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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칼럼

주식회사, 장애인복지 그리고 자기기만


주식회사, 장애인복지 그리고 자기기만박경신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근대 최고의 발명품으로 주식회사라는 제도를 꼽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식회사는 자본의 축적을 일으켜 그전에는 불가능했던 규모의 생산활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시골의 한 농부가 가진 쌈짓돈도 지구 반대쪽의 두바이의 세계최고층 건물을 건설하는데 이용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자본의 집중을 가능케 한 것은 주식회사라는 구조의 덕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식회사제도에는 인간중심사회를 구조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주식회사제도는 주식회사가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할 의무를 법제화하였다. 즉 회사경영진에게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fiduciary duty)’를 부과하였는데 그 의무의 내용은 회사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 되고 보통 이것은 이윤을 극대화할 의무로 풀이되고 결국 주주전체의 이익과 등치된다. 주식회사제도의 핵심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여 다수가 소유한 자본을 통일적으로 운용하도록 하는 것이고 그러한 경영권 집중하에서도 주주들이 편하게 투자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하여 이런 의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주들의 최선의 이익이란 무엇인가? 회사가 최고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인건비를 낮추는 것인데 과연 주주들은 자신이 투자한 회사가 제3세계의 어린이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공장으로부터 납품을 받아 이윤을 극대화하길 원할까? 실제 주주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No'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경영진은 그렇게 하는 것이 회사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식회사제도는 ‘주주’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상정하여 주주들의 실제 의사와는 관련없이 거대자본의 운영 및 관리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 ‘추상적인 주주’들을 위하여 비도덕적인 일에 매진하도록 만든다. 혹자는 불법착취가 있는 공장에서 납품받는 것은 장기적 이익에 어긋나는 것이며 합리적인 경영진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므로 주식회사제도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자신이 주식을 가진 기업이 아동착취 등에 개입한 것에 대하여 주주총회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심지어는 대표소송을 제기한 소수주주들이 있다.

 하지만 사례를 덜 선정적이고 더 보편적인 방향으로 바꿔보면 제도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노동자들을 어르고 달래어 무노조원칙을 관철하는 행위는 어떨까? 또는 적극적으로 납품단가를 낮추어 하청업체 마진을 줄이는 행위는 어떨까? 장기적으로든 단기적으로든 회사에 이익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자사 노동자들과 하청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강도를 높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행위들이 무조건 비도덕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정도에 따라서 비도덕적일 수도 있지만 주식회사제도 상의 이사의 의무는 이를 정당화시킨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행위들에 대해서 실제 주주들이 ‘그건 우리 주주들의 이익에 반하는거야’라고 외쳐도 경영진은 면책된다.

 일반적으로 회사가 장애인을 고용하면 그 회사의 이윤이 떨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합리적인 배려를 해주기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식회사제도는 장애인들을 위해 자본이 이용될 것을 저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장애인들은 채용에서 차별될 수 없지만 채용결정에는 항상 폭넓은 재량이 주어지는 것은 사실이며 주식회사제도는 경영진들에게 장애인들을 기피할 관성만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실제 주주들은 기업들의 ‘선행’을 바라지 않는다고 할지 모른다. <예스맨프로젝트>라는 도큐멘터리에서 한 기업윤리운동가가 80년대에 인도의 보팔에서 발생한 살충제공장 폭발사고를 일으킨 공장주인 유니온카바이드사를 인수한 듀퐁사의 대변인을 사칭하여 폭발사고 피해자들에 대해 수조원대의 피해보상을 하겠다는 발표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인류가 오랫동안 기업들에게 졸라왔던 것을 들어준다는 의미에서 프로젝트명이 ‘Yesman'이다) BBC를 포함하여 전세계의 언론이 이를 칭찬하였지만 듀퐁의 주가는 도리어 폭락했다. 실제로 피와 살을 가진 주주들은 회사가 폭발사고의 피해자들(이들의 상당사는 영구적인 장애를 겪고 있고 이들의 자녀들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지기를 싫어했던 것 아닐까?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게임이론이 밝혀냈던 것과 비슷한 문제가 있다. 듀퐁사의 주주들 대부분은 과반수가 피해보상을 찬성하면서도 ‘다른 주주들은 피해보상에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주주들’이 주식을 팔기 시작하면 주가가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모두들 자신이 먼저 팔려고 했을 것이다. 결국 주주들이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면 주가가 올랐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주가가 떨어져버린 것이다. 사실 위에서 말한 모순도 경영진이 실제 주주들의 마음을 확인해보지 않고 주주들을 이익만 좇는 사람들로 추상화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착시를 먹고 살면서 우리 스스로를 억누르는 제도 또는 제도의 부재는 많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복지가 OECD국중 최저수준인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지를 필요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복지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양보하자면, 자신은 복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복지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복지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치적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장애인인권의 문제의 한 축은 복지제도의 문제에 포함되어 있다. 장애인의 90%는 후천적이라고 한다. 우리가 우리 중의 누구라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장애인복지에 투입될 수 있도록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있을 것이다. 아니 세금이 아니더라도 당장 장애인전용주차장을 만드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장애인이 되었다고 하여서 인간다운 삶이 부인된다면 모든 사람들은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안고 사는 이상 똑같이 인간다운 삶이 부인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라는 책에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불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험에 가입하였다고 가정하여야 하며(강제보험!) 이 보험료가 바로 세금이며 보험금이 복지제도가 된다고 주장한다. 드워킨은 참고로 자신의 선택에 관련없이 맞게 모든 악재를 보험으로 방어해야 할 불행으로 정의하여 선천적인 능력의 부재마저도 가상의 강제보험을 통한 재분배의 대상으로 여긴다. 물론 지금의 치열한 싸움은, 원했던 결과를 이루지 못하는 모든 경우가 불행으로 인정될 수는 없으며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가상의 강제보험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예를 들어 대학교등록금이 없는 상황도 ‘우리 모두가 보험으로 방어했을 불행’으로 여겨야 할까?)

 장애인복지문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항’으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우리들 자신을 살펴보자. 당장 우리들이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조금이라도 주문이 늦게 나오면 짜증을 낼 때 과연 점포주인은 활동능력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제한이 있는 장애인을 채용하려고 할까. 주식회사제도도 궁극적으로는 우리 ‘밖’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억압적인 구조는 항상 외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조응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반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며 반복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사회가 아무리 민주화가 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무방비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진정한 인권은 찾아오지 않는다.

 결국 인권운동이 사람을 위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라면 장애인을 위한 운동은 항상 전체 인권운동과 같이 가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하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다수’ 또는 ‘기득권층’과 원치않는 ‘차이’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 그 ‘차이’에 위축되거나 제한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을 말한다면 장애는 이와 같은 ‘차이’의 하나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거나 또는 저렇게 될 수 있었지만 복지에 의지하지 않고 불행을 혼자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의 고통의 깊이를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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