 더 심한 정도일 뿐이지, 근본에 있어서는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많은 미국인들은 마땅한 건강보험, 고용 안정, 그리고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고용의 비정규직화, 저임금, 생계 문제로 퇴직 후에 재취업한 수많은 노인들, 유급 휴가의 축소, 주말 근로와 야근, 그리고 빈곤층과 중산층의 부채 증대 등, 이 모두는 우리가 노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들이다. 노동은 궁극적인 자유이자 독립의 중요한 징표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 노동은 자유와 독립이라는 이상의 반대말일 때가 더 많다.

  조지아주의 어느 벼룩시장에 있었던 일이다. 이 시장에서 물건을 팔아 먹고사는 이빨이 다 빠진 한 중년 여자가 내게 다가와서 “넌 참 용감하구나, 내가 너처럼 살아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라고 말했다. 당시 13살이었던 나는 웃고 말았다. 나도 그 여자처럼 사는 게 끔찍했기 때문이다. 특이한 배경과 가족의 지원 덕분에 교육 혜택을 받고 있던 나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실체를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슬픈 일이 있다. 사람들이 조금만 신경 쓰면 자신도 장애인과 똑같은 억압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벼룩시장에서 만난 그 여자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둘 다 우리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거나, 우리의 기여를 아주 제한적으로 평가하는 사회의 희생물이다.

  이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근본에서는 같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장애인이 좌파의 정책과 매체에서 무시로 배제되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ADAPT를 비롯한 많은 장애운동단체들은 투쟁을 할 때 다른 정체성 집단과 힘을 합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장애는 이 같은 투쟁을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대포로 만들지 못했으며, 그 결과 장애운동이 진보 투쟁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우리는 무시당해 왔으며, 실제로 여성운동, 인종운동, 게이와 레즈비언 운동, 나아가 노동운동조차 우리를 멀리한다. 실례를 들자면, 최근 국제서비스종사자노조는 세계에서 가장 큰 요양원인 러구너 혼다(Laguna Honda)에서 일하고 있는 조합원들의 고용 유지를 지원하기 위해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병약자들(invalids)이라고 주장하여 장애 운동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슬픈 현실이지만, 나는 이런 것이 문화적으로 가장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장애를 의료적이고 자선적인 시각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한 명백한 사례가 장애임에도,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조차도 우리 운동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장애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ㆍ사회적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장애는 전쟁,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환경오염 탓일 수 있다. 나의 경우, 지하수를 불법적으로 오렴시킨 미국 공군 하청업체 탓에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그들은 우리 동네 식수원 근처에 40년 이상 독성이 강한 화학약품을 몰래 묻었지만, 그 피해가 드러난 뒤에도 문제 해결에 미온적이었다. 아마도 내가 산 곳이 가난한 라틴계 주민의 거주지이자 인디언 보호 구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군 측의 무관심 때문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손상을 입었다. 결국, 나 같은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말이다.

  손상을 입었거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 앞서 말했듯이, 이런 것은 가족이나 기술의 도움, 그리고 인내심으로 극복할 수 있다 - 은 일반적 기준으로 보면 섹시하지도 않고 독립적이지도 않다. 손상은 우리가 상호의존 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장애인은 독립을 상징하는 일터로 내몰리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장애인들에게 고용은 그림의 떡이다. 우리는 비효율적인 노동자로 간단하게 치부되는데, 여기서 비효율이란 훌륭한 노동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고용주로부터 차별을 받는다.

  우리는 무엇이 값비싼 적응인지, 또 무엇이 돈으로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인간에 대한〕이해인지 묻고 싶다. 서구 문화는 사회에 유용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아주 협소하게 사고한다. 돈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ADAPT와 함께 행진하는 장애인들은 유급 일자리는 없을지언정 저항을 조직해서 사람들을 시설에서 해방시키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치가 없단 말인가?

  장애인은 다른 측면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이것은 기존 문화 가치 체계를 위협하는 것이다. 교육, 법률, 기술 발전 따위가 일부 장애인들의 고용 분야 차별을 없애는데 기여할 수 있지만, 우리는 맑스주의 경제이론, 특히 초과 이득은 노동자가 덧붙인 가치가 아니라 노동력보다 더 적은 임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에 기인한다는 잉여가치이론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통찰력을 깊이 새겨야 한다. 손상을 입은 사람을 전통적인 일터에서 배제시키는 법칙은 노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비장애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법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노동하지 않을 권리는 손상을 입은 사람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에게도 똑같은 가치를 지닌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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