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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소통

인문학과 장애


아카데미와 장애인주윤정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8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서 열린 <장애와 역사>란 학회에 참가해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 학회는 미국과 영국의 장애 역사(Disability History)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모인 학회로, 장애를 역사적 주제로 본격적으로 다루는 학회였다. 그래서 참석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사회복지나 특수교육, 재활 등의 전문가들보다는 역사학, 사회학 등에서 장애를 사회적 범주이자 개념으로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SFSU)에는 폴 롱모어라는 미국의 장애역사학자이자 장애인권운동가가 역사학과 교수이자, 장애 연구소 소장으로 계셨고, 이분이 주축이 되어 학회가 개최되었다. 폴 롱모어 교수는 어린시절 소아마비로 인해 현재 중증장애를 갖고 있었고, 입에 호스를 달고 생활하고 있었다. 학회 첫날, 이 대학의 총장은 축사를 하면서 SFSU는 어떤 사람도 자신의 장애로 인해 자신의 잠재성을 발휘 못하는 일이 없도록, 대학에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대학의 이념이 사회적 공평성에 있다고 밝혔다.

 학회에는 장애인 연구자와 비장애인 연구자 들이 섞여 있었다. 장애인 연구자 중에는 영국에서 온 뇌병변장애인으로 보이는 인도계 여자 연구자도 있었고, 시각장애인이며 캘리포니아 주립대, 데이비스 캠퍼스의 역사학과 교수인 캐서린 쿠드릭, 시각장애인이며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의 영문과 교수 조지아 킬린, <기괴한 몸들(Extraordinary Bodies)>의 저자 로즈마리 갤런드 톰슨도 만날 수 있었다. 로즈마리 갤런드 톰슨은 선천적으로 팔이 짧게 태어난 여성학, 문학 연구자로 ‘기괴한 몸들, 비정상적인 몸’에 대한 탁월한 연구를 하며 현재 에모리 대학의 여성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외에도 대학원에 재학 중인 여러 장애인 연구자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인도계 영국인 여성연구자와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었는데, 인도계 악센트가 섞인 뇌병변장애인의 발음은 비영어권 출신의 사람이 알아듣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그녀도 나의 한국식 영어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의 상황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한국의 학계와 장애 연구에 대해 질문했고, 우리는 최대한의 공통점을 발견하려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편 한국의 시각장애인에 대한 나의 발표가 끝난 후 어떤 젊은 백인 여성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여성이 나에게 자신의 눈을 쳐다보고 말할 것을 요청하며, 자신은 청각장애인이고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은 귀가 전혀 들리지 않지만, 구화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말하는 영어를 입모양을 보고 읽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리는 장애-외국어라는 이중의 장벽을 넘어 장애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소통의 그 순간, 이분들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몇 중의 소수자성, 다시 말해 여성, 뇌병변장애, 청각장애, 인종적 소수자성(유색인종) 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고등교육을 받고 학문적 커리어를 추구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몇 년 전 한국의 한 장애 여성이 박사과정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자 했었다. 춘천의 어느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쳤고, 그래서 당연히 동일 대학에 박사과정에 응시했지만, “박사논문을 작성하려면 본인이 찾아다니며 자료를 발굴해야 할 텐데 그것이 (자네의 몸 상태로는)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데 의견을 모았네. 많은 논의 끝에 불합격으로 판정하였네”라는 답변을 듣고 박사과정 시험에서 불합격판정을 받았으며 그 이후 인권위에 제소를 했던 사건이 있었다.

 현재 장애인들의 대학진학률은 분명히 증가하고 있으며, 대학원 등 고등교육의 진학자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소위 순수학문 문학, 역사학, 철학, 사회학 등의 학문분야의 전문적인 연구자는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장애인을 위한 직업과 재활 관련에서 여러 전문가가 늘어나고,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등의 분야에 종사하는 장애인들의 수는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학문, 예술 등의 소위 실용이 아닌 순수한 분야에서의 장애인 연구자·전문가는 드물다. 특수교육의 분야에서는 주로 실용적인 기능을 갖춘 직업인 양성에는 애를 쓰고 있지만, 소외 말해 ‘돈안되는’ 순수학문 분야로의 진출은 아직도 요원하다.

 맹학교를 나온 한 지인은, 학창 시절 장래희망을 시인이라 적었다가 담임선생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해야지 그런 허황한 꿈을 꾸면 안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는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허황한 꿈, 원하는 삶을 살수 있는 것 중요하지 않을까?

 한국의 장애 복지수준에서는 이런 학문 분야에 종사하는 것은 일종의 허황된 사치일지 모른다. 더욱이 학문의 영역에서는 비장애인들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학임용이 안되어 자살을 하는 시간강사들의 문제가 종종 신문 기사화되고 있으며, 또한 최저생계비로 살아가는 어려움도 많이 있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중, 다른 사람들에게 학문을 순순히 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학문영역의 물질적 생활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실용적 가치와 경제적 성취만이 절대가치인양 여겨지는 사회 속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나름의 긍지와 자존감으로 살고 있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확장시킨다는 것, 자신만의 학문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 남들이 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한다는 것, 진리의 탐구 등 다양한 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물질적 풍요가 아닌 정신적 풍요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누스바움이란 미국의 철학자는 인간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 잠재성(capability) 들을 개발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잠재성 항목이 여럿이 있는데, 그 중 문화/예술/학문과 관련된 것으로는 “감각, 상상력, 사고”의 항목이 있다. “감각하고, 상상하고, 사고하고, 추론할 수 있는 것, 이를 진정으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것. 단순히 기초적인 문자 해독력과 연산기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의 정보를 취하며 교양을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상력과 사고를 통해, 자신의 선택으로 문학적, 음악적, 종교적 작품과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마음에 근거하고, 표현의 자유에 근거해 자신의 예술적, 정치적, 종교적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불필요한 고통은 피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UN 장애인 권리 규약에는 문화 향유권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는 물론이고, 창작권과 장애인 정체성에 대한 존중이 명문화 되어 있다. “국가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창의적이고 예술적이고, 지적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하는데, 이것은 그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다.”

 학문의 영역, 아카데미 속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정신적/지적 자유를 향유하고 지적 저작의 창조자가 되어 인간의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애인들도 소위 먹고 살기 힘든 학문 영역에 진출해, 자신들의 다른 삶의 경험과 성찰이 사회적인 언어로 전환되고 이로 인해 인간의 삶의 방식과 존재에 대한 다양한 상상과 사유가 도출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들의 상당히 불안한 삶에 대한 기본적 보장, 제도의 정비는 물론, 다름을 허용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적 상상력 역시 필요할 것이다.

 장애인들의 문화적 삶과 지적인 삶의 참여와 창의적 활동은 장애인들의 ‘복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에 다양한 목소리가 들리고 다원성이 확보되어 성숙한 사회로 발전되기 위한 밑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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