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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분기마다 발간하는 웹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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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에세이

03. 컬쳐 포유




  장애인에게 문화가 있는가

  먼저 ‘장애인에게 문화가 있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문화는 거의 부정되어 있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이므로 재활 치료를 받아서 최대한 정상에 가까워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면 장애는 부정하거나 외면해야 할 대상이거나 기껏해야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건 속에서 일상을 통해 어떤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지(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지)는 흔히 간과되고 만다. 이제까지 장애인의 ‘다른’ 문화가 부각되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장애인들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과 그릇된 편견 때문으로 여겨진다.

  장애인들을 비정상적인 집단, 뭔가 문제가 있는 집단, 어쩔 수 없는 집단으로 겨지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이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낮은 사회적 인식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해온 흐름이 주였던 것이다. ‘같음’을 부각하는 이러한 전략은 나름대로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 구성원 어느 누구도 드러내놓고 장애인을 배척하지는 못하며,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 입장을 말하지는 못할 정도가 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 개개인의 삶의 질과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낮으며, 비장애인에 비할 때 레벨이 현저히 떨어지는 집단으로서의 위치는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장애인당사자로서 피부로 체감하는 바이다.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꾸고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개선운동이 꽤 오랫동안, 상당히 거대한 규모로 지속되어오면서 우리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왔는데도 어째서 장애인은 여전히 비장애인의 희생을 대가로 한 ‘사랑’ 없이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존재임을 부각하는 ‘같음’의 전략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 때문일 것이라고 본다.

  ‘같음’의 전략은 이해와 포용, 화합을 이루려는 아름답고 숭고한 행위의 발로이기는 하지만 장애인을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천대하고 차별하는 사회 구조, 환경 자체를 바꾸어내는 노력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사회 구조와 환경을 바꾸려는 노력 없이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이며,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역설하는 것은 어찌 보면 현실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차별을 인정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면서 문제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차별을 없애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나마 숨겨지고 은폐되어왔던 장애인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일조했을지는 몰라도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장애인은 여전히 동정과 시혜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같음’만을 역설해서는 현실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간극을 줄여나가는 데 역부족이라는 한계가 있다. 장애인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장애인이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차별받으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겪어야 하는 경험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차별받고 있으며, 그러한 차별로 인해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음을 드러내려 한다. 우리는 분명 우리가 겪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며, 언젠가 장애 차별이 완전히 없어지는 그날이 오겠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매일 웃고, 울며, 먹고, 잠자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무언가를 하며 지낼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만들어가는 일상과 문화는 비장애인들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완전히 같지 않으며, 만일 비장애인의 기준에 의한다면 형편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의 것인 까닭이다. 어설프게 비장애인과 같아지기 위해 그들의 흉내를 내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고 차별하는 사회적 가치와 지배문화에 무릎 꿇으며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다만 우리 자신은 그저 우리 자신일 뿐임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나아가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가운데 부딪치고 깨어지면서 우리 스스로를 성장시킴은 물론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긍정적인 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물론 지체장애여성으로서의 내 경험은 매우 협소하기 때문에 유형별, 성별, 정도별로 다양한 장애인의 일상과 문화를 제대로 드러내는 데 제약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쌓여 우리 자신의 문화를 드러내고, 우리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힘으로 축적되며, 나아가 사회적 가치를 바꾸어나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한다.


  장애인에게 문화가 있는가

  먼저 양하지 장애가 있는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목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겠다. 목발을 처음 짚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 전에는 바깥활동을 하지 못하고 거의 집안에서 지냈다. 부득이하게 외출을 해야 할 때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 다녔다. 그리고 가끔 대문 밖으로 나가 놀 때는 네 발에 신발을 신고 기어다녔다. 강아지처럼. 그런 내 모습은 당연히 주변사람들에게 낯선 것이었기에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그런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고, 되도록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밖에 나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질 때는 타협안으로 대문 밖까지 누군가가 안거나 업어서 데려다주면 한 자리에 계속 앉아 노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야 할 때는 또다시 식구들이 데리러 나왔다. 당연히 내가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시간을 선택할 자유는 없었다. 정히 화장실이 급하면 대문 안에다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 집에 들어갈래!” 하고. 엄마는 그때마다 사내애도 아닌 계집애 목청이 왜 그리도 크냐고 하셨지만, 엔간한 목소리를 내서는 집안 식구 아무도 나와주지 않으니 나로서는 나름대로 처절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을까? 집안에서는 항상 기어다녔다. 그때는 어른들이 목발에 의지하지 말고 하루빨리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알게 모르게 강요했기 때문에 실내용 목발을 마련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밖에서도 사용하지 말아야 할 물건을 집안에서까지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가끔 친구 집이나 친척집에 갈 때는 목발 없이 실내에서 움직일 자신이 없어 곤란했다. 목발의 더러워진 밑바닥을 닦을 걸레를 당당히 요구하기가 왜 그리 힘들던지... 궁여지책으로 목발 바닥 고무 부분에 씌울 헝겊(덧신을 상상하면 된다)을 마련해보기도 했지만 미리 약속하고 친구집에 가게 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아 언제나 타이밍이 맞지 않았었다. 결국 남의 집에 가서는 목발을 닦고 집안에서도 짚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걸터앉았다가 조금씩 집안으로 밀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곤 했다. 예전에는 단칸방에서 사는 친구들도 있었고, 자기 집이라고 해도 웬만하게 큰 집이 아닌 이상 그런 방식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요즘은 수술 후 무릎이 많이 약해져서 예전처럼 잘 기어다니지 못한다.

  가사를 할 때는 보조기를 신고 걸어다니며, 보조기를 신고 있지 않을 때는 앉아서 엉덩이를 밀며 조금씩 이동한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세살배기 아들이 따라하지만 나는 태연하다. 남과 확연히 다를지언정 내 몸의 조건에 맞춰 생활해나가는 것이 하등 부끄러울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다만 위생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 손은 자주 닦는다. 결벽에 가까울 만큼. 골절로 인해 몇달 동안만이라도 목발을 짚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게 ‘그렇게 힘든 목발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고 말하곤 한다. 사실 지금처럼 목발과 친숙하고 익숙해지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우선 보폭에 맞추어 목발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데 익숙해지기까지가 가장 오래 걸린 것 같다. 넘어지고 깨어지고 몸으로 때워가며 숙련되어갔다. 그리고 나서도 문제는 남았다.

  겨드랑이가 엄청 아프며, 목발의 나사가 빠져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가끔 목발이 부러져버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그래도 예전엔 행동반경이 그리 넓지 않아 이웃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귀가하곤 했다. 목발에 익숙해진 것과 비례해서 어깨는 점점 더 딱 벌어지고 팔은 엄청 굵어졌다. 그래서 남들이 눈살 찌푸릴까봐 민소매 옷은 입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슬금슬금 반발심이 든다. ‘팔뚝 가는 사람만 민소매 입으라는 법 있나? 나 시원하면 그만이지...’ 하는 배짱이 생긴다. 올 여름 폭염이 찾아온다는데 민소매에 한번 도전해보려 한다. 목발은 내 보행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여러 다양한 용도로도 쓰인다.

  먼저 선 채로 움직이지 않고도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끌어당긴다든가 높은 곳에 있는 물건에 손을 대야 할 때 목발이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한다. 또 야외에서 마땅히 앉을 곳이 없을 때 나는 목발을 깔고 앉곤 한다. 그러면 차가운 바닥과 약간의 거리가 생겨 좋고 더러운 흙이 엉덩이에 묻지도 않아 일석이조다. 한편 나처럼 목발을 짚는 남편은 목발로 커튼을 젖히거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옷걸이를 걸기도 한다. 이런 장면은 다른 어떤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 집안만의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또 화장실에서 목발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쓸 수 있는 도구 역할을 한다. 예전엔 공중화장실 안에 가방걸이가 거의 없었는데, 목발은 때로는 가방걸이로, 또 때로는 옷걸이로도 쓸 수 있어 아주 유용했으며, 지금도 나는 키가 작은 탓에 화장실 안 가방걸이보다는 목발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밖에도 목발의 용도는 다양하다. 어릴 적 나를 골탕 먹이고 도망가는 아이를 쫓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목발을 들어 몽둥이로 사용했다. 물론 몇 번 시도해보진 못했고, 내 쪽에서 먼저 폭력을 쓴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억울해하며 발만 동동 구르는 것보다는 한결 통쾌했다. 내 주변에는 목발을 병따개로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한번도 그 광경을 직접 본 적은 없어 아쉽다.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어떻게 그렇게 힘든 목발을 짚고 다니느냐는 사람들의 안쓰러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목발은 하지장애가 있는 내게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음식점이나 공공장소 등 어딘가에 가서 의자에 앉을 일이 생기면 언제나 종업원이나 유난히 친절한 사람들이 다가와 목발을 치워주겠다는 제안을 하곤 한다. 솔직히 나는 그들의 제안이 그리 달갑지 않다. 목발은 내 몸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내가 필요할 때 수시로 손에 닿을 수 있는 장소에 놓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괜찮다고 사양하면 그들은 또 말한다. 필요할 땐 언제든 제자리에 갖다 주겠다고.

  하지만 일행이 아닌 이상 그들이 나와 행동반경이 같을 수 없으며 내가 그 장소에 머물 때까지 끝까지 남아 있는다는 보장도 없어 내 입장에서는 믿기 어려운 약속이다. 특히 화장실에 가야 할 때 나도 남들처럼 조용히 다녀오고 싶지 유난을 떨면서 “저 화장실 가야 하니 제 목발 좀 갖다 주세요.”라고 티를 내고 싶지는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특히 소심한지는 몰라도 하찮은 일일수록 남에게 부탁해서 도움을 받기보다 혼자 조용히 처리하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의 심리 아닐까. 그런 이유로 거푸 사양을 하면 어떤 분은 내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몹시 불쾌해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사람들이 목발을 어딘가 구석진 곳에 치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장애를 부정하는 태도와 연관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목발은 자랑하거나 내세울 만한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을 그들은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즉 장애는 부끄러운 것, 남 앞에서 되도록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의식적이진 않더라도 적어도 장애인을 접할 기회가 적은 비장애인들이 목발에 익숙하지 않아 목발에 걸리기도 하고 목발이 쓰러져버리곤 하는 상황에 몹시 당황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나는 그들이 목발에 하루빨리 익숙해져서 우리 장애인들이 목발을 가까이 두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또 어떤 이들은 나와 이야기하면서 내 곁에 세워둔 목발을 더듬기도 한다.

  다른 불순한 의도는 전혀 없으며, 단지 자주 접하는 물건이 아니니까 신기해서 그러는 줄은 잘 알지만, 그래도 남의 목발에 손대지 않는 것이 예의바른 행동일 것이다. 왜냐하면, 목발은 내 몸이나 마찬가지니까... 내 몸에 누군가 허락도 없이 손대는 게 달라울 리 없으니까... 이 글을 읽고 누군가 눈살을 찌푸리며 ‘꼴에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반응 수도 없이 경험해보았지만, 나, 꼴에 여자 맞거든요? 그리고 여자든, 남자든 허락 없이 남의 몸에 손대는 것은 결코 예의바른 행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글렌 화이트라는 미국의 자립생활운동가는 장애남성인데, 주변사람들에게 허락 없이 자기 휠체어에 손을 대거나 밀지 말라고 요구한다고 한다.

  휠체어는 자기 분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얼마나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한가? 비장애인 역시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여자든, 남자든, 그 사람 꼴이 어떻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한다면 허락도 없이 남의 몸에 손대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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