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단 메뉴 바로가기
  2. 본문 바로가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야기 프리즘
HOME > Webzine 프리즘 > Webzine 프리즘
본문 시작

webzine 프리즘

프리즘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분기마다 발간하는 웹진입니다

지난호바로가기 이동

시선과 소통

 복지국가의 복권

복지국가의 복권(復權) 강동호 (『신진보리포트』편집주간 )



  1. 시장근본주의의 위축

  이번 미국 발 금융위기로 세계경제가 격심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이를 두고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파산이다 아니다 하면서 논란도 분분합니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지금의 세계경제가 어떤 역사적 전환점을 통과하고 있는지는 사실 아무도 예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향후 금융시스템에 대한 규제를 중심으로 정부와 시장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될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곧 현재의 경제위기와 혼란을 타개하는 기본적인 방향이 국가기능의 강화와 시장에 대한 일정한 규제로 모아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미국에서는 이번 위기가 공적 건강보험의 대대적 도입이나 공교육 투자 확대 등 사회보장제도의 강화로 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합니다. 심지어 벼락 오바마 후보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되면, 지난 1930년대 루즈벨트 대통령이 추진했던 뉴딜(New Deal)정책에 버금가는 새로운 뉴딜정책이 추진될 것이라는 얘기까지 들려옵니다.

  어쨌거나 이제 ‘규제완화와 작은 정부’를 핵심으로 하는 시장근본주의(소위 ‘신자유주의’) 모델과 미국 주도의 세계화 흐름이 다소 위축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시장근본주의는 1970년대 후반 이후 ‘복지국가’를 맹비난하면서 등장해 지금까지 근 30여 년 동안 세계화 흐름을 주름잡아 왔습니다. 그 사이 거대자본의 힘과 활동이 커진 만큼 빈곤과 불평등의 골 역시 깊어졌지요.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시장경쟁의 절대화와 세계화는 극히 소수의 부자들에게만 큰 혜택을 주는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더 많은 사람을 빈곤에 빠뜨리고 다수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는 한 사회에서 시장근본주의적 정책이 강화되면 될수록 그만큼 사회적 불안정을 잡도리하기 위한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시장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복지비용도 그만큼 커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장근본주의, 세계화의 역설입니다. 부의 재분배를 위한 국가 개입을 최대한 차단하고 시장경쟁과 자유무역을 거칠 것 없이 전개하면 결국 다수의 풍요를 가져올 것이라는 시장근본주의의 믿음은 환상이자 어떤 면에서는 무서운 거짓이었습니다.

  그러면 시장근본주의가 퇴조하면서 이제 그동안 한물 간 것처럼 여겨졌던 복지국가가 다시 무대의 주연으로 재등장하게 될까요? 그렇잖아도 지금 복지국가의 부활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지국가가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쉽게 복권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큰 정부, 노동과 자본 간의 대타협, 누진세제의 강화와 공공지출의 증대 등을 골자로 하는 복지국가의 옛 모델이 작은 정부, 감세와 공공지출의 축소, 기업규제 완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을 골자로 하는 시장근본주의 모델을 대체한다는 것은 너무 섣부른 생각입니다.


  2. 복지국가의 위기와 재편

  근대적 의미의 복지국가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흔히 1942년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표방한 영국의 비버리지 보고서(Beverage Report)를 그 시발점으로 봅니다. 그 후 30년간 지속된 세계경제 호황기에 복지국가는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국가(warfare state)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성립된 ‘복지국가(welfare state)’란 말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냉혹함을 완화하는 사회보장제도를 지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엘리트의 지배를 통제하고 시민의 참여와 연대를 보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상징합니다. 한마디로 복지국가란 시장경제체제의 ‘보이지 않는’ 실패를 사회경제영역으로 확장된 민주주의 정치를 통해 교정하려는 정치경제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를 두고 케인즈주의, 비버리지주의, 그리고 테일러주의를 핵으로 하는 포드주의의 혼합물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곧 ①총수요관리정책 등 정부개입을 통해 ‘완전고용’을 실현하려는 케인즈주의 ②모든 국민에게 ‘사회보장’을 통해 ‘국민최저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비버리지주의 ③대량생산·대량소비·테일러주의적 노동편성방식, 그리고 중앙교섭에 의한 노사타협체제를 내용으로 하는 포드주의적 임노동관계의 ‘제도화된 타협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각 나라별로 복지국가의 형식과 실질은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지국가 연구에서 최고봉이랄 수 있는 에스핑 앤더슨(Esping-Andersen)은 ①노동자가 시장규칙에 따른 노동력의 상품화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정도(‘탈상품화) ②복지혜택이 사회계층구조를 변화시키는 정도(‘사회재계층화’) 등의 지표를 통해 서구의 복지국가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했습니다. 첫째, 탈상품화가 많이 진행되어 계층 구분이 완화된 사회민주주의 모델 (북유럽 국가들), 둘째, 탈상품화가 미진하여 계층구조에서 양극화를 보이고 있는 자유주의 모델(미국, 영국, 캐나다 등), 셋째, 탈상품화는 어느 정도 진행됐으나 사회보장프로그램이 계층 구분을 반영하고 있는 조합주의 모델(독일, 프랑스 등)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복지국가 유형 분석도 물론 중요하지만, 복지국가 그 자체가 현대의 보편적인 정치경제체제임을 밝힌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이 에스핑 앤더슨의 유형론을 놓고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이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에 관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요(한국 복지국가 성격 논쟁).

  딱딱한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아무튼 보편적인 사회발전모델로서의 복지국가는 20세기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는 찬사가 나올 정도로 인류 역사에 새 장을 열었습니다.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복지국가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가가 전체 시민의 삶을 위한 사회적 배려를 제도화한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봉착함에 따라 복지국가도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저성장시대에 접어들어 과도한 복지지출이 재정적자를 확대시켜 국민경제에 막대한 부담으로 작용했던 거죠. 이 즈음해서 복지국가의 생산성 지체, 정부의 실패, 도덕적 해이 등을 거론하며 복지국가의 실패를 주장하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하게 됩니다. 나아가 1990년대 이후 세계화의 급진전은 복지국가에 새로운 충격을 줬습니다. 자본의 세계화에 따른 시장경쟁의 격화로 복지국가의 사회정책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런 과정에서 대다수의 복지국가들은 이제 ‘복지국가의 개혁’에 고심하게 됩니다. 기실 복지국가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오일쇼크나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공격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지국가는 제조업으로부터 서비스산업으로의 산업구조 변화, 이에 따른 생산성 향상의 둔화, 과도한 복지지출에 따른 복지재정의 한계상황, 인구의 고령화와 가족구조의 변화 등 내적 조건·상황의 변동에 따라 새롭게 적응하고 혁신돼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지국가의 위기는 환경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적응 과정에서 나타난 진통이라고 봐야 합니다. 앞서 시장근본주의 사조가 한 풀 꺾였다고 해서 전성기 때의 복지국가 모델이 다시 부활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입니다. 복지국가는 지속적으로 창조되고 개선돼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지국가가 시장의 작동을 방해하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장애가 된다는 ‘복지국가 실패론’은 어디까지나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지국가는 시장경제의 발전을 가로막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경험적으로 증명된 적은 없으니까요. 북유럽 나라들을 비롯한 서구의 많은 복지국가들은 전혀 쇠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경변화에 맞게 새로운 적응을 위한 노력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북유럽, 곧 사회민주적 복지국가 모델은 여전히 건재하며 환경변화에 높은 적응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복지국가론’ 자체는 그동안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세계화 논리에 기세가 눌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던 거죠.


  3. 한국형 복지국가와 사회투자국가

  서구 근대국가들이 입헌국가→의회민주국가→복지국가로 발전해 나갔듯이, 우리나라도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고령화·지식기반사회화·세계화 등 환경 변화에 맞는, 또 우리의 조건과 상황에 맞는 한국형 복지국가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만들 것이냐 하는 겁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지금 세계적 금융위기와 겹쳐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적·사회적 위기, 민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모색과 직결됩니다.

  한국형 복지국가의 모색과 관련해서 지난 참여정부 때 유행했던 ‘사회투자국가론’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내자면, 사회투자국가는 영국형일런지는 몰라도 한국형 복지국가는 아니라는 겁니다.

  사회투자국가론은 영국의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1998년 사회민주주의의 쇄신책으로 ‘제3의 길’을 주창하면서 전통적 복지국가의 대체모델로 제시한 개념입니다. 기든스의 사회투자국가론은 세금을 거둬 소득재분배를 위해 지출하는(‘과세와 지출’) 전통적 복지국가를 낡은 것으로 비판하고 대신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에의 투자, 복지와 경제성장의 결합을 강조하죠. 쉽게 말하면 세금으로 거둬들인 돈을 소득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보다는 아동이나 여성 등의 교육·훈련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지식기반사회에 맞게 지식노동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육·훈련에 대한 집중투자를 강조하는 사회투자정책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소득보장을 위한 지출을 낡은 정책으로 깔아뭉개는 것은 틀렸습니다. 소득보장을 위한 지출이 다 세금을 그냥 까먹는 것은 결코 아니죠. 그 역시 하나의 사회투자이고 성장의 잠재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적정 규모의 소득보장지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서민의 삶이 최소한이나마 안정될 수 있고 이런 민생안정이 보장돼야만 새로운 발전을 위한 창조력을 고양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소득보장지출과 교육·훈련에 대한 투자는 적절히 병행돼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런데 사회투자정책은 기든스가 완전히 새롭게 고안한 정책이 아닙니다. 기존의 복지국가, 특히 북유럽 복지국가에서는 적극적 사회정책(active social policy)으로 이미 실행한 것이죠. 그래서 에스핑-앤더슨은 기든스의 사회투자국가가 북유럽 복지국가에 대한 “매우 뒤늦은” 영국인의 발견에 불과하다고 비꼰 바 있죠.

  셋째, 워크페어(workfare), 시장주의적 경제정책의 우선성, 엄격한 조사프로그램에 따른 공적부조 등 사회투자국가론의 다른 요소들은 명백히 탈복지국가론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계화·양극화·고령화의 새로운 위험들에 대한 극복은커녕 새로운 위험들을 방치하거나 조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 집니다.

  넷째, 한국의 사회투자국가론은 기든스의 사회투자국가론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중도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정치인들이 사회투자국가론을 거론했는데, 그들의 논의는 저마다 다르지만 공통된 것은 전통적 복지국가는 낡은 것이고 사회투자국가는 새로운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죠. 한국의 사회투자국가론이 복지를 사회적 권리로 바라보지 않고 보편적 복지서비스를 정부 차원의 과소비로 인식하면서 반복지담론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특수한 복지국가를 창조적으로 모색한다고 해서 그것이 복지국가의 원형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서는 곤란합니다. 한마디로 앙꼬 없는 찐빵을 찐빵으로 부를 수는 없다는 겁니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사회투자국가 흉내 내기도 쉽진 않겠지요. 하지만 어렵더라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로의 발전이 매우 더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의 힘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서구의 전통적 복지국가들은 대체로 노동의 정치적 힘이 강할 때 이뤄졌습니다. 전통적 복지국가는 기본적으로 노사간 대타협에 기초한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로의 발전은 너무나 요원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서구의 복지정치는 기본적으로 계급정치였지만, 우리나라의 복지정치는 그와는 다른 성격을 띠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노동계급보다 더 다원적이고 더 포괄적인 시민연합 같은 것을 설정해 볼 수도 있겠죠.

  한국형 복지국가의 모색은 한편에서는 매우 복잡한 일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매우 분명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나라에 특수하고도 매우 절박한 문제, 곧 교육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과 대안을 만들기만 해도 한국형 복지국가를 절반 이상 실현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죠. 이 두 문제만 해결돼도 우리 국민의 삶의 질과 우리 사회의 미래가 완전히 달라질 테니까요.


  4. 복지국가의 복권?

  세계 도처에서 새로운 뉴딜이니 규제 자본주의니 새로운 브레튼우즈체제니 하며 작금의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감세, 복지예산 삭감, 민영화, 규제완화, 노동부문 억압 등 시장근본주의의 교리에 한사코 매달려 있습니다. 참으로 시계를 거꾸로 보면서 착각에 빠져 있는 꼴입니다. 이렇게 가면 우리나라가 7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70대 후진국으로 도태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민생이 파탄 지경에 이르면 아무리 강한 국가도 맥을 못 추기 마련입니다. 소수 엘리트가 아무리 잘 나가도 다수의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그 사회는 결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지국가를 되새겨 본 이유입니다. 이것이 지금 세계경제의 혹독한 위기를 맞아 우리가 복권시켜야 할 복지국가의 의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복지국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가가 전체 시민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제도화한 체제입니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사회적 시민권 사상에 입각한 최초의 국가체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복지국가는 당연히, 완전무결한 이상적 국가가 결코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에 따라 끊임없이 창조되고 개선되지 않으면 쇠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민이 복지에 대한 권리를 보편적으로 향유해야 한다는 복지국가사상은 우리가 다시금 밝혀야 하는 등불입니다.

  끝으로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윤대의 초’(輪臺의 詔)와 염철(鹽鐵)논쟁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을까 합니다(김한규, 2005, 『천하국가』, pp.103-110.)

  한(漢)의 제7대 황제로서 漢을 명실상부한 제국(empire)으로 확립시킨 무제(武帝)는 수많은 정벌을 통해 漢 중심의 천하(天下)질서를 확립했지만, 그 말기에 심각한 사회적 위기, 민생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후대의 어느 학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무제가 영토를 수천 리 열고 넓혀 스스로 공을 크게 세우고 위세를 떨쳐 마침내 원하는 바를 이뤘지만, 재정이 부족해져 일체의 제도를 바꾸어 범법자들이 재산을 바치면 죄를 면하게 해주고 곡물을 정부에 내면 관리를 시켜주었다. 이로 인해 온 천하가 사치에 빠져, 관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백성은 가난해져서, 도적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망명하는 자들이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이에 무제는 정벌에 집착했던 과거를 후회하며, 조칙(輪臺의 詔)을 내려 “지금 힘써야 할 일은 가혹하고 포학한 정치를 금하고, 농업의 진작에 힘쓰고, 마복령(馬復令)을 다시 실시해서 부족한 말의 수를 보충하여 무비(武備)가 결핍되지 않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무제가 정벌 비용을 마련하느라 화폐를 남발하고 소금, 철, 술(鹽鐵酒) 등 주요 산업을 장악하는 등 계속 민생을 외면했다가 결국 말기에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빠져서 후회했다는 겁니다.

  그 후 소제(昭帝) 시기에 열린 ‘염철회의’는 이러한 ‘윤대의 정신’을 계승해 무제 시대를 재평가하고 국정의 틀을 새로 짜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지요. 정부 당국자들과 당대의 지식인들 60여명이 모인 이 회의에서 염철 전매의 타당성을 비롯해 국정 전반의 현안에 관해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염철주(鹽鐵酒) 전매를 철폐하자는 쪽과 유지해야 한다는 쪽 간에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고 나아가 유가와 법가 등 사이의 사상투쟁도 전개됐다고 합니다. 물론 이 염철논쟁의 이면에는 정치적 권력게임도 작동하고 있었지요. 논쟁의 결과는 교묘한 타협과 절충으로 나타났지만, 염철논쟁은 당대의 시대적 고민과 국가사상을 치열하게 반영한 역사적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2세기 때의 일이지만, ‘윤대의 초’는 아무리 강성한 국가라도 민생안정을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곧바로 위기에 처하고 만다는 점을 역력히 보여줍니다. 또 ‘염철논쟁’은 논의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어쨌든 오늘날의 시장주의-복지국가 논쟁과 비견될 만합니다.

  요컨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무엇보다 민생을 안정시키고 시민의 사회적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처럼 소수의 부자·엘리트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정책으로 국민을 90과 10으로 쪼개버리는 행태(소위 ‘二國民전략’)는 국가와 사회를 결국 치유할 수 없는 병에 찌들게 할 것입니다.




프린트하기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