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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권 고려시대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려시대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정창권 (고려대학교 국문과 전 초빙교수)


 지난번에 우리는 고려시대 장애인 복지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고려시대 장애인사, 특히 자료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시각장애인의 활동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다시 말하지만 고려시대 장애인의 기록은 조선시대에 비해 현저히 적어서 지금까지 밝혀진 바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고려시대 시각장애인은 주로 점복업에 종사하며 스스로 먹고 살았다. 당시 이들은 승려의 차림을 하고 다니며 '맹승(盲僧)'이라 불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불교도가 아닌 도교의 한 부류인 도류승(道流僧)이었다. 이들 맹승은 사람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쳐주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심한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고려 원종 때의 백량, 충렬왕 때의 종동, 공민왕 때의 석천록 등이었다.

 김준(金俊)이 이 말을 듣고 문황ㆍ최주ㆍ문광단ㆍ문영단ㆍ이수지 등을 국문하여 죽이고, 권수균 부자와 유종식 등을 섬에 유배하고, 문황과 이수균의 가산을 적몰하여 김인문과 현군수에게 주었으며, 또 맹승(盲僧) 백량(伯良)이 그 길흉을 점쳤으므로 바다에 던져 죽이고 집을 적몰하였다(《고려사》열전43 김준).

 왕종(王琮)은 본래 병이 많은지라 충렬왕 3년에 그의 어머니 경창궁주(慶昌宮主)가 맹승(盲僧) 종동(終同)을 불러 액(厄)을 없애는 방술을 묻고 초제(醮祭)를 배설하여 기도한 후 전찬(奠饌)을 묻으니, 내수(內竪) 양선과 대수장 등이 무고하기를, "경창궁주가 그 아들 왕종과 더불어 모의하여 맹승(盲僧) 종동(終同)으로 하여금 상(上)을 저주케 하고, 왕종으로 하여금 공주에게 장가들어 왕을 삼고자 한다." 라고 하거늘, 왕이 이습ㆍ인공수ㆍ이지저ㆍ인후ㆍ장순룡ㆍ차신 등에게 명하여 맹승(盲僧) 종동(終同)을 국문하고, 또 중찬 김방경과 밀직사 허공, 감찰시승 조인규 등에게 명하여 경창궁주 및 왕종을 국문하니 그들이 모두 불복(不服)하였다(《고려사》열전4 종실2 원종).

 오인택(吳仁澤)의 아들 전 군부판서 오영주와 삼사판관 오영좌가 그 어머니와 더불어 맹인(盲人) 석천록(石天錄)에게 점(占)을 치기를, "최영과 이구수가 언제 쫓겨날 것인가?" 라고 물으니, 석천록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으리라." 라고 하였다.

 이 말이 누설되어 오영주를 기계로, 오영좌를 천령으로 귀양보내고, 맹인(盲人) 석천록(石天錄)도 매를 쳐서 귀양보냈다(《고려사》열전27 오인택).


 물론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일부 시각장애인은 음악가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 신우 때의 김철이 바로 그러하였다.

 경오(庚午)에 신우가 정비전에 행차하였다. 맹인(盲人) 김철(金哲)이 퉁소를 잘 불어 항상 노영수의 집에 출입하였는데, 신우가 그 집에 가기만 하면 김철을 불러 퉁소를 불리면서 권태를 잊곤 하였다. 김철은 신우를 꾀여 그릇된 일을 하게 함으로써 악행을 조장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김철을 미워하여 없애려 하므로, 김철이 왕의 교지를 위조하려다가 발각되어 곤장을 맞고 금주의 금산에 유배당하였다(《고려사》열전48 신우 10년 2월).


 한편, 고려시대엔 한쪽 눈을 실명한 사람들의 경우 특별한 제약 없이 관직에 올라 다양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듯하다. 예컨대 충렬왕 때 종실 이공(李恭)은 성품이 강직하여 왕이 세자로 있을 때에 자주 직언(直言)을 올리므로, 왕이 노하여 그의 눈을 발로 차서 한쪽을 눈을 멀게 하였다. 하지만 왕은 즉위한 후 그의 충직함을 생각하고 문득 높이 등용하였다. 이에 이공은 강려와 더불어 왕을 위해 왕호의 동정을 엿보았으며, 황윤전과 김성만은 배에 포목 2만필을 실어다가 바쳤으므로, 왕호는 이 때문에 그들을 매우 미워하였다(《고려사》열전4 종실2).
 또한 널리 알려져 있듯이 궁예는 어렸을 때 한쪽 눈이 멀었지만 훗날 군주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본디 궁예는 신라 47대 헌안왕 또는 48대 경문왕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는 범인과는 다른 뛰어난 능력을 타고 났다. 태어날 때 집 위에 흰 빛이 어리어 긴 무지개 같았다고 하고, 그날이 중오일(重五日)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태어나자마자 이미 이빨이 나 있었다고 한다.
 장차 나라를 해치리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이에 왕은 갓 태어난 궁예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다락에서 떨어뜨렸는데, 유모인 종이 받아서 살아났으나, 결국 한쪽 눈이 멀고 말았다. 유모는 그를 데리고 도망가서 키운다. 궁예는 집을 나가 승려 노릇을 하는 등 온갖 고난을 겪으나, 그때마다 투쟁으로 극복하고 승리자가 된다. 마침내 군주의 지위에 오른 궁예는 자신은 미륵불로서 이 세상에 내려왔으니 모두들 숭앙하라고 하며, 두 아들을 보살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궁예는 정복과 수탈을 계속했으며, 사람들이 조작된 신화를 불신하는 기미를 보이자 더욱 횡포한 짓을 일삼아 누구든지 서슴지 않고 죽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궁예는 마침내 왕위에서 쫓겨나 도망을 가다가 이름 없는 백성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처럼 고려시대 장애인사는 대체로 시각장애인에 관한 기록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실정이다. 고려시대 시각장애인은 주로 점복업에 종사하며 스스로 먹고 살았고, 그 능력이 출중하여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그들에게 점을 치거나 기도를 부탁하곤 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엔 한쪽 눈을 실명한 사람들의 경우는 특별한 제약 없이 관직이나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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