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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음>행

 03. 컬쳐 포유




황산절경 사진 
  중국이 넓은 나라라서 그럴까? 중국 여행을 하면 여행 가이드들은 보통 ‘중국에는 몇 종류의 민족이 사나?’, ‘중국에는 몇 개의 성이 있나?’, ‘중국사람들이 못 먹는 한가지는?’, ‘중국의 4대 미인은’, ‘중국의 5대 명산은?’ 하고 묻고는 한다. 몇차례의 중국 여행에서 가이드들마다 똑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만큼 중국을 설명하는 간명한 방법을 찾는 것이기도 할게다.

  태산(泰山), 화산(華山), 형산(衡山), 숭산(崇山), 항산(恒山). 이렇게를 중국의 5대 명산이라고 한단다. 내가 올 초에 다녀온 황산은 여기에는 속하지 않지만 더러는 이 5대 명산보다 한 급 위라고 여기기도 한단다.

  명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霞客)이 일생 동안 중국 천하를 두루 다녀본 후 "오악(五岳)에서 돌아온 사람은 그 산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보통의 산 따위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러나 황산에서 돌아온 사람은 오악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칭송했다는데, 여기에서 비롯하여 황산을 산중의 산이라고 하나부다. 지체장애가 있는 나는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가 올라간 가장 높은 곳의 해발 고도를 기억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올라간다고 해도, 대부분은 자동차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등산 혹은 등고(登高)라고 할 수 없으나 그래도 마지막에는 내가 내발로 한발짝이라도 땅을 디디면 그것이 감격스럽고 해서 기억에 남는 모양이다.

황산여행에서 찍은 단체 사진 
  어릴적 내 고향 전북 장계는 사방이 산으로 막혀서 모두 해발 500정도의 고개를 넘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겨울이면 으레 며칠씩 자동차도 끊어지고, 여름에 폭우가 와도 길이 끊어지고는 했다.

  모래재, 집재, 육십령 등은 그 고개의 이름들이다. 나중에 차를 몰고 올라갈 수 있었던 지리산의 섬성재, 한계령, 동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던 미시령, 10여년 전 걷고 기고해서 올랐던 제주도 성산일출봉, 케이블카를 타는 재미를 보여준 무주리조트의 덕유산 정상근처 등은 그런 내 기억 속에서 한 봉우리들을 차지하고 있는 곳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황산은 나에게는 신기록을 안겨준 곳이다. 1990년 12월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자연유산으로 인정되었다는 중국 남부의 안휘성 동쪽에 자리 잡은 이 산의 최고봉인 연화봉은 해발이 1,860m로 나의 모든 등고 기록을 단박에 바꾸어 놓았다. 그러므로 그 곳에 올랐던 기억은 오랜 동안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어느 작은 소도시의 옛날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2월의 황산시 날씨는 그리 춥지는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버스로 한 1시간 30분을 올라가면 황산을 오르는 케이블카의 입구에 도달한다. 평지에서 케이블카 입구에 오르는 길은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감아 올라 가는데 맑았던 날씨가 점점 흐려지더니 케이블카를 타는 산 중턱에 이르러서는 안개인지 운무인지가 짙게 드리워서 기온도 한참을 내려가고 몇m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시계도 흐려졌다.

  황산의 비경을 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월은 황산 관광의 비수기라 그 많다던 한국관광객이나 일본관광객은 별로 없고 중국사람들이 태반이다. 케이블카 아래로는 수만개에 이른다는 등산계단이 시작되는데 그 계단으로 어깨에 앞뒤로 물건을 메달아 출렁거리는 대나무 봉을 진 사람들이 저 위의 호텔들에 필요한 물품을 지어 오르고 있었다. 얼핏 생각하면 밤이나 한가한 때 케이블카에 실어 날라도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군가 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말에 수긍도 가고 반쯤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본 황산 안개 사진 
  케이블카는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운무속을 오르더니 거의 정상에 도달할 무렵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맑고 밝은 햇살 속에 산 정상이 나타났다. 높은 산은 기후의 변화가 심하다더니 이렇게 갑자기 변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진경산수’. 영정조 시대 조선미학의 한 정수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림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는 중국식 사고와 미학에 대한 저항으로서 우리의 산과 땅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말일테다. 그러나 한편으로 19세기 서양의 미학은 아름다움이란 대상에 심어진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의 문제임을 제기하는 인상파의 등장으로 새로운 지평을 맞는다.

  그러므로 ‘진경산수’는 한편으로는 거대중국의 인식론에서 벗어나는 민족적 지향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사적 인식으로부터는 조금은 멀어지는 문제를 동시에 갖는다. 어쩌면 현재의 한국의 상황까지도 이어지는 주변국의 근원적 고민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얘기가 옆으로 샜는데,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가끔 보는 중국 산수화의 기암과 절경이 나는 상상속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악산도 금강산도 볼 수 없었던, 남도의 산간지방에 살았던 내 눈에는 중국 산수 속의 풍경은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황산에서 나는 내가 보았던 많은 중국의 산수화가 어쩌면 ‘진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무 속에 문득문득 솟아오르는 봉우리들, 깍아지른 절벽 사이로 아득하게 펼쳐지는 산 봉우리들, 어디 공중에서 날아와 틀어 박힌 듯 불뚝 솟아 오른 암석들, 거기에는 그렇게 그림 속의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도 연화봉 정상까지는 상당히 걸어야만 했다.

  길들은 돌계단으로 정성스럽게 다듬어져 있어 걷기에 어려움이 없지만, 잔설이 남아 있고 응달은 살포시 얼어 있기도 해서 목발로 걷기도 어려웠다. 일행들은 나에게 가마 타기를 권했다. 가벼운 대나무 봉 두 개 사이에 역시 대나무로 만든 가벼운 의자가 가운데 만들어져 있고 이 가마를 두명의 짐꾼이 앞 뒤에서 어깨에 지고 가는 모양새다. 처음 타보는 가마도 그렇고 다들 나보다도 가냘펴 보이는 몸짐이라 그것도 마음이 불편했고, 또 가마위에 올라서 보면 출렁거리는 것이 자칫 가마꾼들이 실수라도 하면 저 낭떨어지 아래로 한순간에 떨어질 것도 같아서 흔쾌하지 않았으나 다른 수가 없었다.

황산 등반길 사진 
  모르긴 해도 4박5일 정도 황산여행패키지가 한 60-70만원 할텐데 고작 몇시간의 황산 트레킹 가마값이 이래저래 20여만원이 들었다. 그러나 돈보다도 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황산의 풍경은 내 마음을 달래 주기에 충분했다.

  기암과 괴석과 나무들, 청량한 공기와 뼈를 후비듯 파고드는 찬기. 물론 내발로 걸었으면 좋았겠으나 저들의 노동에 기대어 나는 황산을 볼 수가 있었다.

  연화봉 정상에서 본 황산은 참으로 좋았다. 보기 드물다는 맑은 날씨에 황산의 전경이 펼쳐져 있고, 그보다는 여기까지 올라서 그래도 내발로 정상에 섰다는 느낌이 훨씬 나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일행들에게 나는 몇 번이고 ‘나를 찍어 줘, 정상에 서 있는 모습이 잘 나오게’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황산 정상에서 찍은 단체사진황산 정상에 오른 이범재 대표 사진황산 정상에서 찍은 경치

  등소평은 75세인 1979년 황산을 2박 3일에 걸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황산의 개발을 지시했다고 한다. 아마도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도하던 등소평은 이 등정을 통해, 마치 모택동이 장강에서 수영을 하듯이 중국인민들에게 자신감과 건강함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황산의 개발을 통해 더 많은 인민에게 신화 속에 묻혀 있던 황산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20여년 후 한국의 한 장애인이 그 혜택을 보고 있었다.

  저녁에는 정상 부근의 서해빈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서해빈관 식당에서 3명의 한국 대학생 관광객을 만났다. 이들은 중국 전역을 여행하다가 상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황산 여행 프로그램을 구매해서 기차를 타고 왔다고 한다.

  불과 200여년 전에 열하일기를 썼던 박지원은 얼마나 어렵게 중국에 왔던가? 물론 지금의 중국은 당시의 중국이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는 또 얼마나 오랜 세월을 중국과 이어져서,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것인가? 하여 나는 세명의 여학생들이 너무나 용감해 보였고 자랑스러워 보였고 또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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