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단 메뉴 바로가기
  2. 본문 바로가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야기 프리즘
HOME > Webzine 프리즘 > Webzine 프리즘
본문 시작

webzine 프리즘

프리즘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분기마다 발간하는 웹진입니다

지난호바로가기 이동
시선과소통

김범곤 노숙, 정신장애 혹은 인권


노숙, 정신장애 혹은 인권김범곤 (대한성공회 비젼트레이닝센터 사무국장)


 우리사회에서 노숙인이 항간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로 인한 IMF체제 이후 경기가 극도로 악화되면서부터다. 대량실업이 크게 사회문제화 되고 직업과 주거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만화방이나 고시원 그리고 길거리로 나 앉으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노숙인이 사회복지정책에서 관심을 받기 시작한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인권증진을 위한 노력은 과거보다 조금 나아졌다고 할 수 있겠으나 매우 미흡한 상황이다. 어쩌면 더욱 더 안 좋아졌을 수도 있다. 도리어 IMF체제 초기 시민들의 우호적인 공감대가 일정 정도 있었다면 요즈음은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 속에서 노숙인 개개인의 무기력, 나태함, 의존성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숙인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 특성으로 인해 정신건강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 가장 지배적인 입장이다. 한편 노숙인이 정신질환 고위험군임을 실증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간 이루어진 노숙인 정신장애 유병율은 연구방법과 대상지역에 따라 편차가 많다. 그러나 주요 정신질환의 경우 적게는 4%에서 많게는 59.1%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이는 최소치로 추정했을 때도 일반 인구에 비해 4배나 높은 유병율로 노숙인이 정신장애의 고위험군임을 나타낸다. 더욱이 노숙인의 정신장애는 노숙생활에 따른 심리사회적 고립감과 연계단절과정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아울러 노숙생활이 장기화되면서 자아존중감과 자아정체감이 극심하게 저하되고, 이로 인한 상실감과 우울, 비관주의, 대인관계 손상, 알코올남용, 심각한 정신질환 등으로 정신상태가 취약해진다. 취약해진 정신건강은 사회적 고립감과 사회적 지지망 및 연계로부터의 단절을 부추기고 이는 다시 노숙 장기화로 악순환 되고 있다.

 지금 시기에 노숙인과 노숙에 처해있는 정신장애인의 특성을 규정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와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 외국과의 유사성에 대해 일체 부정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예로부터 이어지는 공동체 문화라는 특성이 여러 가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호사가들은 정신장애를 가진 노숙인에 대해 규정을 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적지 않은 듯하다. 가령 ‘노숙생활이 정신질환으로 이완되었을 것이다.’와 ‘정신질환이 노숙생활로 나앉게 만들었을 것이다.’ 같은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의문을 갖고 이것을 규정하기 위해 여러 통계조사 결과가 뒷받침되거나 외국의 사례가 동반되기도 한다. 문제를 알아야만 올바른 조치를 할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보다 분명한 것은 안정적인 사회보장제도 속에서 예방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진단일 것이다. 또한 일반시민의 노숙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줄이고 더 나아가 노숙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정신장애인을 대할 때나 생각할 때에는 흔히 ‘의식이 혼란에 빠져 있기에 당사자의 의사결정 보다는 보호자에게 의존해야 한다.’, ‘근로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 생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보호자의 적극적 보호가 필요하다.’ 등의 편견과 나아가 배재하려는 태도가 잠재돼 있다. 더군다나 보호자가 없는 노숙인 중에서 정신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경우에야 더 말해서 뭐할까 싶다. 사회적 공공부조가 열악한 현실을 차치하더라도, 노숙이라는 트라우마 속에서 정신장애라는 굴레는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무한경쟁을 감당하기 어렵다. 또 그런 요구는 너무도 무자비하며 그 까닭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모조리 제거된 상태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노숙인이 거리에서 처한 상황이나 보호시설에 처음 들어 올 때의 상황에서의 안타까움은 많은 이들이 1차적인 치료에서 배제돼 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40대,50대, 30대 순의 연령대를 갖고 있는데 이미 만성화 단계에 진입해 있어서 정신장애로부터의 회복이 더딘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노숙인과 적잖이 생활을 같이 하면서 보고, 배우고, 느낀 점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는 점이다. 거리 상담을 통해 재활쉼터에 입소한 어떤 아저씨의 경우 처음에 혼자 힘으로는 세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직원들과 함께 씻고, 빨래를 같이 하며 2~3년의 재활과정을 거치고 임시취업의 형태이기는 하나 직장생활을 4년여 간 유지하는 경우를 보면서 정신장애를 가진 노숙인이라 하더라도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안타까운 점은 노숙인이 재활과정을 열심히 거치고 나더라도 이후 지역사회에 정착해 당당한 시민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후속지원이 뒤따라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안정적인 주거 공간 확보가 절실한데 현재 주거지원 대책은 난망하다. 주거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전 단계 과정 또한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쉼터 이후 다소나마 안정적인 주거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임시주거 지원 사업 및 매입임대주택 사업 확대 등 관심과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우리나라의 정신보건법이 제정된 지 1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노숙인에게 제공되고 있는 서비스는 자해와 타해의 위험이 전제된 강제입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팎으로 노숙인의 문제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정신장애와 알코올 의존이라고 앞서서 얘기들하고 있는데, 이런 정신보건계의 주장은 한낱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다. 이 또한 전문가라는 분들의 의식에 내재된 노숙인에 대한 편견과 배제의 반영일 수 있다. 지금이라도 정신보건사업측도 노숙인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는 주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보건과 복지가 결합하고, 예방과 초기 치료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이루어지면 회복의 경향이나 효과 그리고 사회통합은 좀 더 빨리 진전될 것이라 믿는다.

 노숙인에게 필요한 것이 진정 잠을 잘 수 있는 주거의 문제와 먹고 살 수 있는 직장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 또한 시민으로서 교육을 받을 권리,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분명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요사이 새로운 흐름을 이루며 각계에서 호응과 각광을 얻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강좌’가 노숙인에게도 제공되고 있다. 강좌를 마치며 ‘책을 처음 읽었다’, ‘바다를 처음 보았다’, ‘여행이 처음이었다’, ‘토론을 처음 해 보았다’, ‘연극이나 공연을 처음 보았다’ 고 말하는 수강생들이 놀랍게도 부지기수였다. 비단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 이 상황에 오기까지는 과연 우리만의 문제였던가를 고민할 계기를 마련하였고, 나아가 어떻게 나의 삶을 계획하고 준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이는 노숙을 고립된 당사자 개인의 문제만으로 보는 게 아닌 이 사회체제가 빈곤과 노숙을 어떻게 강제하였는가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단초를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 시기 노숙인과 저소득층에 대한 인문학 강좌를 곁에서 지켜보며 느낀 것은 사람의 욕구는, 사람의 권리는 일부분에 머물지 않으며, 단계적 수순으로 진행하지 않고,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상황에서 변화·발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강좌를 준비한 이들은 종래에는 스스로 자책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이 강좌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아마도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자활의 효과를 증대하고자 했을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애초의 의도와는 별개로 사회구조의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있고, 소위 말하는 ‘의식화’의 마당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한 쪽에서는 의식화가 촉진되고 다른 한 쪽으로는 당사자의 운동이 강화되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 만들고자 하는 세상은 어쩌면 훨씬 더 빨리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큼 다가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와 흥분을 가슴에 담는다.

 그래서 서울시의 적극적인 노력을 우선 높이 평가하고 치하하고 싶다. 그 이면에는 또 무엇인가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하더라도....

프린트하기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