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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장애인


세종대왕이 총애한 시각장애인 점복가정창권 (전 고려대학교 국문과 초빙교수)


옛날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전통시대 장애인 중에는 시각장애인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던 듯하다. 의약이 발달하지 못하여, 적잖은 사람들이 안질(眼疾)로 인해 시각장애를 입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세종대왕도 안질을 겪은 뒤 오늘날로 치면 4~5급 정도의 시각장애를 갖고 있었다.
한데 고려나 조선 정부는 이들 시각장애인을 대표적인 자립(自立) 가능한 사람으로 분류하여, 갖가지 직업을 갖고 스스로 먹고 살도록 유도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점복이나 독경(讀經), 관현악(管絃樂), 구걸 같은 다양한 직업을 갖고 생계를 꾸려가는 한편, 폭넓은 사회활동을 펼쳤다. 때문에 여타 장애인에 비해 이들 시각장애인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옛날 시각장애인은 그중에서도 점복업에 주로 종사했다. 당시 사람들은 실명하면 곧 점복을 배워 훗날의 생계를 도모했던 듯하다. 게다가 점복이 천시되기 이전인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층도 그러하였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며, 대개 그들은 오늘날과 달리 산통과 점대를 휴대하고 지팡이를 짚고 길거리에 다니면서 "신수들 보시오(問數)!"라고 외쳤는데, 그 소리가 마치 노래 소리와 같아서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도 그들이 지나가는 걸 알았다고 한다.

 (판소리 <춘향가>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옥중에 갇힌 춘향이가, 하루는 이상한 꿈을 꾸고 밤새도록 앉아서 탄식하는데, 때마침 시각장애인 점복가가 "문수, 문수!"하면서 지나간다. 이에 춘향이가 옥쇄장이에게 부탁하여 그를 감옥으로 불러들여 꿈 해몽을 부탁한다. 그는 '감옥에서 고생하는 터에 복채 달라는 소리가 미안하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귀신이 감동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선 복채를 달라고 한다. 이에 춘향이가 품속에서 돈 한냥을 내어 준다. 그제야 시각장애인 점복가는 꿈 해몽을 하기 시작하는데, '머잖아 이몽룡이 찾아와 구해줄 것이다'라고 말해준다. 얼마 되지 않아 그 해몽은 과연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전통시대 사람들의 점복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였다. 우선 조선 초기만 해도 국왕이나 사대부조차 점복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도읍을 정하거나 왕릉을 정할 때, 그리고 왕비를 정할 때에도 시각장애인 점복가에게 물어서 했다.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병이 나면 먼저 점복가를 불러 그 길흉을 점쳤고, 유명한 점복가를 만나면 집안으로 불러들여 식구들의 운명을 점쳐보기도 했다. 또 과거를 보러 가기 전에 미리 그 급제 여부를 물어보거나, 자신의 운명이 언제 바뀔지도 물어보곤 하였다.

세종대왕이 총애한 시각장애인 점복가

 심지어 세종대왕도 지화라는 시각장애인 점복가를 늘 가까이 두고 있었다.
원래 지화(池和)는 판수, 곧 점치는 사람이었는데, 길흉을 잘 점치는 것으로 소문이 나서 태종 때부터 궁중에 출입하였다. 특히 그는 양반가를 돌아다니며 궁주의 배필이 될 남자의 팔자(八字)를 조사하는 등 왕실의 간택 작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태종 17년(1417) 9월, 왕이 혼인 문제로 이속(李續)이란 신하를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처음에 지화가 이속의 집에 가서 그 아들의 팔자를 물으니, 이속이 매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무슨 까닭으로 묻는데?"
지화가 말했다.
"왕명(王命)을 받은 것이오."
"길례(吉禮)가 이미 끝났는데, 또 궁주가 있단 말인가? 나는 왕실과 혼인하고 싶지 않다."
지화가 이 말을 그대로 아뢰니, 임금이 화가 나서 말했다.
"이속이 본래 바르지 못하다. 나도 그 집안과 혼인하고 싶지 않다. 허나 이속의 말이 심히 불공하다."
그러고는 이속을 옥에 가둬버렸다.
사관의 평에 의하면, 당시 이속은 위인이 거만하고 포악하여 남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세종대에도 지화는 국가의 점치는 일과 혼인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종 16년(1434) 12월 임금이 신생(信生)이란 이와 함께 지화에게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여 신하들에게 물었다.

"맹인 지화와 신생이 점복을 잘하여 큰 공로가 있으니, 특별히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그러자 좌의정 맹사성이 아뢰었다.
"전조(前朝: 고려)에 검교(檢校)란 벼슬을 두어 맹인 점복가에게 제수했는데, 지금은 이미 혁파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실직(實職)을 제수하여 일을 그르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공이 있다면 쌀만을 주는 것이 옳은 듯하옵니다."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니 내가 다시 생각해보겠노라."
며칠 뒤 세종은 그들에게 우선 쌀과 콩 10석씩을 각각 하사한다.
그 뒤로 지화 등이 다시 벼슬을 받고자 상언(上言)하니, 세종이 신하들과 의논한다.
"지난해 점치는 맹인들이 상언하므로, 내시검직(內侍檢職)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녹봉을 받게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대신들이 '내시는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인데, 만약 맹인으로 하여금 내시를 삼는다면 이름과 실상이 서로 어긋나게 된다.'라고 반대하였다. 대저 풍수의 학과 점치는 법은 내가 믿지 않는 바이지만, 오랫동안 세상에 시행되어 왔고, 풍수의 무리들은 지금도 이미 서용하고 있으니, 홀로 점치는 사람만 폐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음양과는 『육전』에도 기재되어 있으니 장애가 있다고 해서 서용하지 않을 순 없는 것이다."
이에 영의정 황희가 아뢰었다.
"고려 말에 점치는 맹인을 자섬부사(資贍副使)로 삼기도 하고, 또 강안전의 시위호군(侍衛護軍)으로 삼기도 했으니, 옛날에도 이런 예가 있었으므로 마땅히 관직을 제수해야 할 것이옵니다. 단 우리 조정에서는 검교란 직책이 없는데 내시부에만 그것이 있으니, 마땅히 내시검직을 주어 사옹원(司饔院) 사직의 일을 행하게 하고, 그 계급은 정4품으로 한정하는 것이 옳겠사옵니다."
한데 사간원 정언 이맹전이 아뢰기를,
"신 등이 생각하건대, 옛날 당나라 태종이 방현령에게 이르기를, '악공과 잡류는 비록 기술이 뛰어나더라도 다만 전백(錢帛)을 특별히 내려 주어 상을 주면 될 것이지, 꼭 등급을 뛰어넘어 관직을 주어서 조정의 현인, 군자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리를 같이 하여 먹게 해서, 사대부들의 수치가 되게 하지 말라.'고 했사옵니다. 지금 지화 등은 비록 관직을 주었지만은 어찌 그 사무를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또 사모와 품대의 차림으로 조정의 길에 다니면서 조관들과 나란히 서게 하니 진실로 불편한 일입니다. 원컨대 그 관직을 파면하고, 다만 월료(月料)를 주어서 그 공을 상주게 하소서."
이에 세종이 정중하게 대답한다.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다. 하지만 점을 치는 맹인인 판수에게 관직을 주는 것은 지금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제 지화 등은 모두 국가의 점치는 일과 혼인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어찌 그 공이 없겠는가. 비록 사옹원의 관직을 제수하더라도 의리에 크게 해로움은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세종은 지화에게 '중훈검교첨지내시부사(中訓檢校僉知內侍府使)'란 벼슬을 제수하고 사옹원 사직의 일을 맡아보게 한다.
하지만 이후 지화는 임금에게 불경죄를 저질러 귀양을 가게 된다. 세종 26년(1444) 12월 임금이 점을 칠 일이 있어 사람을 보내 지화를 부르는데, 그가 술이 몹시 취해 횡설수설한다. 게다가 이런 말까지 한다.
"오늘은 술이 취해 점칠 수가 없다!"
심부름꾼이 이 말을 그대로 아뢰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말한다.
"지화가 음흉하고 간교하기 짝이 없는데, 다만 운명을 좀 안다고 태종 때부터 은혜를 입어 벼슬까지 제수 받았다. 그럼에도 지금 제가 이렇게 불경하다니…."
그리고는 진도로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회령부로 귀양보낸다.
또한 지화는 단종 때에는 반란 모의에 연루되어 처형될 뿐만 아니라, 그 집과 아내마저 관아에 몰수되고 만다. 단종 1년(1453) 이용(李瑢)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점을 치니, 지화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가 임금이 될 운명이 있다!"


 이에 이용이 반란을 일으킬 뜻이 더욱 굳어졌으므로, 나중에 지화도 함께 잡혀가 처형당하게 된 것이다. 또 임금은 그 집을 수산(壽山)이란 이에게 내려주고, 아내 막금을 파평군 윤암에게 주어버린다. 이로써 지화의 화려한 인생사도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만다.
이처럼 조선 초기만 해도 임금들은 시각장애인 점복가를 늘 곁에 두고, 그 길흉을 물어 일을 꾀하곤 하였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그들은 미래를 예견하는 최고의 과학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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