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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 소통
 미국에도 차별은 존재한다.

하성준의 유학일기 하성준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재활상담 석사과정)


  필자가 한국에서 일하던 2006년은 한참 장애인차별금지법안의 마련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던 때이다. 그때 참고 된 많은 외국의 사례들 중에서 미국 장애인법(ADA: 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법은 다른 나라 영국의 장애인차별금지법, 독일의 평등법과 함께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다룬 독특한 법률로서 우리나라 장애인차별금지법 법안 제정 초기단계에서 상당히 참고 된 법률 중의 하나였다. 필자가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으면서 사실상 ADA의 혜택이라고 할까, 아니면 효과라고 할까 뭐 그런 것을 느끼는 건 아니다. 미국에도 미국 나름의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 장애인들 역시 우리네 삶의 모습과 비슷하게 이러한 차별을 의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ADA가 제정된 지 거의 20년이 되어가지만 그 동안 눈에 띄는 법률의 개정이 없는 것을 보아도 미국 장애인들의 ADA에 대한 기대는 상당히 낮다고 짐작된다. 또 많은 장애인들이 실제로 ADA 이후 차별이 더 심해졌거나 혹은 차별이 개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조사도 있다고 하니 법률의 제정이 반드시 해결책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이제 재활 법 508조(The Rehabilitation Act Section 508)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이 법률은 공공 및 사적 정보접근에 있어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동등하게 접근을 보장해야 하고 접근이 불가능할 경우 적절한 대체수단(Alternatives)이나 합리적 배려(Reasonable Accommodations)를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법률이다. 이 법률의 제정으로 인해 변화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홈페이지 하단에 “Section 508"이라는 링크가 생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미국 장애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뭔가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또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은 미국인의 경우 ADA나 재활 법 508조에 의해 지켜야 할 사항들을 일일이 고려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별도로 컨설팅 하는 업체에 용역을 맡기기도 한다고 하니 법률의 제정, 그리고 그로 인해 보장되어야 할 것들과는 상관없이 차별이라고 할까 불이익이라고 할까 하여튼 그런 것을 장애인들의 마음속에서 몰아낼 수는 없는가 보다.

  이제 구체적으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미국 장애인들의 실상이라고 할까 그들이 느끼는 차별과 그에 대처하는 방법, 그리고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들과 학교를 비롯한 공공기관들의 차별 해소를 위한 노력의 형태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어요!

  우리학교 도서관은 벌써 2년이 넘도록 공사 중이다. 필자가 처음 이 학교에 온 2007년 1월에도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공사를 하고 있으니 실제 공사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2년이 넘은 것만은 분명하다. 도대체 도서관을 어떻게 얼마나 고치기에 새로 건물을 짓는 것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정도라면 도서관 건물의 애칭을 “비놀리아”라고 해도 그리 심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 필자가 다니던 대학의 본관 건물을 새로 지을 때 있었던 일이다. 한 선배가 공사를 시작할 때 입학했는데, 휴학하고 군대 갈 때까지 공사가 끝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입대하고 제대했는데, 복학해서 학교에 다시 왔더니 아직도 건물을 공사하고 있더라나! 그래서 그 선배가 그랬다고 한다. “아직도 그대로네!”. 비놀리아 비누의 유명한 광고 카피....  그건 그렇고 이 도서관이 얼마 전 필자가 출석하는 수업시간에 뜨거운 감자가 된 적이 있다. 수업시간에 장애모형에 대해 토론하던 중 손상(Impairment), 무능력(Disability) 그리고 사회적 불이익(Handicap)의 개념차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일이다.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일부 학생들이 개념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자, 한 똑똑한 장애학생이 예를 이렇게 들었다. “나는 다리를 쓸 수 없다. 이것은 손상이다. 그리고 나는 다리의 손상으로 인해 걷지 못한다. 이것은 무능력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타기 때문에 공사 중인 도서관에 다니기 불편하다. 이것이 바로 불이익이다.” 이렇게 아주 잘 설명했다. 그때, 이 말을 들은 어떤 학생이 그거 차별 아니냐? 너는 왜 차별을 당하는데 가만히 있느냐? 이렇게 말을 했다. 그때, 이 학생에게 뭐라고 딱 말하는 장애학생이 아무도 없었다. 물론 내가 한 마디 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아까 개념을 잘 설명한 똑똑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차별은 실제로 일어나는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당한 장애인이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여기에 대해 차별을 했다고 소를 당한 측이 차별한 적이 없다고 입증해야 하는데, 이 입증이 명확하지 않거나 불분명하거나 입증이 객관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때 비로소 차별을 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설명했다. 참 교과서적인 답이라고 당시에 생각했는데 이 말이 후에 필자로 하여금 차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부분이 되었다. 즉, 장애를 가진 학생이 도서관에서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도서관에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그곳의 자료를 실제로 활용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만약 필요도 없으면서 고의적으로 도서관을 여러 차례 방문해서 그걸로 차별사례를 만든다면 재판에서 역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도덕적 회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실제로 이런 방문이 몇 번 반복되면 도서관측에서도 나름 배려를 위한 방법을 찾게 되는데 이러한 중재과정에서 차별이 해소되면 그걸로 끝이다. 도서관에 도서검색 및 개인용도로 활용하는 컴퓨터가 100대 있는 공간에 한 대의 컴퓨터만 장애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도 설치하고 책상도 특별한 걸 쓰고 키보드나 마우스 등을 별도로 설치하면 그걸로 차별은 해소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현실이 미국의 현실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이렇게 설치된 컴퓨터를 이용하는 장애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 차라리 자기 집이나 방에서 자기 것을 사용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또 학교 전체에는 컴퓨터가 약 5,000대 정도인데 그 중에 장애인을 위해 배려된 컴퓨터는 채 100대가 안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즉, 전체 컴퓨터에 대해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컴퓨터 수가 적은 것이나 이러한 컴퓨터들을 장애인들이 적게 이용하는 것 등이 결국 힘들여 어렵게 제정된 법률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도서관 문헌자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자료를 전산화하기는 비용의 문제나 시간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새로 유입되는 자료들은 전산화하지만 기존의 자료들은 마이크로필름이나 이미지 파일형태로 보관한다. 이렇게 보관된 자료를 장애인 특히 눈으로 문자를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 요구할 경우 이를 문서인식 소프트웨어로 처리해서 문서파일의 형태로 받아 보게 되는데 보통 자료를 맡긴 후, 1 내지 2주가 소요된다. 막상 수업시간에 필요해서 신청해도 시간을 맞추지 못해 결국에는 수업시간에 활용하지 못하고 부과적인 학습거리로 남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도 재활 법 508조나 ADA에는 위법이 아니다. 또 미국에서 최근에 발행되어 유통되는 대다수의 학술지들은 PDF라는 파일형태로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는데 이 파일형식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이미지 PDF는 말 그대로 글의 내용을 그림형태로 저장한 것이고 텍스트 PDF는 사람이 PDF 파일형식으로 저장할 수 있는 문서편집기로 입력하여 만드는 형태이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의 학술지들이 이미지 PDF로 작성되고 유통되는데 시각장애인이 이러한 형태의 파일을 활용하려면 결국 다시 문서인식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러한 과정은 또 1 내지 2주 정도 별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결국 최대한 장애인의 편의를 지원하기 위한 서비스도 간접적으로나마 차별 혹은 불편으로 장애인들에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휠체어 장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휠체어의 접근을 위한 경사로, 엘리베이터 등은 특정 위치에만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때때로 휠체어 장애인들은 먼 거리를 돌아서 가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학기의 시작과 함께 과제물이 학업계획서에 제시되지만 일부의 과제물들은 정해진 서식에 맞추어 작성해야 하는데 이러한 서식은 제출마감일을 2주 내지 4주를 앞두고 공개한다. 그래서 타이핑이 느린 일부 뇌 병변 장애인들은 시간에 맞춰서 과제물을 내기가 어렵다. 미국의 경우 J-Say라는 보조공학 소프트웨어가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말하는 대로 타이핑은 물론 메뉴의 호출, 선택, 등 다양한 컴퓨터 작업을 말로 지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문서편집기 내에서 말로만 문서를 작성하고 저장할 수 있지만 이것도 언어장애를 수반하고 있는 뇌 병변 장애인들에게는 그림의 떡, 아니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장애인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이나 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모순이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이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해소되겠지만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가 장애인을 도울까!

  장애를 가지고 생활하다 보면 길거리에서나 공공장소에서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필자 역시 이러한 도움을 실제로 많이 받았고 또 이러한 도움이 유학생활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험이 매번 고맙고 좋은 것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도움을 받고도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도움을 받았지만 안 받으니 만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필자의 경험은 미국에서도 이어져 미국 사람들의 여러 가지 모습을 관찰하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길에서 도움을 받은 경험들에 대해 한국과 미국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뭐, 구체적인 통계자료도 아니고 한 사람의 개인적 경험이니 만큼 일반화하기 보다는 재미있는 사례를 접한다는 기분으로 읽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임을 미리 밝혀 둔다.


  한국은 여성이 미국은 남성이 더 도움을 많이 주는 것 같다.

  필자가 남자인 탓으로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기본적으로 미국에서는 여자보다는 남자가 도움을 많이 주었다. 또, 혼자서 길을 걷는 사람이 친구와 함께 길을 걷는 사람보다 도움을 많이 준다. 한국의 경우는 이것의 반대 경향이 좀 있는데 남자보다는 여자가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고 혼자 있는 사람보다는 친구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중에 도움을 주는 경향이 많았던 것 같다. 이번 주를 생각해 보면 오늘이 수요일이고 월요일부터 지금까지 약 서 너 번의 도움을 길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 같은데 여자인 경우는 한 번 뿐이었다. 그리고 남녀 모두 혼자서 길에 서 있거나 길을 걷고 있었다. 도움을 주는 경향도 다른데 한국 사람들은 일단 사람을 붙잡고 보는 경향이 많다. 어디까지 가는지 혹은 어디를 찾는지 물은 뒤 도움이 필요한 내용을 장애인이 말하면 일단 몸의 어디든 붙잡고 본다. 반면에 미국은 목적지까지 동행하더라도 장애인에게 손을 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드물게 있는 일이다. 실제 성희롱에 대한 교육에서 이성간의 가벼운 접촉이라도 접촉을 당하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신체적 접촉을 삼가도록 하고 있으며 재활상담가의 업무편람에서도 전문적 관계 즉, 이용자와 서비스 제공자 사이의 신체접촉을 엄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만나는 동료들 간의 모습만 보아도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들과 실제 미국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많이 다른 것 같다.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이 더 잘 도와준다고 했고 또 일단 붙잡고 본다고 해서 일부 독자들이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 해당하는 분들은 대체로 할머니들이나 거기에 가까워 보이는 아주머니 부대들이라 그리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동조나 순응, 복종이나 저항과 같은 여러 가지 사회심리학적 현상을 연구하기 위한 실험들에서 아직까지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를 조사한 연구가 그리 활발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50대 이상의 여성들이 길에서 만난 장애인 특히 시각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잘 주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사회적 경험이나 비합리적 믿음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즉,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것으로 보답을 받는다.”, “시각장애인들은 남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혹은 “극락왕생, 천국으로 가기 위해 선행해야 한다.”와 같은 것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보다는 나이든 분들에게 더 강하게 각인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 보다 매정하다!

  이렇게 말하니까 미국 사람들은 좀 나쁜 사람들이고 한국 사람들은 정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그것이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니다. 미국 사람들이 길에서 어떤 도움을 주는 경우, 길을 알려 주거나 현재 위치를 설명한 다음에는 거의 자기 갈 길을 간다. 저 장애인이 잘 가는지,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필자의 경우, 도움을 준 뒤에 필자를 보고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기억하기는 지금까지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도움을 준 사람들이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고 필자가 그 앞으로 계속 걷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대체로 확인하지 않는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도움을 주고 나서 잘 가는지 잘 가는지 확인하는 분들이 많다. 그리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는 듯, 뭔가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모습들이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점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장애인의 이동 편의 서비스의 경우 미국은 이동 자체만을 지원하지만 한국은 이동 후 목적지까지의 이동까지 책임진다. 가령, 쇼핑을 목적으로 이동 서비스를 이용할 때, 미국은 마트 앞까지 차만 태워준다. 서비스 표준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마트 내에서의 문제는 거기서 해결해야 한다. 물론 요구하면 마트 직원이 도움을 준다. 한국의 경우는 좀 다른데 대체로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차량이동과 동행하여 장을 봐주는 경우가 많고 마트 측에 요청하면 도움을 안주지는 않겠지만 마트측이 그러한 서비스에 익숙하지 못해서 오히려 장애인이 불편을 경험하기도 한다. 끝까지 책임진다는 뭐 그런 개념이라고 할까.

  앞서 차별에 대해 이야기 하다 갑자기 또 도움을 받는 부분을 이야기해서 독자 여러분들이 당황할지 모르지만 이 두 가지 주제는 상호연관성이 깊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아무리 우수하고 합리적인 제도라고 할지라도 근본적인 문제에서 장애인의 완전한 참여, 완전한 차별 해소는 현재의 입장에서 불가능하다. 의료적 재활모형에서 주장하는 바를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장애 자체의 완전한 회복이 아니고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안이 바로 사회구성원의 지원이고 그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필자가 경험하는 이러한 비정기적이고 자발적이며 개인적인 작은 도움들이다. 물론 이러한 산발적인 도움들이 장애인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 해소, 복지정책들의 내면에는 이러한 개인적 도움들의 특성을 반영한 모습들이 존재한다. 가령, 신체적 접촉을 꺼리고 개인적인 삶을 중요시하는 미국인들은 장애인의 자립/자활을 위해 보조공학적 지원을 먼저 생각하고 2차적으로 활동보조를 계획한다. 아무에게나 무조건 활동보조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보조공학적 지원을 행하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을 활동보조로 메우는 방식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어떤 서비스 하나가 단위목적에 부합하도록 설계된다. 이동 편의 서비스와 같은 예이다. 생활급여를 받는 사람들의 자립/자활을 목적으로 하는 자활후견기관에 대한 부분을 국기법에 포함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어느 나라, 어느 상황에서든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장애인의 태도나 그것에 대한 사회구성원 다수의 인식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저변에는 각 문화나 사회적 특성이 가지는 독특한 모습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로 인해 비슷하거나 같은 목적의 제도들이 국가마다 사회마다 나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차별금지법시대가 열리게 되고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와 더 가까워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은 보다 객관적이고 폭넓은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장애인 각자가 장애인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감시자로서 그것이 억울하게 세상을 살아온 장애인들의 한을 풀어줄 뭔가가 아니라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권리, 가질 수 없었던 기회를 보장하는 작은 출발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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