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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재 산 사마중달이 죽은 공명의 영혼을 부르다


산 사마중달이 죽은 공명의 영혼을 부르다이범재 ([사]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


1. 인권연대의 10주년 모임에 가다

 나는 어제 참으로 오랜만에 시민단체의 행사에 갔다. 혼자라면 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을, 윤삼호 소장이 동무를 해 줘서 발길이 내켰다. 조계사의 문화관에서 열린 행사에는 300여명의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개중에는 유명인사도 있었고 많은 수의 사람들은 인권연대의 후원자들로 보였다. 인권연대를 오늘까지 이끌고 있는 오창익 국장은 인권연대가 정부나 기업의 돈을 전혀 받지 않고 개인들의 후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자랑을 했다. 정말 자랑할 만한 일이다. 비록 힘들겠으나 그것이 아마도 ‘인권단체’로서의 중요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행사는 노찾사, 이지상, 정태춘 등의 짧은 공연, 인권연대와 인연을 맺은 전교조 해직 교사들의 얘기,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인 리영희 선생의 격려를 겸한 말씀 등으로 채워졌다. 리영희 선생은 이제 많이 늙으셨고 병환의 뒤끝으로 몸도 조금은 불편해 하셨다.

 소위 ‘386’인 나는 어쩌면 김근태의 조직원이기도 할 것이고, 어느 만큼은 문익환의 신도이기도 할 것이고, 그러나 그보다 더 리영희의 제자라고 생각해 왔다. 20살 무렵 읽었던 ‘우상과 이성’에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 이르기까지 어리석은 나는 그나마 그에게 많이 기대고 있었다.

 오늘 소위 진보매체들은 어제 행사에서 있었던 선생의 말씀을 중요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나는 그 현장에서 그 말씀의 내용보다도 한 위대한 지식인의 늙어감이 안타까웠다. 동시에 그분의 모습에서 내가 고등학생이던 70년대 말 말씀을 듣기 위해 쫒아 다녔던 함석헌 선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함석헌 선생은 꼭 리영희 선생님 같았다. 비록 함석헌 선생님은 수염을 기른 한복 차림이셨고 리영희 선생님은 양복을 입고 계셨지만 꼿꼿한 말씀이나 강직한 얼굴은 내게 마치 30년이 지난 옛날로 되돌아 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다. 인권연대의 행사는 ‘운동권적 시민단체’-이 표현이 적절하지 않더라도 용서해 주기를-의 행사로서는 더할 수 없이 자유롭고 즐거웠다. 80년 무렵의 그 팽팽한 긴장감과 심장을 꿍꽝거리는 격동은 없었을지라도, 나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라도 멀리하고 싶었던 어떤 옛날의 순간들로 되돌아가 있었다. 함께 불렀던 옛날의 운동권 노래들은 내 눈시울을 물들게 했고 마음속에 투쟁심이 살아났다.

 무엇인가? 당대의 지식인들이 노구를 이끌고 말씀에 나서게 하고 어쩌면 변절했던 한 ‘옛날 운동권’의 머리에서 투쟁의 기억을 불러 오는 것은?

2. 92년 장마, 종로에서

 행사에서 정태춘은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내게 정태춘은 가수와 노래 잘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해 주는 존재다. 얼핏 보기에는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반주도 달랑 기타하나에 자분자분 말하는 것을 보면 미사리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그가 기타를 퉁퉁거리면서 노래를 시작하면 순식간에 관중을 장악하고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그는 가수다.  나는 남들보다는 한참 늦은 90년대 중반에 수배생활을 했다. 이미 영광은 가버리고 패배감과 시대에 뒤쳐졌다는 낙오감이 내 생을 압도하는 속에서 나는 힘든 수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 때의 내 삶에 위안이 되었던 노래가 그의 ‘92년 장마, 종로에서’이다.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 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 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높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높이
훨, 훨, 훨...


 이 노래에서 그는 한 시대의 종말을 노래했다. 그의 어떤 노래들에서 느껴지는 낙관이나 투쟁심이 아니라 회한과 연민이 느껴진다. 어쩌면 저 격동의 80년대와 90년대의 초입을 지나 맞이한 92년에 그가 느꼈을 허무가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쩌면 나는 90년대 중반에 내가 느끼고 있던 회한과 연민과 허무를 이 노래에서 부러 읽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가 후반부에서 노래하는 희망이 내게는 어설픈 장식처럼 느껴졌었다.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비가 갠 서울 하늘’이라는 공간은 ‘물대포에 쓰러지는 시청광장과 깃발군중들’의 공간과는 다르다. 그는 지상의 공간을 허공의 공간으로 대체하고 있을 뿐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깨달음, 사람과 함께 한 시대가 흘러갔다는 깨달음은 내게 어설픈 과거에의 향수와 미련을 버리게 하고 슬프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내게 이 노래는 한 시대의 종말과 그를 목도하는 자의 회환과 안타까움의 노래로 기억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제 문득 나는 내가 이 노래를 오독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람과 함께 시대도 흘러가서 단절하고 변화하고 정리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에 비둘기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3. 산 사마중달이 죽은 공명의 영혼을 불러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안타까운 서거 이후에 경향신문의 박성수 논설위원은 이렇게 썼다.

‘사공명 주 생중달(死孔明 走 生仲達).’ 삼국지에서 유래한 말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낸다’는 뜻이다. 적벽대전과 함께 제갈공명의 책략이 돋보였던 전쟁을 꼽으라면 사마중달과 대치했던 오장원 전투가 아닌가 싶다. 오장원(五丈原) 전투는 공명이 자신의 죽음을 이용해 적의 오금을 저리게 하고, 자신의 후광(後光)만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물리쳤다는 점에서 적벽대전과 대비된다.

제갈공명은 위(魏)나라 사마중달(司馬仲達)과 오장원에서 대치하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모습을 본뜬 목상을 만들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지시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공명의 지략에 여러 차례 혼쭐이 난 사마중달은 그의 사망소식을 듣고 이때다 싶어 추격에 나선다. 그러나 사마중달은 수레 위에 의연히 앉아 있는 공명의 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해 도망쳤다는 이야기다.

후세 사람들은 사마중달의 이런 행동을 보고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중달을 달아나게 하였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공명 주 생중달’이라는 고사성어에는 탁월한 인재는 죽어서도 그 값을 한다는 뜻이 담겨있고, 사마중달에 빗대서는 싸워보지도 않고 미리 도망치는 겁쟁이라는 풍자의 뜻이 있다. <후략>


많은 사람들이 이 해석에 동의할 줄 안다. 그러나 나는 이런 해석이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이르는 시점에서 노무현 전대통령은 공명과 같은 힘이 없었다. 그는 쫓기는 연약한 전임 권력자에 불과했다. 또 그는 공명과 같이 어떤 상황을 연출하지 않았고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만약 공명과 중달의 고사를 인용하고자 한다면, ‘산 중달이 죽은 공명의 영혼을 부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이 국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와 또 이 국면의 사태가 정확하게 파악된다.

 아마도 국민의 입장에서는 여야의 경쟁이, 또는 좌우의 경쟁이, 또는 진보와 보수의 경쟁이, 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경쟁이 발전적이고 미래적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17대 대선에서의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은, 비록 그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치적 수사일 뿐이라고 여겼을 것이며, 지난 시절 우리 사회가 이룬 어떤 성과들의 적어도 되돌려서는 안 되는 어느 지점을 기반으로 새로운 성과가 더해지는 어떤 새로운 지평이 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 지점, 되돌려서도 안 되지만 되돌려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지점은 아마도 추상적이나마 우리사회가 이룩한 절차적 민주성, 권력의 비절대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과 복지, 시민의 참여와 거버넌스의 확대, 정치적 경쟁자들을 최악의 상황으로까지는 몰아가지 말자는 신사협정과 같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지평은 아마도 혼란을 조절할 능력과 효율, 잃어버렸다고 느껴졌던 경제적 활력, 논의를 넘어서는 문제의 해결, 그리고 어찌해도 만족할 수 없는 대중적 욕망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법률과 제도에 의존하지 않은 과도한 정무적 힘을 과시했을 때, 먹고사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모든 것이거나 또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소외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위로 받기는 커녕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저만치 내팽겨졌다고 느꼈을 때, 지난 권력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너무하다 못해 금도를 넘어 섰다고 느꼈을 때, 무덤에 잠들어 있던 공명의 영혼이 이 세상으로 불려 나온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현재의 국면은 명백한 퇴행이며 이중적 전선이다. 퇴행이라는 면에서는 민족에게 불행한 일이고 이중적이라는 면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복잡성을 안겨주고 과도한 지혜를 요구한다.

 그렇다. 산 중달의 무지와 욕심이 죽은 공명의 영혼은 물론이고 나에게는 함석헌 선생이나 리영희 선생의 말씀도 정태춘의 노래도 그리고 변절했던 내 마음의 투쟁심조차도 다 불러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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