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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 - 장애는 정치의 기준 이였다. : 전창권 전 고려대학교 교수

역사속 장애인 전창권 전 고려대학교 국민과 초빙 교수



  - 삼국시대 장애인 생활상 -

  삼국시대 장애인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이는 당시만 해도 장애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거나, 역사 기록자들의 장애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삼국시대에 장애인 복지정책이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주로 시설에 격리, 수용하고 있지만, 삼국시대엔 그런 것이 없었고, 보통 가족 부양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자연재해로 심한 기근이 들 때는 나라의 비축 양식을 풀어 그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당시 임금들은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서 자식 없는 사람)과 함께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구제토록 하였다. 다음의 두 예문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니사금 5년조와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16년조의 기록인데,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겨울 11월에 왕이 국내를 순행하다가 어떤 노파가 굶주리고 얼어 금방 죽게 된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하찮은 몸으로 윗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능히 백성들을 양육하지 못하고 늙은이와 어린이로 하여금 이토록 딱한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로다"하고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밥을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에게 명하여 현지에서 위문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어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먹여 살려 주게 하였다. 그러자 이웃나라 백성들이 듣고 오는 자가 많았다. 이 해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해져서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으니, 이것이 노래와 음악의 시작이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을 하다가 길에 앉아서 우는 자를 보고 '어찌하여 우는가?'하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빈궁하여 항상 품을 팔아 어머님을 봉양해왔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 할 곳이 없으므로 한 되, 한 말 곡식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기를

  “슬프다!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로다."

  하고,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무한 다음, 서울과 지방의 해당 관청들에 명령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제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탐문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또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매년 봄 3월부터 7월 사이에 관가 곡식을 내어 백성들의 식구에 따라 차등 있게 꾸어 주었다가 겨울 10월에 까서 상환하는 것을 법규로 삼으니, 경향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여기서 ‘늙고 병들어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에는 장애인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삼국시대엔 환과고독과 함께 장애인도 국가의 우선적 구호대상자였다. 더 나아가 삼국시대엔 장애가 정치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장애아의 출생은 천재지변과 마찬가지로 하늘이 부정한 통치자에게 주는 엄중한 경고요, 어떤 사건의 예견이나 징후로 보았다. 그래서 특별히 기록으로 남기고, 왕들은 근신(勤愼)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7년 조를 보면, ‘가을 7월에 서울의 여자가 몸은 하나요, 머리가 둘인 아이를 낳았다'라고 샴 쌍둥이(Siamese twins: 신체의 일부가 결합되어 있는 쌍둥이)의 출생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심지어 삼국시대엔 기이한 형상의 사람에 대해 일종의 ‘외경심'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예컨대 고구려 유리왕 24년 가을 9월에 왕이 기산의 뜰에서 사냥하다가 이상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양쪽 겨드랑이 아래에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이에 왕은 그를 조정으로 불러 들여 ‘우씨'란 성을 주고 자기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삼국시대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 시기 장애인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주로 시각장애인의 생활상에 대해서만 남아 있고, 그중에서도 일반 하층민의 모습만 남아 있다.

  우선 당시 하층계급의 시각장애인은 집안에서 가족들의 부양을 받으며 살았던 듯하다. 예컨대 <삼국유사> 선행(善行) ‘빈녀양모(貧女養母)'조를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효종 화랑이 남산의 포석정에 나가 노는데, 모든 문객들이 빨리 달려와 모였으나, 유독 두 사람이 늦게 왔다.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가 말하였다.

  "분황사 동쪽 마을에서 나이 20살 무렵의 여자가 눈 먼 어머니를 껴안고 소리쳐 울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이 여자의 집이 가난하여 몇 해를 두고 구걸을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더니, 마침 흉년이 들어 문전걸식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부잣집에 품값으로 몸을 잡히고 곡식 30섬을 얻어 그 집에 맡겨두고 일을 하면서, 해가 저물면 쌀을 전대에 넣어가지고 집으로 와서 밥을 지어 어머니께 공궤하고, 새벽이면 다시 부잣집에 가서 일하기를 며칠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전에는 쌀겨라도 마음이 편하더니, 요즘 이 밥은 가슴과 간을 찌르는 듯 마음이 불편하니 과연 무슨 까닭일꼬?'라고 하여, 딸이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통곡하고 딸은 다만 자기가 구복(口腹)을 봉양할 줄만 알았지 부모의 마음은 살필 줄 몰랐다고 한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마주 붙들고 울기에 그것을 보느라고 지체가 되었습니다."

  효종랑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지으면서 곡식 1백석을 보내고, 효종랑의 양친도 역시 바지와 저고리 한 벌을 보내주었으며, 효종랑의 수많은 무리도 벼 1천석을 거두어 보냈다. 이 일이 국왕께 알려지자, 당시의 진성왕이 곡식 5백석과 집 한 채를 주고, 군사들을 보내어 그 집을 호위하여 도둑을 막게 하였다.

  동리에는 정문(旌門)을 세워 효양(孝養) 마을이라고 했으며, 뒤에는 그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고 이름을 양존사(兩尊寺)라 하였다.


  이처럼 당시 하층계급의 시각장애인은 주로 집안에서 가족들의 부양을 받으며 살아갔다. 그리고 만약 그 장애가족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웃의 마을공동체와 나라의 공공기관에서 구호해주었다.

  이러한 가족부양의 모습은 그 유명한 온달과 도미의 이야기에서도 발견된다. 먼저 <삼국사기> 열전 '온달'조를 보면, 온달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서 시각장애인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다. 그럼에도 온달의 어머니는 사리분별이 뛰어나서, 평강공주가 불쑥 찾아와 온달과 함께 살겠다고 하자, '내 아들은 가난하고 누추하여 귀인이 가까이할만한 사람이 못된다. 이제 그대의 냄새를 맡으매 꽃다운 향기가 보통이 아니며 그대의 손을 만지매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이거늘, 누구의 허튼 수작을 듣고 여기까지 왔는가?'라든가, '내 자식은 지지리 못나서 귀인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해서 아예 귀인이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물리친다.

  또 <삼국사기> 열전 '도미'조를 보면, 도미가 개루왕에 의해 두 눈이 뽑히고 시각장애인이 되자, 그 처가 데리고 고구려로 도망가서 함께 산다. 다행히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옷과 밥을 모아 준다.

  끝으로 삼국시대 시각장애인도 개안(開眼)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선천성 시각장애인보다 도중에 갑자기 시력을 잃은 후천성 시각장애인일수록 더욱 그러하였다. 예컨대 <삼국유사> 탑상(塔像) '맹아득안(盲兒得眼)'조를 보면, 한 시각장애 아동이 어머니의 뜻에 따라 관음보살께 나아가 노래를 지어 부른 뒤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시대 민속화
 

경덕왕 때에 한기리 여자 희명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었는데, 하루는 희명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로 가서 왼편 전각 북쪽 벽에 그린 천수대비(관음보살) 앞에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드디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노래는 대강 이러하였다.

  무릎을 꿇고 두 손바닥을 모아 괴어서
  천수관음 전에 축원의 말씀을 올리나이다.
  일천 개 손으로 일천 개 눈에서 하나를 내놓아 덜어서
  두 눈이 다 먼 내게 하나나마 주어 고칠레라.
  아야아
  네게 끼치어 준다면 내놓아도 자비심 뿌리로 되오리.


  이상과 같이 삼국시대에도 엄연히 장애인 복지정책이 존재했으며, 특히 장애를 정치의 기준으로 여기는 특이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당시 장애인은 주로 집안에서 가족들의 부양을 받으며 살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사회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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