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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D.P.I. 김미선 부회장(소설가) 사진

03. 컬쳐 포유

제목: 세계 장애인 인권운동의 물줄기를 우리나라로 끌어오신 송영옥 변호사, 글: 한국 D.P.I. 김미선 부회장(소설가)


  평생을 통해 송영욱 변호사님처럼 한 길을, 한결같고 꼿꼿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걸어오신 분이 또 계실까. 장애가 분리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서, 장애인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통합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애타게 방향을 제시하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내놓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분. 올해 일흔이 되신 나이에도 변호사 사무실에 변함없이 출근하여 저녁 6시에 퇴근하시는 쟁쟁한 현역이신 분.

  드물게도 대학 3학년 때 소아마비에 걸려서, 어제까지 멀쩡하던 두 다리를 꼼짝할 수 없는 충격을 겪으시고도 졸업과 동시에 사법고시를 통과하셨던 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체중 57킬로를 유지하시는 분. 장애인복지신문 창간과 더불어 올해 17주년을 맞이하기까지 함께 해 오신 송 이사장님을 최근 행사장에서 뵈었을 때도 여전히 단아하시고 꼿꼿한 모습이셨다. “이사장님, 건강은 어떠셔요?” “ 음, 좋아요.” 아직까지 현역일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요? 라고 여쭈어보고 싶었지만 삶 자체에 대한 통제력을 일찍이 획득하신 분에게 너무 얄팍한 질문인 것 같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대신 얼버무리듯, 매일 출근하시냐고 여쭈어보았다.

  “그럼요. 그러나 전에 비하면 일을 많이 줄여서 하지요.” 그러나 아직도 이사장님의 자문을 기다리는 기업체들의 일들이 많으신 듯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처음 뵈었던 20년 전에도 변호사 사무실에는 얇은 침상 하나가 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송변호사님과 함께 하는 작은 침상, 그것이 힘의 분배를 조정하는 이사장님 나름대로의 건강비결이었을까? 6년 전에 신장암 수술을 받으시고도 여전히 현역으로 건재하시는 분, 브라보! 몸이 조금 더 잘 따라주고 덜 따라주는 것 정도로는 삶의 질을 결코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을 산 증인으로 보여주시는 분. 그래도 한번은 꼭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한창 펄펄하시던 대학 3학년 때, 갑자기 장애인이 되셨는데 어떻게 고시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는지요?”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짧게 한 번 씨익, 웃으시면서 그러셨다. “난 우리집에서 유일한 무녀독남이예요. 좌절하지 않고, 죽고 싶지 않았으면 인간이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 충격 속에 계시는 아버님 때문에 나까지 그럴 수가 없었지요.” 무서운 자제력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부모님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사람의 한 길 가슴속이란 얼마나 깊고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일까, 싶어서 새삼 숙연해졌다. 오래전인데, 이사장님께서 퇴근해 들어가시면,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 있는 두 발을 사모님 품으로 안아서 녹여주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사모님이 대단히 정이 많으신 분이거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상대적이라 이사장님께서 따뜻하셔서 사모님 역시 그러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곁말이라고는 없으시고, 언제나 깐깐한 모습이어서 더할 나위 없이 어렵게만 여겨지는 겉모습과는 달리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셔서 놀랐던 적이 전에도 있었다. 1981년 창설된 세계DPI 대회에 이사장님께서 몇 차례 참석하시더니 급기야 1986년에는 아태지역 총회와 세미나를 우리나라에서 치르는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그 당시까지도 우리나라는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학교에 떨어져서 울고 다니고, 공무원 시험이니, 일반 취업이니 모든 것이 캄캄하고 전무할 때였으니 민간 차원으로 무슨 국제대회를 치룰 수가 있었겠는가? 그때 이사장님께서 용단을 내리시고 순전히 개인출연으로 워커힐 호텔에서 DPI 아태지역 회의를 개최하셨다. 일본, 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대표들이 참가한 회의와 세미나를 꾸려나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힘든 일은 우리나라 장애인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최고급 호텔에서 장애인 국제대회라는 것이 처음으로 열렸으니, 많은 장애인들이 와서는 이것이 무슨 단체인지, 누구의 권한으로 이루어졌는지,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협조보다는 따지는 일이 더 많아서 옆에서 보는 우리 어린 스텝들이 흥분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종일 휠체어에 힘겹게 앉아 있던 이사장님은 일일이 대답해주고, 또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그 모든 의문과 불만을 다 끌어안으시면서 결국은 함께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공유하시는 모습에 새삼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DPI아태지역 부회장, RNN(Regional NGO Network) 의장 등을 맡으셔서 세계DPI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을 뿐 아니라, 시혜와 복지 차원으로 머물러 있던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계를 장애인 당사자들의 인권운동이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물꼬를 트시게 된 것이다. 장애인복지법, 장애인고용촉진법과 특수교육진흥법 등 장애관련 법안을 만드는 일에 법률적인 자문은 물론, 장애인 관점에서 통합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하여서 지금에 이르러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불리는 장애인 소비자주의, 재활이 아닌 인권의 관점, 개인의 치유가 아닌 사회 구조의 변화, 자립생활에 대한 방향 등, 앞서가는 세계 장애인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독려해왔다. 그리고 1990년에 제정된 미국장애인법 ADA를 들여와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UN 장애인10년 행동계획’과 ‘아태 장애인10년 행동계획’을 알리고 국가적인 정책이 되게 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셨다. 나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장애인 특수교육진흥법 개정안’에 내놓으신 이사장님의 의견이 인상 깊게 남아 있는데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이던 그 시절에 벌써 이사장님은 ‘특수교육진흥법’이라는 명칭을 거부하신 일이다.

  그것은 장애인을 특수한 집단으로 보고 특수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장애인을 분리하고 있는 것이므로, 장애인 교육 등에 관한 법률 또는 장애인 교육.훈련기본법으로 바꿀 것을 역설하신 것이다.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법률적인 용어로 버젓이 쓰이고 있던, ‘불구, 폐질자’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반인권적이고 반문화적인 태도라고 비판하면서 수정하도록 요구한 것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두고두고 고맙게 여겨지는 일 중의 하나이다. 내가 어렸을 때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불구자’라는 명칭까지는 하는 수 없이 참고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교사임용시험에서 떨어진 이유가 ‘불구 폐질자’는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공무원 시행령 때문인 것을 알고는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이 사회 속에서 ‘불구자’를 넘어 ‘폐질자’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정말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젊은 날 갑자기 장애인이 되시고도 자신보다 더 힘드셨던 부모님의 상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말없이 공부 속으로만 침잠하셨던 그 깊은 고독과 좌절은 이후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뜨거운 열정이 되어 쏟아져 내렸고 이 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직은 척박하고 지난한 장애인의 삶이지만, 이런 선배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에 우리 후배들은 더할 나위없는 안심과 기쁨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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